묵상 및 나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 앞에서 항복하다

이창무 2020. 6. 29.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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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과 진리 앞에서 항복하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1969년 서울에서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났을 때 집안의 첫 손주를 본 할아버지께서 기쁜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저를 보자 마자 이렇게 말씀하시고 곧바로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두 아이를 잃어봐서 아는데 저 녀석은 오래 못 살 거다.” 그러나 숱한 잔병치레를 하긴 했지만 저는 할아버지의 예언과 달리 살아남았습니다. 동네에서 놀다 보면 튼튼한 친구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무슨 게임을 하든 항상 제가 술래가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동생들이 ‘형! 형은 깍두기 시켜줄께’ 라고 말했을 때 고맙기 보다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유달리 피부가 까무잡잡했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좀처럼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었습니다. “썩은 무” 또는 당시 유명 미드의 흑인 주인공의 이름에서 유래된 ‘쿤타킨테’가 제 대표적인 별명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한 번은 혹시 미백 효과가 있을까 발의 각질을 제거하는 돌로 피부를 박박 문질러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부가 하얗게 되는 것이 아니라 피가 나와 빨갛게 될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육체로는 내세울 것이 없으니 정신적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 보이고자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공부도 꽤 잘 하게 되어 인정을 받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책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는 책벌레로 유명했습니다.

이렇게 열등감과 우월감이 뒤죽박죽이 된 채 조용히 살던 저를 고등학교가 강제로 끌어냈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서울 변두리 공단 주변의 고등학교는 폭력이 난무하던 곳이었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 중에는 영등포 일대 유흥가에서 조폭 행동대원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책가방에서는 종종 신문지에 싸인 사시미(회칼)가 나오곤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선생님 대로 이런 아이들을 통제하느라 매질이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 담임 선생님은 제가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반장으로 임명해 버렸습니다. 저는 아이들도 너무 무섭고 선생님도 너무 무서웠습니다. 아이들이 화장실 안에 모여 담배를 필 때 밖에서 망을 봐주었습니다. 방과 후에는 살며시 교무실로 가 선생님께 우리반 흡연자 리스트를 드렸습니다. 이런 이중 생활이 저는 너무 싫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줏대 없이 눈치 보며 비겁하게 사는 이유가 내가 살아 가야할 참된 길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고 용기를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때부터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서적을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지만 그래도 읽었습니다. 그러다 맹자를 읽고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패권을 마구 휘두르는 선생님들에게 반장의 이름으로 왕도 정치를 실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그분들께 주먹, 발, 걸레, 혁대 등 다양한 도구로 맞았습니다. 저는 대학에만 가면 이 지옥 같은 학교를 탈출해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하는 새로운 삶이 펼쳐 지리라 기대했습니다.

1988년 고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제 기대는 금세 다 무너졌습니다. 학과 안에서나 동아리에서나 함께 진지하게 진리를 탐구할 친구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학교는 화염병을 들고 각목을 휘두르는 시위대와 최루탄을 쏘며 이를 진압하는 전경들의 폭력이 고등학교 때처럼 날마다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5월인데도 추위가 가시지 않은 강의실을 잠시 벗어나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을 때 한 UBF 목자님이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 진리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는 이 말에 이끌려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공부를 했는데 밤에 온 니고데모, 38년된 중풍병자, 다섯 번 이혼했던 사마리아 여인 등등 세상에 별별 희한한 사람이 다 있구나 하면서 재미있게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 또 다시 요한복음을 공부하게 되었을 때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할수록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요한복음의 등장 인물들이 모두 다 저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저자 요한이 이천 년 후 제가 공부할 것을 미리 알고 저에 대해 써 놓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가 깊이 병든 자이며 그 원인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난 죄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자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여름 날 천둥 번개가 치던 밤 불현듯 이 날이 내가 심판 받는 날이라는 생각에 이불 속에 들어가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다음날 목자님이 수양회를 앞 두고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으로 소감을 써보도록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 제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저를 죄로 멸망하지 않게 하고 영생을 주시려고 하나 뿐인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앞에 저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 안에 열등감과 폭력으로 인한 상처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이후 3학년이 된 저는 ‘캠퍼스 어디인가에 과거 나 같은 사람이 있을텐데…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공계와 인문계를 이리 저리 쏘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님과 첫사랑에 흠뻑 빠져 있던 이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4학년이 되었을 때 다시 저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라는 인생의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집으로 빚쟁이가 찾아오고 체납 때문에 전화가 끊어지는 일들을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화병이 나서 앓아 누우셨습니다. 사업 실패의 원인이 아버지가 믿었던 친구이자 동업자의 속임수와 배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착하고 성실하신 아버지 같은 사람은 망하고, 거짓과 탐욕에 눈 먼 자들이 득세하며 사는 현실을 보며 다시 저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악이 선에게 승리하는 곳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선이 악에게 처절하게 패배한 사건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소망 없는 세상은 빨리 떠나는 것이 안식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학과 공부도 내팽개쳐 놓고 종일 신문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는 길인가를 연구하곤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끌려가듯 간 수양회의 타이틀이 저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았습니다. 타이틀은 ‘광명의 십자가’였습니다. ‘참혹한 십자가가 어떻게 광명의 십자가가 될 수 있는가?’를 내내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이 저에게 그 해답을 주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비로소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영접한 후 신기하게도 한 순간에 제 내면의 어둠이 싹 물러갔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 소망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신음하던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건져 내신 하나님의 한량 없는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새 힘은 얻은 저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에 가서 보니 제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의 우연한 선택에 의해 제 삶이 이리 저리 결정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몹시 불안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기 위해 내 아들까지 주었는데 지금 와서 내버려 두겠느냐?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내 전능한 손바닥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라” 이를 영접한 후부터 저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내무반에 와 보니 책꽂이에 UBF 일용할 양식이 수북이 꽂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종로 2부 스텝 목자인 이스펄젼 목자님이 이 내무반에서 일주일 전에 전역하시며 두고 가신 것이었습니다. 스펄젼 목자님에게 훈련된 내무반 고참들은 제가 기독교인인 것을 알고 근무 시간표까지 먼저 알아서 조정해 주면서 제가 예배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수요예배, 주일 예배, 주일 저녁 예배 이렇게 매주 세 번의 예배를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전역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입대 직전에 서원 기도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제 인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전역 후 LG 그룹 인사팀에 곧바로 입사했습니다. 얼마 후 제 동역자와 약혼을 하고 약 일년 후 결혼을 했습니다. 제 동역자는 저와는 달리 단순하고 발랄했습니다. 어제 일을 전혀 기억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대조적인 면이 저의 부족한 면을 잘 채워주었습니다. 저는 동역자와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친밀함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과도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세 명의 딸을 저에게 보내주셔서 온통 꽃들에게 둘러싸인 행복한 아빠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부족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제 나름대로 고민은 있었습니다. IMF 사태 가운데 줄줄이 퇴출되어 나가는 선배들을 보았습니다. 오래 살아 남는다 해도 그 미래가 결국 부장님의 현재 모습이라니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사표를 내고 고대 컴퓨터학과에 편입했습니다. 졸업 후 IT 업계로 진출하여 경력을 쌓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미국에 프로그래머로 취업하여 선교사로 제 2의 인생을 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프로그래밍의 1도 모르고 전공으로 곧바로 들어갔으니 학과 공부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매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고 4.41의 학점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 후 적은 연봉과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도 통할 수 있는 분야의 벤처 기업을 택해 들어갔습니다. 야근을 밥 먹듯 하며 고생했지만 회사는 계속 고군분투 중이었습니다. 실리콘 밸리의 IT 거품도 꺼져버렸습니다. 혹시 다른 길이 열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고대에서 경영학 석사 공부도 병행했습니다. 하지만 힘들게 MBA를 마친 후에도 별 뾰족한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너무 우울해진 나머지 입맛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이렇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딴 것도 아니고 선교사가 되겠다는데 왜 이렇게 안 도와 주십니까? 경영대 동기들 중에는 벌써 성공한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저를 더 잘 되게 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저를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오셨듯이 제임스 패커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책을 읽다가 울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잘 몰랐던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이리저리 판단했던 저의 교만함과 세상을 사랑하는 속물 같은 마음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를 지금까지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이제 일생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예배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후 찬양 인도자로 또는 메신저로 예배를 섬기며, 정루이스 선교사를 비롯해 여러 형제들을 말씀으로 돕고 양육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미국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제 전문 분야의 사업을 하시던 뉴저지 존 박 선교사님을 만나고 취업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진행하던 미국 변호사가 수수료 입금을 누락하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일 년을 더 기다렸다가 다시 신청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문제 없이 비자를 받았습니다. 집도 부동산에 내어 놓고 2010년 초에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마칠 무렵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한창 목자의 삶에서 오는 기쁨과 보람에 푹 빠져 있었는데 선교사로 가서 적응하는 기간 동안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꼭 가야하나 혼자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즈음 시립대 근처 한 까페에서 사람을 기다리던 중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마치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고 주위가 다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선교사로 가고 안 가고 중요하지 않다. 다만 네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일 후 갑자기 김모세 목자님께서 양수리로 가서 밥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선교사로 가지 말고 한국에 남아 Full-time으로 안암UBF를 섬기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별 주저함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전하자 동역자가 난리가 났습니다. 미국 선교사가 평생 꿈이었는데 이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복잡한 사정이 겹치는 바람에 저는 거의 2년 동안을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애매한 기다림에 지쳐갔지만, 하나님의 원수되었던 저를 사랑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견딜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2012년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목자 생활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심오한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깨달을 때마다 감사하여 수업 중에 눈물을 자주 흘렸습니다. 또한 지혜와 인격이 뛰어난 교수님들로부터 통찰력을 얻으며 다양한 경험을 가진 동기들과 교제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4.41이라는 좋은 성적을 받아 전체 졸업생 대표로 졸업장을 받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이와 함께 안암1부에서 학생 제자 양성 역사, 각종 수양회 역사를 섬기고 메시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2016년에 꽤 늦은 나이에 정식 스탭 목자가 되었습니다. 2018년 순회 교육을 시작하면서 스탭 모임에서 앞으로 내가 어떤 목자가 되고자 하는지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로, 오래 참고 기다리는 목자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강 강득현 목자님과 제가 친구라고 하면 매우 놀랍니다. 강득현 목자님은 졸업하자 마자 일찍 스탭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저는 오래 동안 방황만 하다가 뒤늦게 풀타임 사역자가 되었으니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를 늦게 라도 풀타임 스탭이요 안암골의 목자로 부르신 뜻이 저처럼 좀처럼 쉽게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목자가 되라는 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을 배워 그렇게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꿀벌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꿀벌은 꽃밭을 찾아 열심히 날아가 꿀을 모아옵니다. 그렇게 모아 온 꿀로 어린 꿀벌들을 먹이고 양육합니다. 저는 제 스스로를 안암1부에서 보낸 꿀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묵상을 통해 꿀을 모으고 스탭 목임에 가서도 꿀을 모으고 책에서도 꿀을 모으고 한국과 세계 교회의 유산들로부터도 꿀을 모으고자 합니다. 제가 이렇게 모은 꿀을 사랑하는 안암 1부의 동역자들과 양들에게 열심히 전달해 드리는 것이 제 사명이라 여깁니다. 이를 위해 제가 공부하는 목자, 연구하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요리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실제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집에서도 제 아이들이 엄마가 해 주는 음식보다 아빠가 해 주는 음식을 더 기다립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참 행복합니다. 좋은 요리가 되려면 먼저는 재료의 본연의 맛을 살려야 하고 다음으로 적절히 양념을 가미해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 재료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먼저는 성경의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씀을 잘 먹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적용도 하고 풀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건강한 집밥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안암1부의 모든 식구들이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저도 가장 기쁘고 행복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메신저이자 성경 선생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내게로 왔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네루다는 내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내게로 왔기 때문에 나는 시를 쓸 수밖에 없다고 노래합니다. 저는 '말씀이 내게로 왔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말씀의 종이 될 만한 사람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지독하게 인본적이고 교만한 사람이었고 소원도 없고 어둡고 방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저에게 왔고 저를 변화시켰고 또한 저를 통해서 말씀이 들려지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허물이 많지만 안암1부를 섬기는 가운데 여러 목자님들을 잘 배우고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를 목자로 부르시고 말씀의 종으로 사용하고자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께 감사 찬송 드립니다.

한 마디 “말씀이 내게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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