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및 나눔/단상

거절을 통과한 믿음

이창무 2017. 12. 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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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제사 드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왜 아벨의 제사는 수용하시고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그 이유를 찾으려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가인이 좋은 것을 먼저 갖고 남는 것으로 드렸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는 하나님이 피 흘려 양을 잡아서 드렸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더 좋아하시고 곡식으로 드린 가인의 제사는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견해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확실한 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확실한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경이 우리에게 이유를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거절하셨다는 점입니다.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제물을 드릴 때 가인의 상태가 아니라 제물을 하나님께 거절당한 후의 가인의 반응입니다. 성경은 이때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거절이 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공평하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사는 말도 안 된다고 보고 욱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왔습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가인의 내면 상태를 다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절이 없었다면 알 수 없었을 그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불의하실 수도 있는 분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이 거절하셔서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상처 받은 내가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당한 반응이라고 여길 뿐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자여가 아무리 극존칭이라 하더라도 어머니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극존칭을 씀으로서 오히려 거리를 두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신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도 좀 듣기에 거북하고, 내 때가 이르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씀입니다.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거절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때 마리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가인과는 달랐습니다. ‘마리아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이런 구절이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묵묵히 하인들을 준비시킵니다. 똑 같이 거절을 당했는데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거절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충격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근본적으로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자기가 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하셨음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고 받다 들였습니다. 거절을 당했을 때 반응으로 마리아의 내면 상태가 드러났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구할 때는 그 사람의 내면 상태를 잘 알 수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절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소원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거절당할 때 그 사람의 내면 상태가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은 화를 냅니다. 나한테 이럴 수는 없다고 합니다. 상처 받았다고 합니다. 설령 말을 하지 않아도 얼굴 표정으로 다 드러납니다. 그가 하나님의 완전한 선하심을 믿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 자신을 대단히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것. 하나님 앞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요. 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거절을 수용합니다. 그렇다고 기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화내지는 않습니다. 안색이 변하지도 않습니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분명히 내가 모를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을 나타냅니다.




짐 캐리가 주연했던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브루스는 바라는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일주일 동안 전능한 힘을 줄 테니 세상을 통치해 보라고 하십니다(모건 프리먼이 하나님 역할로 나옵니다). 브루스는 신이 나서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 비는 대로 무조건 즉시 다 들어주었습니다. 거절은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세상은 완전히 뒤죽박죽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버렸습니다. 결국 브루스는 항복하고 하나님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도록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뜻이 아니라 선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이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거절하셨다면 선을 이루기 위해서이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이든 구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짜 믿음은 거절을 통과한 믿음입니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거절을 통과하지 못하면 신뢰가 깨어지고 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추락하고 맙니다. 거절을 당할 때 우리는 가인이 될 것인지 마리아가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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