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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식이 변하여 희락이 되리니
    설교/스가랴 2015.05.01 01:15

    금식이 변하여 희락이 되리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슥8:19)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견해 중 하나가 기독교는 금욕적인 종교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회사에서 몇 명의 서로 다른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똑 같은 말이 있습니다. “너는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니?” 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제가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멀리 놀러가지도 않는데 제가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선배님이 모르는 재미가 있어요. 궁금하시면 저랑 같이 교회에 가보실래요?” 그러면 그 선배들은 대개 손사래를 치면서 “됐다. 너나 가라” 그러면서 황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는 금욕적인 종교입니까? 아닙니까?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천국에 가려고 이 땅에서 재미 없고 따분하고 지루한 삶을 견뎌내는 것입니까? 사실 이런 생각처럼 기독교에 대한 큰 오해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창세기 2 장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기쁨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놀라게 됩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금욕적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논쟁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이 논쟁들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금욕주의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명절하면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십니까? 짜증나는 교통 체증이 떠오르십니까? 친척들끼리 모여 치는 고스톱이 생각나십니까? 이런 것들은 다 곁가지일 뿐이고 명절의 본질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날입니다. 얼마전에 추석이 있었습니다. 추석을 다른 말로 한가위라고도 하는데 우리 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추석 명절이 즐겁고 기뻤으면 이런 말이 생겨났겠습니까? 


    명절이 즐거운 이유 중에 하나가 명절에나 먹어 보게 되는 맛난 음식들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추석에 큰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먹었습니다. 특히 녹두전이 기가 막혔습니다. 녹두의 고소한 맛과 씹는 느낌이 일품이었습니다. 저는 후라이팬 옆에 앉아서 일을 돕는 척하면서 전이 익는대로 낼름낼름 집어 먹었습니다. 덕분에 한 3 킬로 그램은 더 몸무게가 늘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한 가지 별명을 얻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별명은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 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잔치가 열렸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첫번째 기적을 행하신 장소가 흥겨운 혼인 잔치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다 떨어져 망할 뻔 했던 잔치집에서 물을 포도주를 변화시켜 주셔서 더욱 큰 즐거움과 기쁨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그 즉시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임금이 베푸는 황태자의 혼인 잔치와 같다고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 없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잔치집입니다. 추석보다도 즐겁고 고연전보다도 흥겨운 곳입니다. 기독교는 기쁨과 희락과 즐거움입니다. 기쁨이 없는 기독교는 가짜 기독교입니다. 근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는 기독교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승려들이 수행하는 절간의 분위기는 아주 조용하고 고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전혀 다릅니다. 노래하고 찬송하고 격려하고 축복하고 먹고 마시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구원의 기쁨을 다 함께 모여 나누고 경축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더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를 맞기에 앞서서 넷째, 다섯째, 일곱째, 열째 달의 금식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에도 금식 혹은 단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금식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다이어트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 때문에 부득이하게 금식합니다. 수술을 받기 직전이나 건강검진을 앞두고 금식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억울하고 분한 일을 만났을 때 항의의 표시로 금식을 합니다. 소위 말하는 단식 농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당시 유다 족속들은 왜 금식을 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를 하다가 징계를 받아 현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금식은 다이어트 때문도 아니고 건강 때문도 아니고 항의의 표시도 아니고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여 생겨난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을 마음 껏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반드시 나의 죄에 대한 자각과 그로 인한 깊은 슬픔을 느끼는 기간 즉 금식의 기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부패함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길 수 밖에 없는 경건한 슬픔의 시기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처음에 성경 공부할 때는 잘 몰랐는데 하면 할 수록 나 자신의 비참함에 눈을 뜨게 되면서 슬픔에 사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님께 이렇게 따졌습니다. “아니. 목자님! 처음에 목자님이 성경 공부하면 기쁨이 충만해 진다고 했는데 이게 뭡니까? 저는 하면 할수록 기쁨이 충만해지기는 커녕 비참해지는 느낌이 더욱 커져갈 뿐이에요” 그러자 목자님이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음. 올 것이 왔군요.” 만약 우리가 성경을 진지하게 제대로 공부한다면 누구나 반드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밥맛을 잃어 버려 금식할 정도로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일이 아닐 뿐더라 반드시 이런 슬픔을 느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은 이런 깊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이 되게 하십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가 모두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의 금식이 흥겨운 잔치로 변합니다. 슬픔이 기쁨이 되며 절망이 희망이 되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아직도 얄팍하고 순간적인 세상 즐거움에 취해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나의 죄에 대한 깊은 슬픔으로 인해 금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에게 실망하여 깊은 어두움에 빠져 계십니까? 이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잔치를 벌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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