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성탄절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

이창무 2015. 12. 9.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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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


말씀 : 이사야 11:1-5

요절 :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주신 성탄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성탄 메시지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때에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소망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증거하는 메시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소망의 싹이 되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10장에 따르면 당시 중근동 지방의 패권을 손에 넣었던 나라인 앗수르의 위용은 울창한 삼림과 같았습니다. 반면에 메시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싹이었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다윗의 줄기라고 하지 않고 굳이 이새의 줄기라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윗을 흠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흠모하여 다윗이란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흠모는 그만두고 이름을 기억하는 이조차 별로 없습니다. 이새는 시골 베들레헴에서 양 치는 평범한 목자였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메시야는 royal family나 high class가 아니라 이새의 집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집에서 태어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메시야가 이새의 뿌리에서 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뿌리는 나무가 다 꺾이고 꺾여 겨우 밑둥만 남은 상태를 말합니다. 메시야는 그 뿌리에서 한 싹으로, 한 가지로 태어납니다. 한 싹, 한 가지는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추운 겨울 밤, 한 싹을 잠깐 밖에 내놓아 보세요. 당장 얼어 죽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폭풍 앞에 연약합니다. 성경은 그런 연약한 한 싹과 한 가지에서 결실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연약한 한 싹과 한 가지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지’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나사렛이란 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라나신 바로 그 동네와 발음이 같습니다. 참 신비한 일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다윗의 몸에서 메시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가문은 찍혀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유다는 바벨론으로 잡혀 가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겨우 유다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지만 강대국의 짓밟힘은 계속되었습니다. 수리아와 로마의 짓밟힘 속에 유다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조차 침묵하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은 400여 년간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 같았습니다. 겨우 밑둥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지가 꺾기고 나무가 송두리 채 베임을 당한 그런 절망의 때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되 시골 나사렛의 목수 출신인 요셉과 정혼한 시골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울 곳이 없어 가장 천한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무시 받고 천대받던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는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사53:2)”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핍박하다 못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만백성이 그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세상 역사는 왕궁에서 호화스럽게 출발합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때가 되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3년 전 박근혜 대통령은 모든 사람들의 박수와 함께 화려하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역사는 초라하게 출발합니다. 축전 한 장 보내 주는 사람 없고, 화분 하나 보내 주는 사람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미미하게 출발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아를 보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도 가장 절망적일 때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희망적일 때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학교는 휴교를 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십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4학년 때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죽음 권세에 짓눌려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계획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우울에 빠져있었을 때 주권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민족도 지난 주일 말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말 그래도 소망이 안 보이던 헬조선이었던 시기에 평양대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모든 면에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상황은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나무는 베이고 밑둥만 남은 것 같은 상황에서 새 순이 돋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작고 연약해 보일지라도 그 순이 자라서 결실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현재 자라고 있는 학생들과 2세들이 새 순과 같은 존재들이 아닐까 합니다. 이들이 새 시대를 열어갈 희망의 싹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가장 절망적일 때 희망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에게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실 수 있는 자격은 곧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고(눅3:35),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으셨습니다(눅4:18). 성령으로 인치시고(요6:27), 성령의 옷 입으시며(눅4:14)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습니다(눅4:1).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시고(눅4:1,2), 성령으로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셨고(히9:14), 성령으로 부활하셨습니다(롬8:11). 

메시아로 임명받으신 예수님은 리더십을 위한 지혜와 총명의 영, 자신의 지혜로운 계획을 실행할 모략과 재능의 영, 거룩함을 위한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어느 한 곳 비거나 모자란 곳이 없이 골고루 모든 면에서 성령 충만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감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떻게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치실 수 있을까 신기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으며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목마름의 문제를 어떻게 집어내셨는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이 붙었을 때 한 마디 말로 그들의 입을 다물어 버리게 만드시는 그 지혜에 놀라게 됩니다. 또한 갈릴리 촌구석에서 무지랭이 같던 어부들을 어떻게 3년에 뛰어난 성경선생이자 영적 지도자들로 양육하실 수 있으셨는지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실 수 있었던 힘은 여호와의 영이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연약한 싹과 가지라 할지라도 성령충만할 때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리더십과 실행력과 인격을 겸비한 지도자, 지성과 영성과 덕성을 삼박자로 구현한 지도자, 그런 지도자가 절실해 지는 시대입니다. 얼마 전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한 후 그분을 재평가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뚝심 있고 용기 있는 지도자였다는 점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일치된 견해인 것 같습니다. 그와 동시에 왜 요즘엔 이런 지도자를 볼 수 없냐는 자조 섞인 한탄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시대를 감당할만한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2절 말씀이 보여주듯이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 그런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만이 성령님으로부터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경외심을 공급받아 하나님 역사를 능력 있게 섬길 수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싹과 가지라 할지라도 성령충만할 때 울창한 삼림에 맞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목자요 부모요 지도자로서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은 성령 충만입니다. 이미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지만 성령충만은 구하고 매달리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3절부터 5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여기서 ‘즐거움을 삼는다’는 원어 성경에 코로 호흡한다는 뜻입니다. 코로 호흡한다는 것은 단순히 냄새를 맡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은 향기를 지속적으로 만끽하는 것을 뜻합니다. 커피맛을 모르는 사람은 보리차 마시듯이 꿀꺽꿀꺽 삼킵니다. 그러나 커피 맛을 아는 사람들은 커피에서 나오는 독특한 향기를 맡으며 마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 참된 만족과 즐거움을 삼으셨습니다. 반면 세상의 권력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중에는 갑질하는데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맘대로 내 기분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합니다. 약한 사람을 골라서 괴롭히고 골탕 먹이는데서 재미를 맛보려고 합니다. 우리 학사 목자님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힘든 것은 과중한 업무가 아닐 것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윗사람이나 아래 사람이나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겉만 보고 혹은 단면만 보고 “저 사람 왜 저래?” 하며 임의로 판단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겉만 보고, 또 소문만 듣고 “팔자가 센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녀와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해 타는 목마름으로 몸부림치는 그녀의 내면을 보셨고, 그 영혼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4:13,14) 더 나아가 그녀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시는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눈에 보이는 대로, 혹은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중심을 보십니다.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나 세상 권력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권세를 부리지 않으시고 종이 되어 죄인들을 섬기십니다. 나를 깊이 이해하시고, 나의 처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위로와 쉼을 얻습니다.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한 자들이 올바른 대접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잘 나가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때가 되면 악인들을 막대기로 심판하십니다.


요즘 금수저 흙수저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합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다 옛날 말이라고 합니다. 개천에 콘크리트를 다 덮어놔서 용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실력과 노력이 있어도 부모님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들 합니다. 흙수저가 아무리 기를 써봐도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탄식합니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그 사람의 배경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진학과 취업과 결혼과 같은 중대사들이 다 외적 조건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자를 내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금수저 흙수저는 다 부질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흙수저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고쳐주시고 섬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공의로운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통치가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세상 구석 구석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할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 복음을 힘써 전파하여 이 시대 흙수저들이 예수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쉼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에게 임한 성탄 메시지였습니다. 11장을 기록할 당시 이사야는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나라는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온통 나라가 썩을 대로 썩어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잘려진 밑둥에서 싹이 나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꿈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놀라운 희망의 역사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 청년들도 소망이 안 보인다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이 임하여 꿈을 꾸고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희망을 보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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