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추수감사절 / 이창무
나만의 감사에서 우리 모두의 감사로
말씀 / 고린도전서 11:17–34
요절 / 고린도전서 11: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서론 - 감사한 죄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성숙도를 재는 척도이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담는 그릇이라고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때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감사라는 겉포장 뒤에 우리의 욕망을 숨겨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의 감사가 도리어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박노해라는 시인의 시 중에 ‘감사한 죄’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제목부터 참 도발적이고 역설적입니다. ‘감사’와 ‘죄’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단어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는 팔순의 노모가 등장합니다. 평생을 홀몸으로 거친 노동을 감내하며 오남매를 키워낸 강인한 한국의 어머니였습니다. 또한 기도로 잔뼈가 굵은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늙은 어머니가 기도하다 말고 하염없이 흐느껴 웁니다. 자식들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몸이 아파서도 아닙니다. 인생의 황혼, 팔순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지난날 바쳤던 수많은 감사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리의 리어카 노점상들이 단속반에 질질 끌려갈 때, 나는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이 봐주어서 감사했다. 남들은 일거리가 없어 빈손으로 힘없이 돌아설 때, 나는 파출부 일자리가 끊이지 않아 감사했다. 다른 어머니의 아들은 학생 운동하다가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할 때 내 아들만은 몸 성히 돌아왔음에… 나는 바보처럼 감사 기도만 드리며 살았구나.”
이 어머니의 눈물이, 그 가슴 치는 회개가 이해가 되십니까? 어머니가 평생 감사했던 내용들이 혹시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간증’이라고 부르는 것들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닐까요? “남들은 다 불황이라 망했는데, 하나님이 내 사업만은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들은 다 입시에서 떨어졌는데, 내 자식만 턱걸이로 붙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사람들은 이번 사고로 크게 다쳤는데, 우리 가족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아 감사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의 불행을 배경으로 삼아 나의 안위를 확인하고 이에 감사하고, 그것이 믿음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시 속의 어머니는 깨달았습니다. 이웃의 비명과 고통을 외면한 채, 나 혼자만 누리는 그 안도감은 참된 감사가 될 수 없음을 말입니다. 그것은 감사를 가장한 이기심이며,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했던 ‘감사한 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펼친 고린도전서 11장에는 바로 이 문제를 안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나만의 감사’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서, ‘우리 모두의 감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형제의 결핍을 외면한 채 나만 배부른 것은 '왜곡된 감사'입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낼 당시, 초대 교회의 예배는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사뭇 다른 점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당시 주일은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녁에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1부와 2부가 있었습니다. 1부는 애찬이라고 부르는 공동 식사였습니다. 이 애찬이 끝난 후에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성찬이 있는 2부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애찬은 성도들이 각자 형편껏 음식을 가져와서 한 자리에 모아 함께 나누는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셨던 식탁 교제를 재현하는 거룩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애찬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구성원은 사회적 계급이 다양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부유한 자유민 계급이 있었고, 해가 질 때까지 주인의 명령에 따라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노예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부유한 성도들은 예배 장소에 여유롭게 제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고기와 포도주를 꺼내놓고 끼리끼리 모여 먼저 식사를 했습니다. 시장하기에 허겁지겁 먹었고, 포도주를 과하게 마셔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반면 밤이 되어서야 겨우 일을 마치고 헐레벌떡 달려온 가난한 성도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이 도착했을 때, 식탁은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습니다. 남은 것은 빈 그릇과 빵 부스러기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치고 쫄쫄 굶은 상태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상황을 아주 건조하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합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21)
바울은 지금 부유한 자유민 출신의 신자들이 나눈 식사를 ‘주의 만찬(Lord’s Supper)’가 아닌 ‘자기의 만찬(Own Supper)’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지만, 실상은 자기 배만 채우는 사적인 파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일찍 와서 배를 채운 사람들은 식사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 이런 감사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주님, 오늘도 이렇게 풍성한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부 예배를 시작할 때도 이런 감사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주님, 이렇게 은혜롭고 축복이 넘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몇 미터 옆에 있는 형제는 배가 고파 꼬르륵 소리를 내며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데, 그 앞에서 트림을 하며 드리는 감사가 과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감사일까요? 나의 배부름이 누군가의 박탈감이 되고, 나의 풍요가 형제의 비참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면 그것이 축복일까요?
바울은 거침없이 질책을 합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22a)
가난한 형제들의 배고픔을 배려하지 않은 채 먼저 배를 채우는 행위는 단순히 식사 예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죄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형제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그 형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십자가 안에서 너와 내가 한 몸임을 깨닫는 것이 '성찬이 회복하는 감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무너져 버린 고린도 교회의 식탁을 바로잡기 위해,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밤, 다락방을 다시 소환합니다. 예배 때마다 시행하는 성찬 속에 이 문제 해결의 키가 있다는 것입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24)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너희를 위하는(For You)’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히 ‘타자를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보존하려 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쪼개고 찢어 우리들의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남을 배 부르게 하는 것, 나의 생명을 나누어서 형제를 살리는 것, 이것이 성찬의 본질적인 정신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찢으셨는데, 이들은 지금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형제의 마음을 찢고 있습니다. 입으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말하며 성찬의 떡을 먹고 있지만, 행동으로는 십자가의 희생 정신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경고합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9)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며 두려워했습니다. “혹시 내가 지은 죄를 다 회개하지 못하고 이 성찬을 먹고 마시면 저주를 받게 되나?” “요즘 내가 영적 상태가 별로 안 좋은데, 성찬에 참여했다가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오늘 문맥 속에서 바울이 말하는 주의 몸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앞선 10장 17절에서 ‘떡은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주의 몸’은 성찬의 떡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도의 공동체’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곧 여기서 주의 몸을 분별한다는 것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저 형제가 바로 내가 사랑해야 할, 예수님이 피 흘려 사신 주님의 몸인 것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말은 지식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남으로 취급하고, 소외시키면서, 자신은 마치 믿음 좋고 신실한 사람처럼 하나님께는 예배를 드리는 위선을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분별이 아니라 분리입니다. 형제끼리 나와 너를 나누고, 내 행운과 네 불행을 별개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남이 아니라 내가 함께 아파했어야 할 한 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성찬 예식 앞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영적 분별력입니다.
셋째, 축복을 움켜쥐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현주소를 아프게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30)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고린도 교회 안에 실제적으로 질병이나 죽음에 이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더 깊은 의미에서 이것은 공동체의 영적 건강 상태를 말합니다.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교회,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이미 병든 교회이며 영적으로 잠든 상태라는 것입니다. 공감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영적으로 나병에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바울은 31절에서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살핀다는 것은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말씀의 거울 앞에서 우리의 이기심과 위선을 깨뜨려야 합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시 속에 나오는 어머니는 생의 끝자락에서 비로서 자신을 살피었습니다. ‘나만 잘 되면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이들의 아픔을 전혀 돌아보지 못했었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이 아픈 자각,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가 우리를 참된 감사로 이끕니다.
이제 바울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아주 구체적인 처방을 내립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
이 짧은 한 마디에 성찬의 신비와 기독교 윤리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음식이 눈 앞에 있고 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내 돈으로 사서 내가 가져온 음식입니다. 내가 당당하게 먹을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멈춰라. 숟가락을 들지 마라. 형제가 고된 노동을 마치고 일터에서 돌아와 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헐레벌떡 뛰어온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라.”
왜 기다려야 합니까? 기다림은 나의 속도를 늦추어 타인의 속도에 맞추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나의 정당한 권리를 유보함으로써 형제의 존엄을 지켜주는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당신이 오지 않으면 나는 먹지 않겠습니다. 당신 없이는 나도 배부를 수 없습니다.”라는 무언의 고백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기다리지 않음에서 왔습니다. 나의 허기, 나의 욕망, 나의 성취가 급해서 형제를 뒤로 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에게 정반대를 가르칩니다. “기다리면 뺏긴다.” “남보다 먼저 도착해서 깃발을 꽂아라.” “남들이 주춤할 때가 기회다.” 속도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경쟁에서 이겨 획득한 전리품을 들고 와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다르게 살 것을 요청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1등으로 도착한 사람의 환호 소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 함께 가기 위해서 멈춰 선 사람의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나만의 감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감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복을 부정하거나, 감사를 멈춰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고, 우리 가족을 보호해 주시고, 필요한 건강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나에게 건강을 주셨다면 감사만 할 것이 아니라 그 건강한 몸으로 아픈 이웃의 손과 발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나에게 물질을 주셨다면 감사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물질이 궁핍한 이웃에게 흘러갈 수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은 나만의 요새를 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돌보라고, 양들과 동역자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거룩한 보급품입니다.
결론 - 나만의 식탁에서, 우리 모두의 천국 잔치로
1등으로 와서 혼자 먹는 밥은 배는 부를 지 몰라도 마음은 외롭습니다. 하지만 조금 늦게 먹더라도, 헐레벌떡 뛰어 온 형제의 땀을 닦아주며 함께 둘러앉아 먹는 밥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는 풍성한 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꿈꾸신 교회의 모습이고 우리가 장차 누릴 천국 잔치의 모습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귀하게 여길 때 비로서 우리가 성찬식에서 떼는 떡은 예수님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내년 1월 전국청년대학생수양회가 있습니다. 이 수양회가 결코 ‘우리 이렇게 많이 왔어요. 우리 지부가 이렇게 잘해요’ 자랑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본래 시작했던 취지대로 전국의 작은 개척 지부들이 새 힘을 얻고 살아나는 수양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년 5월 세계선교대회와 선교사 수양회가 있습니다. 이 행사가 결코 시간이 많고 여유로운 분들만 참여 가능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제 3 세계를 비롯한 전 세계에 계신 선교사님들이 함께 힘을 얻고 위로를 얻는 행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년은 안암 UBF 개척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 50년도 우리 교회가 나만의 속도를 줄이고 이웃의 속도에 발을 맞추어 가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거룩한 기다림의 자리에서 주님이 예비하신 진짜 기쁨과 감사를 맛보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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