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이창무 2023. 6. 1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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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13 강 / 이창무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말씀 / 사사기 16:1-31
요절 / 사사기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등 믿음의 선진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나옵니다. 그 이름들 중에 삼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삼손의 삶을 보면 아무래도 히브리서 저자가 깜빡 졸다가 이름을 영 잘못 올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삼손이 변합니다. 삼손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의 목록에 그가 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 세 가지 장면을 통해 삼손의 변화를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강한 힘을 가진 삼손입니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1)

이번에 삼손은 어디로 향합니까? 당시 블레셋의 수도인 가사입니다.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인데 거길 가다니 이것은 미친 짓 아닙니까? 그런데 왜 갑니까? 블레셋 창녀와 하루 밤을 보내기 위해서 입니다. 삼손이 끓어오르는 정욕의 충동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우려했던 대로 삼손은 블레셋 경비병들에게 둘러싸이고 맙니다. 삼손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쥐는 평범한 쥐가 아닙니다.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3)

한밤 중에 일어난 삼손은 가사의 성문을 갑자기 번쩍 들어 올립니다. 이 모습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오금이 저리고 넋이 나가서 삼손을 체포할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삼손은 유유히 성문짝을 헤브론까지 무려 60 킬로미터나 옮겨다 놓습니다. 삼손이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됩니다.

삼손이 가진 이 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힘이 세다는 것은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 힘으로 삼손은 블레셋을 칠 수 있었습니다. 적들에게 체포 당할 위험에 처했지만 가볍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삼손이 부럽습니다. 오죽하면 자신들이 만드는 제품이 튼튼하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삼손에서 이름을 따온 회사가 있겠습니까? 바로 유명한 가방 회사인 ‘쌤소나이트’ 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손이 가진 강력한 힘이 그의 인생에 독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삼손은 가면 갈수록 자신은 불패라는 확신이 강해집니다. 이 때문에 삼손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멈춰야 할 때는 멈추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합니다.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이런 삼손은 마치 강력한 엔진은 있으나 브레이크가 없는 스포츠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대형 사고가 터지는 일 외에는 도저히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존 플래블이라는 청교도 목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외적인 이득은 내면의 손실을 수반한다.” 여기서 외적인 이득이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성공이나 승리를 가리키고, 내면의 손실이란 경건함과 겸손과 지혜와 같은 내면의 성품을 배우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잘 나가면 나갈수록 점점 더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는 것은 내가 아주 잘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 아무도 내 앞길을 가로막지 마!” 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빠져버린 이 함정에 우리가 빠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영혼의 브레이크는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점검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힘이 약해진 삼손입니다.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4)

이번에 삼손은 블레셋 여인인 들릴라와 사랑에 빠집니다. 들릴라는 ‘밤의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름부터 작은 태양인 삼손을 집어 삼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아니나 다를까 블레셋 방백들이 들릴라에게 접근하여 삼손이 가진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아내면 20억 상당의 거액을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에 들릴라는 주저함 없이 연인인 삼손을 배신합니다. 무슨 자신감인지 대놓고 삼손에게 당신 힘의 원천을 내게 알려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대한 삼손의 반응이 또 의외입니다. 삼손은 전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장난 치듯 엉뚱한 대답만 여러차례 들려 줍니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합니다. 아마도 삼손은 위험할수록 더욱 더 흥분이 되고 이런 감정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둘 다 말로는 당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알다시피 삼손은 사자보다 강하지만 꿀처럼 달콤한 여인의 유혹에 너무 약한 남자입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마침내 삼손이 견디지 못하고 들릴라에게 실토를 하고 맙니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7)

삼손은 한 번도 깎은 적이 없는 긴 머리털이 힘의 원천이라고, 그리고 이 머리가 밀리고 나면 다른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이 약해질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진실을 알게 된 들릴라는 잠자던 삼손의 머리털을 밀어 버립니다. 그러자 정말 그의 힘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어진 삼손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20)

삼손은 들릴라에게 한 말이 있기 때문에 잠에서 깨며 자신의 머리카락이 사라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곧 삼손은 머리를 깎였어도 자기 힘이 여전히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를 뒷받침해 줄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삼손이 들릴라에게 진실을 말해 준 이유에도 전혀 조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삼손은 도리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깊은 잠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삼손이 머리카락이나 나실인 서원이 자기 힘의 원천이라고 정말로 믿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삼손은 자기 힘이 처음부터 자기의 것이었고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그 힘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삼손이 이렇게 믿었을까요? 그도 그럴 것이 삼손이 지금까지 나실인의 서원을 어긴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젊은 사자의 사체를 만진 적도 있고 결혼 잔치에서 거나하게 술을 퍼 마신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항상 그에게 힘이 주셨습니다. 그러니 삼손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금도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손의 결정적인 패착입니다. 흔히들 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호의가 계속 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자기의 힘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지 않고 결코 빼앗기지 않을 자신의 권리로 보고 있었습니다. 삼손의 가장 치명적인 죄는 은혜로 받은 것을 권리로 착각해 이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의 힘은 본래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삼손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삼손에 대해 그가 힘을 잃게 된 이유가 머리카락이 깎인 것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삼손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힘과 능력을 주신 분이신 동시에 힘을 가져가시고 연약하게 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실 때는 선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고 힘을 빼시고 연약하게 하실 때는 다른 하나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God is good, all the time. All the time, God is good!”

힘을 빼고 연약하게 하시는 데 그것이 어째서 선함과 사랑이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내 능력과 성취가 나의 고유한 권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내 힘으로 살 수 없고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야할 존재라는 것을 깊이 영접하게 된다면 이보다 큰 유익이 어디 있겠습니까? 앞서 언급했던 존 플래블 목사의 말을 이렇게 뒤집어 말해도 역시 진실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외적인 실패는 내면의 유익을 수반한다” 그러면 사사 삼손은 과연 외적인 실패를 통해서 내면의 유익을 얻게 되었는지 다음 장면을 살펴 보겠습니다.

셋째는 삼손의 죽음입니다.

붙잡힌 삼손은 눈이 뽑히고 사슬에 묶인 채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는 처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전 같으면 쉽게 풀어 버렸을 사슬인데 삼손이 아무리 힘을 주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힌 삼손의 머리 속으로 지나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온갖 후회가 파도처럼 계속 그의 마음을 덮쳐 옵니다. “그때 나실인 서약을 깨지 말았어야 했는데 …” “그때 들릴라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 마음 같아서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때의 자기 자신을 만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여보게, 삼손. 이렇게 하면 안 되네. 여기서 멈춰야 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삼손의 인생은 여기서 다 끝장이 난 것일까요?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22)

머리털이 밀린 후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굳이 기록한 이유는 삼손이 나실인이요 사사로서의 부르심을 다시 회복하게 될 소망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은 그가 죽는 날까지 나실인일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더라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판단합니다. 블레셋의 신들은 한번 잘라 버리면 그만이지 결코 용서하고 회복하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머리털이 자라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주신인 다곤의 신전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집회에 삼손을 불러내 재주를 부리도록 합니다.

여기 두 눈이 다 뽑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삼손이 서 있습니다. 사랑하던 여인에게 배신을 당해 힘을 잃은 연약한 몸으로 서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온갖 조롱과 멸시 앞에 바닥까지 떨어진 한 사나이가 서 있습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삼손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28)

먼저 삼손은 하나님을 주 여호와라 부르며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고 그분 앞에 자신을 낮춥니다. 자기 힘만 믿고 의기양양해 하던 그 삼손이 아닙니다. 또한 삼손은 하나님께서 나를 강하게 하실 수 있고 그렇게만 해 주시면 나 한 사람을 통해서 블레셋을 무찌를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의 본거지인 다곤 신전 한 가운데서 이런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삼손이 달라졌어요.” 삼손의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30)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그 순간 삼손은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비참한 패배자로 서 있던 그 순간 삼손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둡니다. 어떻게 이런 대반전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삼손이 죽음을 앞둔 바로 그 순간이 삼손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앞에 온전히 신실했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사사요 완전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의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삼손의 죽음을 생각하다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삼손의 죽음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삼손과 예수님 모두 친구인 척 가장했던 인물로부터 배신을 당했습니다. 바로 들릴라와 유다입니다. 물론 유다는 들릴라와 삼손의 관계만큼 예수님과 가깝지는 않았지만, 유다가 배신한 분은 삼손보다 훨씬 더 순결하고 훨씬 더 충성을 받아야 마땅한 분이셨습니다.

둘째로, 삼손과 예수님 모두 자신의 죽음으로 원수를 무너뜨렸습니다. 처음에는 블레셋과 다곤 신이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판세를 완전히 뒤바꾸고 블레셋과 다곤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사탄의 힘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시고, 사탄을 무장해제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셨기 때문에 사탄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고소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5)

셋째로, 삼손과 예수님 모두 홀로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대부분 사사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또는 몇몇 지파를 동원해서 압제자와 싸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삼손을 포함해서 아무도 여호와의 전쟁에 나서려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 삼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건져내는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삼손처럼 예수님도 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안에서 우리는 ‘죽어야 살게 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영원한 신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강한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약해진 후에 전보다 더 강해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 역시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셨습니다.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로 세상을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삼손과 예수님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도 있습니다. 삼손은 불순종의 결과로 낮아졌다면 예수님은 순종하심으로 자신을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삼손이 이룬 구원은 일시적이고 그 범위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반면,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은 영구적이고 그 효력이 온 세상에 미치는 구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31)

삼손의 이야기는 삼손의 죽음과 장사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후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무덤 이전만이 아니라 무덤 이후에도 영원히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역시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내 힘과 능력이 내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임을 알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내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의지해 삼손이 빠졌던 교만, 정욕, 분노, 안일과 같은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 전체 주제를 “죄를 이기는 복음의 능력”으로 하고자 합니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 우리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대죄라 불리던 대표적 죄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우리가 이 죄를 이길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통해 죄를 이기는 십자가의 능력,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말씀을 주시고 그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사사이자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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