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미가의 제사장

이창무 2023. 6. 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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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14 강 / 이창무

미가의 제사장

말씀 / 사사기 17:1-18:31
요절 / 사사기 17: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요즘 영화관에서는 영화가 다 끝난 후에도 관객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난 후 짤막하게 나오는 쿠키 영상을 보기 위해서 입니다. 사사기는 삼손을 끝으로 모든 사사들의 이야기를 다 마쳤습니다. 그러나 아직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아닙니다. 쿠키 영상에 해당하는 사사기의 에필로그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시겠지만 사사기는 서론이 두 개였습니다. 이것과 균형을 맞추려는 듯 사사기의 에필로그도 두 개입니다. 오늘은 그 중 첫번째 에필로그입니다. 오늘 말씀은 한 가정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하나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통해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미가의 집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17: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가는 어머니의 은 천 백 세겔을 훔쳤지만, 어머니가 도둑을 저주하는 말을 듣고서는 덜컥 겁을 집어 먹습니다. 결국 자신이 훔친 것을 이실직고하고 돈을 돌려줍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미가의 어머니는 저주를 뒤바꾸어 대신 아들이 축복 받기를 구합니다. 모전자전이라더니 미가와 미가의 어머니, 둘 다 손바닥 뒤집듯이 너무 쉽게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3)

이 구절에서 미가의 어머니는 다행히도 바알, 아스다롯, 다곤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녀의 다음 행동이 우리를 경악하게 만듭니다. 그녀는 돌아온 돈을 여호와께 드려서 아들이 한 신상을 만들게 합니다. 이것은 십계명 두 번째 계명을 노골적으로 어긴 것입니다.

여기에 미가는 한술 더 뜹니다. 신상들을 가져가서 자기 집의 신당에 둡니다. 또한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미가는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집에다 예배 처소를 만들어 버립니다. 편해서 좋긴 한데 미가는 제사장이 자기 아들인 것은 마음에 좀 걸립니다. 이때 미가의 신전을 업그레이드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7)

그는 원래 유다 베들레헴에서 사역하던 레위인입니다. 유다 지파가 십일조를 게을리한 바람에 이 레위인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다가 우연히 미가를 만나게 됩니다. 미가는 레위인에게 숙식 제공에 연봉 은 열 개를 약속하고 자기 집의 제사장이 될 것을 제안합니다. 레위인은 이 제안을 만족스럽게 여기고 미가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이로써 미가는 꽤 그럴듯 한 자신만의 신전을 완성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모습을 보면 미가의 어머니와 미가가 나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들여 신상과 신전을 만들고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하는 일에 썼습니다. 그들이 이런 수고를 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은혜에 대한 감사도,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표현도 아닙니다. 미가 스스로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13)

둘째로 단 지파 가운데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18:1)

단 지파는 아직까지도 거주할 땅을 구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다른 지파들은 용감히 싸워 기업을 주신 땅을 차지했지만,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 의해 산지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단 지파가 보낸 정찰대가 정착할 땅을 찾으러 가다가 미가의 집을 지나치게 됩니다. 레위인 제사장에게 정찰이 성공할지 여부를 하나님께 여쭤봐 달라고 요청합니다. 레위인은 그들에게 평안을 선포하고 너희 가는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합니까? 근거는 없습니다. 레위인은 그저 단 지파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었을 뿐입니다.  

정찰대는 이 말을 듣고 신이 나서 길을 떠납니다. 마침내 북쪽 끝에 라이스라는 꽤 괜찮아 보이는 땅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땅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넘겨 주신 땅이라고 선언합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합니까? 근거는 없습니다. 그냥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이고 내가 정복하기에 손쉬운 땅이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에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정복하기 위해 육 백 명의 군대를 파견합니다. 가는 길에 또 미가의 집을 지나갑니다. 그들은 미가의 집에 있는 신전을 그들의 새 땅으로 가져가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합니다. 미가의 집에 있던 신상을 싹 다 강탈해 갑니다. 이 일을 항변하는 레위인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19)

레위인은 이 말을 듣고 “야호”를 외칩니다. “한 때 집 없이 떠돌던 내가 한 지파의 제사장의 된다니! 엄마! 기뻐하세요. 저 대박 출세했어요.” 분명 이 레위인의 사회적 지위는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유다 베들레헴 마을에서, 그 다음은 에브라임 산지의 우상숭배의 요소가 다분한 신전으로, 결국에는 라이스로 가게 됩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땅 밖입니다.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 그가 내린 결정들은 하나 하나마다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일 황당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미가입니다. 그는 빼앗긴 것들을 되찾기 위해 이웃과 함께 단 지파를 추격해 옵니다. 하지만 단 지파의 군대가 훨씬 더 강한 것을 보고 바로 꼬리를 내립니다. 한 동안 미가는 사람들이 그의 개인 신전을 부러워하고 레위인이 날마다 축복의 말을 해주니 무척 해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더 강한 자 앞에서 자랑하고 의지했던 모든 것들을 다 잃고 맙니다. 미가가 지나온 이 길이 앞으로 단 지파가 갈 길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단 지파는 라이스로 진격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밥이다(You are our rice)!”를 외치며 정말 밥 먹듯이 손쉽게 라이스를 점령합니다. 그곳의 이름도 ‘단’이라고 개명합니다. 단 지파는 외칩니다. “연진아! 나 지금 너무 신나.”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단에서부터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실로까지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입니다. 또 실로의 제사장으로부터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을 듣기도 싫습니다. 그래서 단 지파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립니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30)

단 지파는 미가가 그랬듯이 자기 땅에 자신만의 성소를 세웁니다. 언제나 자신들이 원하는 말만 골라서 해 주는 친절한 레위인 요나단 씨를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내 알 바 아니고 우리끼리 모여 우리들이 편한 방식으로 예배 드리고 신앙 생활하자고 결의합니다. 일단 이 순간은 모두가 다 만족해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 속에 매우 치명적이고 불길한 표현이 하나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이라는 부분입니다. 단 지파의 행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미가가 자기보다 더 강한 단 지파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겼던 것처럼 단 지파는 자기보다 더 강한 앗수르 제국을 만나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더 심각한 일은 요한계시록 7장 5절부터 8절에 나옵니다. 천사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구원받은 사람의 숫자를 말해 줍니다. 그런데 거기에 단 지파는 아예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단 지파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미가의 집과 단 지파 이야기 사이를 이어주는 공통의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한 레위인입니다. 레위인은 예배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레위인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곧 예배가 오늘 말씀의 핵심 주제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에는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 흉악 범죄, 가정의 파괴 등등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사사기는 그 출발점에 예배의 타락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각자 자기가 편한 방식으로 예배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기준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장소에서 누구를 통해 어떻게 예배 드려야 하는지 다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소에서 아론의 후손이 제사장이 되어 어떤 형상으로도 제한할 수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미가도, 단 지파도, 레위인도 다 이를 무시합니다. 자기 집에 신전을 두고, 무자격자를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이라 임명하고, 번쩍이는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합니까?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 나에게 편하고 나의 취향과 잘 맞아 떨어지고 내가 주도권을 쥐고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와 뜻을 따르는 예배가 아니라 나의 생각과 기호를 따르는 예배입니다. 그 바탕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되 그분을 나에게 편한 형상으로 개조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 나를 맞추어야 하는데, 반대로 내가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늘 편안한 하나님, 나에게 익숙한 하나님, 나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 어떻습니까? 좋은 하나님, 최고의 하나님일까요? 성경은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 네 자신이 만든 신 곧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를 가리켜 우상숭배자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만이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내 입맛에 맞게 개조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도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자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내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죽은 하나님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은 때로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때로 무척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때로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부담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내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남이 곧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오게 됩니다. 말씀 속에서 자신을 친히 계시하신 참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내 머리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예배가 진짜 예배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상 숭배자 입니까? 아니면 예배자입니까?” “내가 편하고 익숙한 방식으로만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둘째로 그들이 예배하는 목적은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은으로 신상을 만드는 목적이 내 아들을 위해서 라고 분명하게 말을 합니다. 미가는 레위인을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고용한 후에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단 지파 정찰대는 레위인에게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묻습니다. 레위인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예배의 중보자인 제사장 직무를 수행합니다. 다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지만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있습니다. 다 내가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반대급부로 무조건 합격하고 성공하고 부를 얻게 해 주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 공부를 한다면 기말 고사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요?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한다면 더 빨리 승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차라리 그냥 예배 대신 낮잠이라도 잔다면 몸도 개운해 지고 기분도 좋아지지 않을까요?

마르바 던이라는 여성 신학자가 쓴 “고귀한 시간 낭비”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귀한 시간 낭비란 바로 예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약 예배를 내가 원하는 복을 얻는 수단 정도로 인식한다면 예배는 얼마든지 시간 낭비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정말 예배에 참석해서 얻을 현실적 유익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왜 시간 낭비라는 말 앞에 ‘고귀한’ 이라는 말을 덧붙였을까요? 그 이유를 마르바 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를 그 가운데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광휘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릴 기회, 우리의 시간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목적에 들어가게 하는 기회이다. 그 결과 우리는 변화된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집중하고 복종하는 대상인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말 속에 예배의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접근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시도록 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게 해 드려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도록 나를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의 목적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나의 유익과 복을 얻기 위해 예배합니까? 아니면 오롯이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예배합니까?” “당신은 예배 후 현실이 바뀌기를 기대합니까? 아니면 예배를 드린 나 자신이 바뀌기를 기대합니까?”

셋째로 그들의 예배는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처럼 공허합니다.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 예배의 알맹이가 무엇일까요? 아무 자격 없는 나를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크고도 놀라우신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함께 기뻐하며 경축하는 것, 하나의 예배 공동체 안에서 속한 지체들로서 서로를 통해 얻는 위로와 격려, 말씀 앞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했을 때 누리는 사죄의 은혜 등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타난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이런 요소들이 보이시나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신전도 있고, 신상도 있고, 제사장도 있고 있는 것은 다 있고 없어야 하는 것까지 있고 껍데기는 화려하고 그럴 듯 한데 예배의 알맹이가 다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미가는 단 지파를 향해 이렇게 호소합니다.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18:24) 미가는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 뿐이었는데 껍데기마저 잃었으니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절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단 지파 역시 자신만의 성소와 제사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허한 예배라는 점에서는 미가의 예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세번 째 모습은 첫번 째, 두번 째 모습으로부터 나오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살아계신 참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존재를 향한 예배가 어떻게 공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배를 통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을 거부하는데 어떻게 예배를 통해서 내 삶의 영적인 열매가 맺힐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예배는 알맹이는 없고 빈 껍데기 뿐인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충만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공허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까지 오지 않도록 미가와 단 지파가 했어야 할 올바른 행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31)

당시 하나님이 백성 중에 임재하시는 장소인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었습니다. 그곳이 미가와 단 지파의 삶의 구심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집도 영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후에 예루살렘으로 옮겨 갔다가 A.D. 70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장차 올 영원하고 완전한 성전되신 분의 모형일 뿐이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전되신 예수님은 이전의 성전과 달리 결코 무너지거나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예배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사사 시대처럼 곳곳에서 내가 만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가짜 예배, 예배의 본질을 상실한 껍데기 뿐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까지 이런 흐름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성전되신 예수님께 우리 삶의 중심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참된 예배, 삶을 변화시키는 충만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우리가 사사기를 반면교사로 삼아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암 1부의 예배가 주님의 임재 안에 떨며 주님의 은혜 안에서 즐거워 하는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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