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내 이름은 기묘자라

이창무 2023. 5. 29.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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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11 강 / 이창무

내 이름은 기묘자라

말씀 / 사사기 13:1-25
요절 / 사사기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사사기에 등장하는 열 두 명의 사사 중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사가 누구일까요? 두 말 할 것 없이 삼손입니다. 이번 주부터 앞으로 삼 주에 걸쳐 사사 삼손을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이 과정이 다 끝나고 나면 아마 오늘 말씀의 제목이 다시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삼손의 하나님은 정말 기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경험과 생각의 틀을 아득히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부터 그 하나님을 만나러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1)

이제는 익숙함을 넘어 지긋지긋해지는 사시기의 패턴이 또 다시 반복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려 사십 년 동안 강력한 철기로 무장한 블레셋 사람의 지배 아래 두십니다. 그 다음 세번째 단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나올 차례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부르짖지 않습니다.

입다의 시대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평소에는 기도를 전혀 안 하다가 힘들 때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런 기회주의적인 모습조차 없습니다. 백성들은 평소에도 기도하지 않았고 힘들 때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잊은 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사사기 패턴의 세번째 연결 고리가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네번째 단계인 하나님의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진실한 회개는 커녕 부르짖지도 않는 완악한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십니까?

먼저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에 속한 마노아라는 사람의 아내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혹시 마노아의 아내를 사사로 삼으실까?’라고 추측한다면 너무 섣부른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임신하지 못해 자녀가 없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5)

하나님의 사자는 장차 마노아의 가정에서 태어날 아들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사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사사를 삼으신 사례는 없었습니다. 왼손잡이 에훗, 꿀벌 아줌마 드보라, 겁쟁이 기드온, 마피아 두목 입다 등 별별 다양한 사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성인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을 사사로 지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실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인들 중에서 사사가 될 만한 사람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나 입다는 비록 허물과 약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어른들 중에는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면 자라나는 아이들 중에서 찾으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어른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함께 타락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이들의 장래 희망 1순위는 ‘블레셋 사람처럼 되기’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사람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조기에 준비시키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하나님 없는 세상으로부터 나쁜 영향으로부터 지켜 줄 보호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이 바로 나실인 규례입니다.

나실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실인은 본래 일정 기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기로 자발적으로 서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실인으로 서약한 기간 동안 해서는 안 되는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어떤 술도 마시면 안됩니다. 이것은 쾌락을 최대한 절제하겠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부정한 것을 멀리하여 거룩함을 지키겠다는 의미입니다. 셋째로 머리를 깎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살겠다는 결심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말하고 있는 나실인은 일반적인 나실인과 두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첫째로 일정 기간이 아니라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나실인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둘째로 자발적으로 서원한 나실인이 아니라 비자발적 나실인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이제까지 유례가 없는 새로운 모델입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자녀가 없는 문제로 큰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한 가정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뜻이고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가정에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겠다고 하시니 이제 미래와 희망이 생겼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너무나 감격스럽고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이 아이를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시겠다고 하시니 부모로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나실인으로 잘 키워서 어떻게 하든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반면 태어날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일정 기간 동안만이라도 나실인으로 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유롭게 하는 일을 스스로 절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생 나실인이라니! 아이 입장에서는 이것이 너무 힘들고 고달픈 일로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또 그 길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가도록 정해진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왜 나만 다르게 살아야 해요?” “왜 내가 택하지도 않은 길을 나에게 강요하세요?” 라고 반발하며 막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입장의 차이에서 생기는 팽팽한 긴장이 삼손의 이야기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다음 장부터 나실인 규례를 하나씩 다 깨트려 버리는 삼손과 결국 그런 삼손을 말리지 못하고 애타하는 삼손의 부모 사이에 실랑이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긴장은 지금 우리 가운데도 있습니다.

부모는 세상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해 있는 지 압니다. 이미 충분히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이런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나실인 규례와 비슷한 규례를 만듭니다. 이 안에는 절대 하면 안 되는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 규례는 죄가 만연한 세상에서 자녀를 지켜줄 꼭 필요한 방패막이입니다. 또한 자녀 역시 목자요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기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의 입장은 다릅니다. 왜 다른 집에서는 아무 문제가 안 되는데 우리 집에서는 하면 안 되는 일들이 이렇게 많은 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안에 자신을 죄로 이끌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새롭고 재미있는 것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설령 그런 위험성이 있다고 해도 내가 알아서 잘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아무리 목자요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영광이요 축복이라 할지라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매력이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다투거나 분위기가 험악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가정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긴장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나님의 사람을 낳고 키울 수 있을까요?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가장 중점에 두어야 할 점이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자와 마노아 부부와 만남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계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마노아의 아내와 남편인 마노아를 비교하며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마노아의 아내는 믿음이 있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여호와의 사자가 전한 말씀에 대해 일체의 의문을 표시하거나 반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왜 하필 우리 집이죠?” 이렇게 따지지 않습니다. 사자의 말을 다 믿고 받아들입니다.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한 믿음을 가진 여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여인이 1,200년 후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 것과 똑같습니다.

마노아도 기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나 하나님의 사자에게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노아는 아내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노아는 의심이 많고 확인을 거치고 난 후에야 받아들이는 스타일입니다. 자기가 직접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봐야 아내의 말을 믿을 수 있겠다 한다던 지,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자 ‘당신이 그 사람이 정말 맞냐’고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음으로 마노아의 아내는 영적인 감수성이 발달한 사람입니다. 어느 장면에서 알 수 있나요?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일을 보고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6)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자가 엄연히 다른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자란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 존재인 천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처음에는 자기가 만난 사람이 선지자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천사인 것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분석해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 그냥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아챈 것입니다.

반면에 마노아는 영적인 감수성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사람입니다. 어디서 알 수 있나요? 염소 새끼로 잔치를 벌이겠다가는 마노아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16)

천사가 자신은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는 영적인 존재라는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도 마노아가 자신 앞에 천사가 나타난 것인 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자마자 알아차린 아내와 힌트를 줘도 못 깨닫는 마노아가 대비가 됩니다.

그리고 마노아의 아내는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마노아가 자기가 만난 분이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벌벌 떨며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22) 이런 마노아를 누가 진정시켜 줍니까? 바로 마노아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실 작정이셨다면 우리가 바친 번제물을 굳이 받으셨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면 우리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남편이 듣고 보니 아내이 말이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남편의 두려움이 진정될 수 있었습니다. 마노아는 하나만 알고 둘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의 아내는 전후 관계와 앞뒤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했습니다. 평소 마노아가 이것 저것 아는 지식은 많이 있을 지 몰라도, 삶과 직결된 지혜에 있어서는 마노아의 아내가 더 뛰어납니다.

어떻습니까? 영성에 있어서 마노아와 그의 아내 둘 중 누가 더 훌륭합니까? 고민할 필요 없이 마노아의 아내가 더 훌륭합니다. 더 믿음이 있고 더 영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더 분별력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괜히 두 번이나 거듭해서 마노아의 아내에게 먼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녀와 영적으로 더 잘 소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우리 교회의 많은 가정들을 관찰해 온 바로는 마노아 가정의 모습과 흡사한 가정들이 대다수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저의 가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매 목자님 대부분이 단순한 믿음과 풍부한 영적 감수성과 지혜를 갖추신 분들입니다. 너무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에 비해 형제 목자님이 여러모로 영적으로 부족할 경우가 많습니다. 나름 상황 판단을 내가 더 잘 한다고 자부하지만 형제들은 마노아처럼 한 면만 보고 큰 그림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 목자님들은 일단 아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못하겠으면 적어도 아내가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내를 무시하거나 아내에게 면박을 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너무 현실을 몰라. 그러니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자꾸 옆에서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마”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마노아는 아내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엿보여 살짝 불안합니다. 내가 직접 여호와의 사자를 반드시 만나 보겠다 말하는 이유에는 아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가 천사의 만남에 집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마노아에게는 천사에게 꼭 듣고 싶은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노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b)

마치 오은영 박사의 상담소에 찾아온 부모 같습니다. 마노아는 기적적으로 얻은 이 귀한 아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마노아가 생각하는 훌륭한 자녀 교육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잘 짜여진 커리큘럼에 따라 자녀가 지키야 할 규칙들과 성취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마노아는 아이가 이대로 살기만 하면 이스라엘 역대 최고의 사사가 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방법론을 알려 주시만 하면 그는 이에 따른 일간 계획표, 주간 계획표, 월간 계획표를 짜고 24시간 365일 아들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노아의 질문에 대해 여호와의 사자는 어떤 답을 줍니까? 여호와의 사자는 이미 마노아의 아내에게 말한 나실인 규례 외에 더 이상의 규칙을 주지 않습니다. 이에 마노아는 포기하지 않고 우리 밥 먹으면서 찬찬히 더 대화해 보자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 식사 자리 또한 거절합니다. 그러자 마노아는 이름 만이라도 알려 주시면 다음에 아들 태어나면 꼭 찾아 뵙겠다며 매달립니다. 이에 대해 여호와의 사자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18)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가 “내 이름은 기묘자다. 앞으로 날 그렇게 불러다오.”라고 말했다고 이해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기묘자란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 특정한 이름을 설명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사자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노아야.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들어도 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름이다. 너는 지금까지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면 살아 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너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이다. 이제부터는 나를 이해하려 들지만 말고 나를 만나러 오면 어떨까? 앎보다 중요한 것은 만남이란다.”

얼핏 보면 하나님은 마노아의 질문에 답을 주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으로써 진짜 답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 마노아가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수준 높은 지식과 정보, 체계화된 교육 시스템이 아닙니다. 마노아에게 필요한 것은 마노아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아들에게 따뜻하고 인격적으로 들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노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들의 자녀가 어릴 때는 규칙과 그에 따른 상벌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다 먹으면 용돈을 두 배 주고 못 먹으면 날짜대로 깎으면 어떨까요? 예배 갈 때마다 달란트 한 장 씩 모아서 열 장 모으면 치킨 한 마리 어떻습니까? 조금 더 크면 성경 퀴즈를 보고 점수에 따라 게임할 수 있는 시간을 지정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훈련과 규칙과 당근과 채찍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녀가 성장할수록 많은 외부의 규칙들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내면에 올바른 동기와 지혜의 원리들을 심어 주는 것으로 점점 옮겨 가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단계(Knowing about God)를 지나 하나님을 아는 단계(Knowing God)로 넘어가야 합니다. 나의 이해와 경험을 뛰어 넘어 존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더 정교한 규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의 모든 굴곡과 반전, 모든 의심과 결정에 대한 가이드북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24,25)

마침내 마노아의 아내가 아들을 낳습니다. 이름을 삼손이라고 짓습니다. 삼손이란 ‘작은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오랜 블레셋의 압제 아래 암울한 나날을 보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와 구원이라는 새로운 여명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라는 소망 가운데 이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축복하시고 성령이 그를 감동시켜 움직이게 하십니다.

이제까지 이런 사사는 없었습니다. 한껏 기대를 가지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후 삼손의 삶은 우리를 크게 실망시킵니다. 이것은 또한 삼손의 부모가 하나님을 아들에게 보여주는 일에 실패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모든 실패를 만회하러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완전한 사사이자 영원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가랴는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게 된 사건으로 노래했습니다(눅1:78,79). 예수님은 모든 어둠을 몰아내시는 큰 태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 받는 분이 되셨습니다(눅2:52).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에 이끌리신 분이 되셨습니다(눅4:1). 그리고 일생을 나실인으로 사시고 죽음으로 구원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로써 삼손의 실패를 만회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보여주심으로 삼손의 부모의 실패까지 다 만회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좋은 아들딸이 되는 일에도, 좋은 아빠가 되는 일에도 실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이 일을 이루시는 주님은 기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먼저 깊이 만나고 또한 그분을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나타내는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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