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악행을 갚으시는 하나님

이창무 2023. 5. 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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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9 강 / 이창무

악행을 갚으시는 하나님

말씀 / 사사기 9:1-10:5(9:41-10:2)
요절 / 사사기 9:56,57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우리는 때로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왜 악인들을 가만 내버려 두실까? 왜 당장 저들을 심판하지 않으실까? 혹시 악을 그냥 눈감아 주시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머릿속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악을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잘 체감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부재하시거나 무관심하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께 이런 의문을 가질 법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입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칠십 명의 형제를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이런 끔찍한 일을 겪은 요담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답을 주셨는지 본문 속에서 살펴보고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9:1)

오늘의 중심 인물인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등장합니다. 아비멜렉은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가 못 다 이룬 꿈을 자신이 이루라고 내게 이런 이름을 주었다 믿었는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야심만으로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을 지지할 추종 세력과 거사를 일으킬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아비멜렉은 먼저 외갓집이 있는 세겜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세겜의 아들 이 아비멜렉을 한 번만 화끈하게 밀어주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에게 확실하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함께 외쳐 봅시다.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남이가!” 세겜 사람들은 이 말에 홀딱 넘어가 뜨거운 지지를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에게 정치자금으로 은 칠십 개를 건네주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이 돈으로 뒷골목 깡패와 조폭을 사병으로 고용했습니다.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 만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누구를 잠재적 경쟁자로 여겼을까요? 바로 자신의 이복형제 칠십 명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병들을 시켜 이들을 모두 한 바위에서 죽이는 끔찍한 학살극이 벌였습니다.

아비멜렉은 더러운 돈으로 더러운 사람을 사서 더러운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 모습만으로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은 커녕 당장 감옥에 보내야 할 범죄자입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은 이런 아비멜렉을 버젓이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황당하고 끔찍한 일인지는 학살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 요담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을 나무에 빗대어 한 우화를 들려 줍니다. 우화의 내용은 나무들이 자신의 왕을 세우려고 왕이 될 만한 나무들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세 종류의 나무가 나옵니다. 이 세 나무는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이 있기에 그것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우쭐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가시나무는 앞의 세 나무와 달리 하나님과 사람에게 기쁨과 유익이 되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잎이 가늘어서 기본적인 그늘조차 제공할 수 없는 무익한 나무입니다. 게다가 불에도 잘 붙어서 다른 나무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한 나무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넙죽 제안을 받아 왕이 됩니다.

이 우화 속에서 가시나무는 바로 거만하고 허세만 가득한 위험 인물 아비멜렉을 가리킵니다. 요담은 이런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한 세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우화로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이 잘한 일이라면 너희가 아비멜렉의 통치로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잘한 일이 아니라면 너희와 아비멜렉은 보응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그에 의해 불탈 것이요 그는 너희에 의해 불탈 것이다”

요담은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믿음에 근거해서 한 말입니다. 요담은 선한 일을 행한 자에게는 복을 주시지만 악한 일을 행한 자에게 심판을 내리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정의가 실현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럼 이제 요담의 말대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 찾아왔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비멜렉의 권력은 더욱 강해지고 세겜 사람들은 별 탈 없이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이때 요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지, 왜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계속 그냥 내버려 두시는 지 요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묻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아비멜렉이 아무 죄도 없는 내 형제 칠십 명을 학살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나요? 설마 저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된 것을 그냥 내버려 두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지납니다. 그때서야 인간사의 커튼이 걷히고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악한 영을 보내어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 사이를 갈라 놓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24)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고 가알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따릅니다. 가알은 아비멜렉은 외가이만 나는 친가라면서 더 진한 혈연에 호소합니다. 아비멜렉 따위는 한 방에 보낼 수 있다고 큰 소리도 칩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입니다. 아비멜렉과 똑같은 사람이 반 아비멜렉 파의 중심인물이 된 셈입니다.

결국 아비멜렉과 짝퉁 아비멜렉 이 두 사람이 무력으로 충돌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원조 아비멜렉이 대승을 거둡니다. 세겜의 배신에 분노한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그 성을 허물어 버립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피신한 사람들이 신전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불을 질러 버립니다. 천 명이 불이 타 죽고 맙니다. 아비멜렉은 정말 잔인한 인간입니다.

그 후 아비멜렉은 세겜 가까이 있는 데베스로 갑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려 합니다. 그때 망대 위에 있던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래로 던집니다. 아비멜렉은 그만 그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는 치명상을 입습니다. 그는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수치를 면하기 위해 결국 자결을 택하고 맙니다. 요담의 말대로 정말 아비멜렉에게서 나온 불이 세겜을 태웠고, 세겜에서 나온 불이 아비멜렉을 태워버렸습니다.

이 모든 일의 결론입니다.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56,57)

마침내 하나님이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심판하셨습니다. 또한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심판하셨습니다. 요담의 저주가 실현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이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악인들이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고 반복해서 악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 악에 대해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을 심판하시고 응징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겁날 것이 없으니 막 나가게 됩니다. 악을 행해도 당장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더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으니 점점 더 대담하게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눈에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악을 행하고도 왕이 되어 잘 되는 것처럼 보였고, 세겜 사람들도 아비멜렉을 도와 악을 행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해서 온전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어떤 악도 그분 앞에서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고 모든 악은 그분 앞에 굴복하며 떨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유보된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현재적인 심판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현재적인 심판은 은밀히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악한 영을 보내셔서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그 시대 사람들 중에 누가 알아챌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심판 계획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져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이처럼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심판의 일을 행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확 띄는 사건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지레짐작해서는 곤란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현재적인 심판은 기다림 후에 임합니다. 요담이 심판에 대해서 경고한 후 3년이 지나서야 아비멜렉이 죗값을 치렀습니다.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요담에게는 매우 긴 시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요담은 인내를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해서 당장 심판이 임하고 당장 선이 이기는 결과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우직하게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현재적인 심판은 인간의 죄의 결과를 통해서 실현됩니다. 세겜은 왜 파괴되었습니까? 아비멜렉과 맺은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겜 자신들의 죄가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어떻습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조건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고 욕망 때문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비멜렉 역시 자신의 죄가 몰락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실 때 다른 악인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악인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워서 함께 몰락의 구덩이에 빠지도록 하십니다.

되짚어 보니 하나님은 침묵하셨을 지는 몰라도 결코 부재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조용하게 심판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오늘 이야기를 보면 어떨까요? 겉으로 보면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고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죽인 것은 자연스러운 사건의 진행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하고서도 얼마든지 이 일들을 인간의 선택과 우연의 산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그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벼락을 아비멜렉의 머리에 내리치시는 않으셨지만 한 여인이 던진 맷돌이 하필이면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국에는 정의가 실현되었습니다.

역대 고려대학교 총장 중에 가장 존경받는 김준엽 총장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퇴임했을 학생들이 다 들고일어나 총장 퇴임 반대 시위를 했던 것이 유명합니다. 이분은 젊은 시절 징용되어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갖은 고생 끝에 광복군에 합류해 항일 투쟁을 했던 전력이 있는 분입니다. 이후 일생 역사연구에 전념하며 후학을 길러내는 학자로 살았습니다. 이분이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역사의 신을 믿는다” 이분이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연구해 보니 언젠가는 인간의 악행을 심판하시는 신적 존재가 계시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역사의 신을 믿고 지금 악의 편에 서지 않고 악과 투쟁하는 편에 서도록 끊임없이 권면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2:6-8)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모양이든지 악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내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복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수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기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으로 상징하는 비극적 시대가 갑작스럽게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백성들가운데 아비멜렉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전의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 일어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10:1)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났습니다. '돌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아마 모르셨던 분도 많을 것입니다. 돌라는 그리 유명한 사사가 아닙니다. 사사기에서 소사사라고 불리는 여섯 명의 사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겨우 두 절로만 언급된 이 사사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돌라'라는 이름의 뜻은 벌레라는 뜻입니다. 사사 돌라는 이름까지도 별 볼 일이 없습니다.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아비멜렉과 참 대조가 됩니다.

그러면 사사 돌라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사기에서 구원은 전쟁의 승리를 통해 대적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을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어떠한 대적의 이름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도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말에서 구원은 도대체 어떤 구원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돌라가 아비멜렉이 남긴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이 할퀴고 간 자리에 약을 바르고 무너진 공의와 법도를 다시 세울 사람이 필요했고 그 일에 응답한 사람이 바로 돌라입니다. 본문은 돌라가 사사로서 이렇게 이십삼 년을 섬기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십삼 년이라면 적지 않은 기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혼란과 무질서의 아비멜렉 시대에서 이후 돌라의 시대 23년을 이어지게 하심으로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돌라는 막장으로 치닫던 시대에 잠시 숨 돌릴 틈을 열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긍휼의 목자였습니다.

돌라의 사역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외적을 물리치는 구원은 표시가 잘 나고 주목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고 해결하는 사람은 열심히 해도 주목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노라"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등 앞선 사사들에 못지않게 구원 역사를 이룬 사사로 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아비멜렉이 곳곳에 득시글 득시글하는 세상입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딱 하는 짓이 아비멜렉과 똑같습니다. 학교에도 아비멜렉이 있습니다. 직장에도 아비멜렉이 있고 군대에 가면 아주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아비멜렉들 아래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설령 아비멜렉의 손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상처를 부여잡고 고통합니다.

누구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 인생들의 돌라가 될 수 있을까요? 앞에서 돌라는 벌레라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돌라는 모든 벌레를 통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주 빛깔 염료를 얻기 위해 이용되던 벌레를 가리킵니다. 돌라라는 벌레를 짓이겨서 거기서 나오는 즙을 채취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벌레처럼 십자가에서 못 박혀 자기의 몸이 짓이겨지는 고난을 당하신 구원자가 계십니다. 즙을 짜내듯 그분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위해 흘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아비멜렉에게서 받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본래 영광과 존귀로 옷 입으셨으나 스스로를 벌레와 같은 자리로 낮추신 우리 주님만이 망가진 우리를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아이작 와츠가 지은 찬송가 143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우리도 다 돌라처럼 별 볼 일 없는 벌레 같은 존재들 아닙니까?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한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벌레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또 주님은 이 벌레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이 고통받는 시대를 구원할 목자로 삼으셨습니다. 찬송가 143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나님은 벌레라도 들어 쓰셨습니다. 아니 스스로 벌레라고 여기며 몸 밖에 드릴 것이 없는 작은 자를 들어 쓰십니다. 우리 안암 1부가 세상의 아비멜렉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와서 치유함을 받는 교회, 망가진 영혼이 회복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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