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문제의 사사 입다

이창무 2023. 5. 2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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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10 강 / 이창무

문제의 사사 입다

말씀 / 사사기 10:6-12:7(11:29-12:7)
요절 / 사사기 12: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문제의 사사 입다’ 입니다.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는 입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몇 가지 시험 문제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네 문항 중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사지선다형 시험 문제에 익숙합니다. 이런 문제는 정답이 명확하고 또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는 정반대의 주장이 다 맞는 것 같아서 선뜻 정답을 택하기 어렵습니다. 입다가 낸 시험 문제가 딱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크게 네 가지 질문으로 본문에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것은 정당한가?’ 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11:6)

우리에게 이제 익숙한 사사기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상의 숫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무려 일곱 신이나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암몬과 블레셋의 손에 넘겨주십니다. 18년 동안이나 압제를 받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절히 매달립니다. 사사기의 패턴에 따르면 다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를 보내실 차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십니다. 그들의 요청을 냉정하게 딱 잘라 거절해 버리십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요청이 부당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그 동안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받고 살만해지면 하나님을 버리고 또 다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더 이상 이용만 당하고 버림 받는 일을 반복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은 충격에 빠집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립니다.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되 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이방 신상들을 제거함으로 회개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음에 근심하기 시작하십니다. 왜 근심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계속 외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를 깊이 고민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회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막상 구원을 받게 나면 또 변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또 배신을 당할지 언정 내 백성을 구원해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힘드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고뇌와 번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 것이 깔끔하고 정당하지만 하나님께는 정당한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아무 조건 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함께 하기에 하나님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것은 정당한가?’ 하는 이 질문은 하나님도 쉽게 결론을 내리실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두번째 질문은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는 것은 정당한가?’ 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암몬 자손이 쳐들어 오자 이스라엘은 우왕좌왕합니다. 일단 미스바에 진을 치고 모이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전쟁을 이끌 지휘관이 없습니다. 서로 미루기만 하고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나서기만 하면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워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때 주목을 받게 된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인 입다입니다. 입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1)

먼저 그는 큰 용사입니다. 이 말은 싸움을 엄청 잘 했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에 출세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많은 인재입니다. 그러나 출신이 너무 비천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입다의 어머니가 기생(창녀) 출신입니다. 입다가 성장하자 이복 형제들이 너 같은 놈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 받을 자격이 없다며 그를 쫓아내 버립니다. 이에 입다는 형제들을 피해 변방 지역인 돕 땅에서 유랑 생활을 합니다. 이런 그에게 사회의 아웃사이더, 비주류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합니다. 입다는 어느새 많은 부하들을 거느린 마피아 두목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암몬 자손이 쳐들어 온 것이 입다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됩니다. 다급해진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군대 사령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때 입다는 덥썩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하는 척 합니다. 당황한 장로들은 장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최고 지도자로 받들겠다는 서약을 합니다. 그제서야 입다는 제안을 수락합니다. 알고 보니 입다는 밀당의 고수, 협상의 대가였습니다.

입다의 이런 협상가로서의 면모가 암몬과의 외교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입다는 전쟁을 벌이기 앞서 왜 길르앗 땅을 침범했냐며 암몬 왕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러자 암몬 왕은 원래 우리 땅이었던 것을 되찾으려 왔을 뿐이라고 회신합니다. 이 말에 대해 입다는 다음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조목조목 반박하는 서신을 보냅니다. 첫째로 길르앗 땅은 원래 아모리 왕 시혼의 땅이었지 암몬의 땅이 아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 둘째로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에 차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신학적인 근거, 셋째로 암몬 왕이 이제까지 땅의 반환을 요구한 적이 없으며 이스라엘이 삼백 년 동안 실효적으로 지배해 왔다는 법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입다가 싸움 잘하고 협상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역사와 신학과 법학에 전부 다 해박합니다.

이런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요? 실력 면에서 보면 하자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싸움도 잘 하고 리더십도 있고 협상력은 탁월하고 머리도 스마트합니다. 입다는 불우한 환경에 성장한 사람입니다. 창녀의 아들이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이복 형들에게 갖은 차별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실력을 키워 마침내 톱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의지의 한국인에 비견할 만한 의지의 이스라엘인입니다. 이 정도면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는 것은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정당합니다’라고 답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드는 면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지명하시고 부르셔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다릅니다. 전적으로 길르앗 장로들에 의해서 옹립된 사사입니다. 사람 사이에 밀당과 합의의 결과로 세워진 사사입니다. 장로들도 입다 본인도 입다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지 묻지도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웬지 불길합니다. 그렇다면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는 것은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부당합니다’라고 답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세번째 질문은 ‘입다가 서원을 갚기 위해 딸을 번제로 바친 것은 정당한가?’ 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29)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합니다. 이것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입다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인정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암몬과 전쟁의 승패는 이미 다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장 서 싸우실 텐데 누가 감히 막아 설 수 있겠습니까? 입다는 이 하나님을 믿고 나가서 싸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때 입다가 서원 기도를 합니다. 주님께서 전쟁에 이기게 하시면 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약합니다. 사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서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로 한 이상 승리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서원의 내용도 영 이상합니다. 율법에서는 인신 제사를 강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간절했다’ 라고 봐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주변 이방 나라들의 풍습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합니다. 게다가 입다가 뭐라고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약속을 합니까?

입다가 왜 이런 서원을 할까요? 이는 입다가 너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승패에 입다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이기면 입다는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지게 되면 무시 받고 천대 받던 과거로 돌아갈 것이 뻔합니다. 입다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실히 받을 수 있다고 믿은 것 같습니다. 입다는 하나님과도 협상과 밀당을 통해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암몬과의 전쟁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예상했던 대로 여호와께서 암몬을 입다의 손에 넘겨 주셨기 때문에 입다는 손쉽게 항복을 받아냅니다. 승리 후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온 입다를 처음 맞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입다의 딸입니다. 그것도 무남독녀 외동딸입니다. 입다는 이 모습을 보고 자기 옷을 찢습니다. 괴로워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이후 너무나 가슴 아픈 일들이 벌어집니다. 또 한편으로는 기괴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왜 하필 네가 나오는 바람에 내 마음을 이처럼 아프게 하느냐고 질책합니다. 오죽 힘들면 이런 말을 했을까 싶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딸의 반응도 놀랍습니다. 전혀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겠다고 합니다. 다만 두 달 정도 슬퍼할 기간을 달라고만 합니다. 세상에 이런 딸이 있을까 싶습니다. 결국 두 달 후 입다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고 맙니다.

입다가 서원을 갚기 위해 딸을 번제로 바친 것은 정당한 일일까요? 입다는 협상가입니다. 협상가로서 한 번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것을 철칙으로 살아왔습니다. 서원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처절한 아픔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서원을 지킨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신앙의 귀감으로 삼아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꼭 그렇게만 볼 일일까요? 서원의 내용 자체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서원이기 때문에 원천 무효 아닐까요? 차라리 서원을 철회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 아닐까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서원을 철회하는 것보다 더 큰 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입다가 이런 저런 고민을 해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무조건 서원을 이행하는 것 외에는 일체의 다른 가능성을 아예 배제한 것처럼 보이는 입다의 모습이 참 답답해 보입니다.

더 답답한 것은 하나님이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처럼 천사를 보내 입다를 막으시지 않으셨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입다가 옳다. 입다가 잘 했다’라고 명확하게 코멘트라고 해 주시지 왜 아무 언급을 하지 않으실까요? 혹시 하나님도 이 질문에 답을 쉽게 내릴 수 없어 침묵하고 계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네번째 질문은 ‘입다가 에브라임을 친 것은 정당한가?’ 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12:1)

또 에브라임이 사고를 칩니다. 오라고 할 때는 안 오고 마지막에 합류해 놓고는 뒤에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기드온 때도 이랬는데 그는 좋은 말로 에브라임을 달래 주었습니다. 입다는 어떻게 합니까? 입다는 기드온이 아닙니다. 입다는 그들을 철저하게 응징합니다. 이때 에브라임 사람을 식별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 사투리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쉽볼렛’을 발음하지 못하고 대신 ‘십볼렛’이라고 발음했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쌀을 살이라고 발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기발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입다는 무려 에브라임 사람 사만 이천명을 죽입니다. 이것으로 부당한 요구와 불평을 하는 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알려주는 본보기로 삼고자 합니다.

이렇게 입다가 에브라임을 친 것은 정당한 일입니까? 언제나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에브라임의 왕자병은 고질병입니다. 좋은 말로 해서는 치유가 안 됩니다. 입다처럼 한 번 제대로 본 때를 보여주어야 다음에 똑같은 짓을 하지 않게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에브라임의 진상 짓을 참아 주어야 합니까? 그런 점에서 입다가 에브라임을 응징한 것은 참 잘 한 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만 이천 명이라니요? 이건 너무 많습니다. 같은 동족인데 굳이 도망가는 사람까지 잡아서 사투리 테스트까지 해 가면서 죽어야 했을까요? 혹시 정의감의 발로가 아니라 ‘나는 외동딸까지 바쳤는데 너희가 감히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면서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은 아닐까요? 이유야 어찌되었든 동족상잔의 비극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입다 역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것은 정당한가?’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는 것은 정당한가?’ ‘입다가 서원을 갚기 위해 딸을 번제로 바친 것은 정당한가?’ ‘입다가 에브라임을 친 것은 정당한가?’ 이렇게 네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본문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당하다는 것입니까? 부당하다는 것입니까? 메시지가 명확해야지 왜 이렇게 애매모호합니까? ‘잘 했으면 잘 했다 못 했으면 못 했다’ 답을 줘야지 문제만 계속 내면 어떻게 합니까?”

저도 명확한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입다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입다에 대한 성경의 평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7)

먼저 입다를 이스라엘의 사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입다가 사사가 되는 과정이 어물쩍 된 것 같지만 엄연히 사사는 사사입니다. 그 이후 행적도 미심쩍은 구석이 많지만 그래도 입다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사사입니다. 실제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암몬의 손에서 구원하는 일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기드온, 삼손과 함께 입다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 명의 사사 모두 결함이 있는 사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쓰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입다를 묵상하면서 성 이그나티우스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구부러진 막대기를 가지고 똑바른 선을 그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전부 다 구부러진 막대기입니다. 우리가 목자가 된 것도 어물쩍 된 것이지 FM으로 된 것 아닙니다.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실수도 많고 허물도 많고 잘못한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사용하셔서 똑바른 선을 그리실 수 있고 또 그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는 것은, 계속 주님의 영광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7절은 입다가 사사로 재직한 기간을 6년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6년은 다른 사사들에 비해 매우 짧은 기간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사들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사사들은 그가 사사로 재직하는 동안에 이스라엘에 몇 년 동안 평안이 있었다고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입다의 경우는 평안이 있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암시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사 입다가 개인적으로 비극적인 일들을 많이 겪었으며 이스라엘 공동체 역시 그가 사사로 있는 동안 비극적인 일들을 많이 겪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입다가 외동딸을 번제로 바친 것과 에브라임 지파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사건일 것입니다.

입다는 왜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그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입다가 하나님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입다는 하나님을 압니다. 어떤 하나님을 압니까? 입다는 사회의 부당한 차별 때문에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밑바닥을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자신이 마침내 길르앗의 머리가 된 것은 하나님이 부당함을 바로 잡으시고 정당한 자를 세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다가 하나님을 오직 그런 하나님으로만 알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입다는 은혜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내가 딜을 잘 해서 그분께 드릴 것은 드리고 받을 것은 받아내야 할 분으로 여겼습니다. 입다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다른 우상들처럼 거창한 희생 제물로 환심을 사야 하는 존재로 보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입다는 내가 만약 서원을 철회하면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셔서 딸도 죽고 나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의 부당함을 철저히 응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 속에서 입다는 고뇌하거나 번민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 늘 명확합니다. 너무 단호하기만 해서 겁이 날 정도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번민하시고 근심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자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당한 것을 심판하는 분이신 동시에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을 참고 기다리시며 용서하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둘 사이에 긴장 가운데 고뇌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팽팽한 긴장이 마침내 해소되는 유일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자비가 만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죄인이 구원 받는 것이 정당한 일이 되었고, 십자가 때문에 자격 없는 자가 은혜로 쓰임 받는 것이 정당한 일이 되었고, 십자가 때문에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은혜의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공과 성취에 앞서 그 은혜 안에서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이 주 은혜임을 믿으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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