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사자보다 강하나 꿀에 약한 삼손

이창무 2023. 6. 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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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12 강 / 이창무

사자보다 강하나 꿀에 약한 삼손

말씀 / 사사기 14:1-15:20
요절 / 사사기 14:9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혹시 SWOT 분석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경영학을 공부했거나 회사에서 전략 파트에서 일해 본 분들은 많이 익숙하실 것입니다. SWOT은 Strength(강점), Weakness(약점), Opportunity(기회), Threat(위기)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말로서 기업의 경영 전략을 세우기 위한 분석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사사 삼손에 대해 SWOT 분석을 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영적인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기 요인도 함께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사기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점점 악화됩니다. 이때야 말로 가장 위대한 리더가 등장해야 할 타이밍입니다. 13장의 수태고지와 더불어 우리는 역대급으로 훌륭한 사사의 출현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실제 삼손은 이런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인물일까요?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1,2)

삼손은 어느 날 딤나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 한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반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여자와 무조건 결혼시켜 달라고 들이댑니다. 삼손이 이 여자에게 푹 빠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그녀가 너무 예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삼손은 관능에 지배 받는 사람입니다. 심사숙고 없이 보고 느끼는 대로 반응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이끌려 행동합니다. 이러한 충동적인 면이 이야기 전개와 더불어 우리가 보게 될 구체적인 약점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3)

당연히 삼손의 부모는 이 결혼에 반대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과 결혼은 하나님의 금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삼손은 평생은 나실인이고 이스라엘의 사사이니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부모의 조언과 권위를 거부합니다. 우리 시대에는 아들이 부모에게 말대꾸하는 것이 더 일반적인지만 그 당시 문화 배경으로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삼손은 그 누구의 가르침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보다시피 삼손은 충동적이고 정서적으로 미성숙하고 고집이 셉니다. 첫 등장부터 무척 실망스럽습니다. 우리는 ‘싹수가 노랗구나.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삼손을 도무지 쓰실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사기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의외의 코멘트를 덧붙입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4)

성경은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선포를 합니다. 이 말씀이 삼손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하나님이 유도하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삼손이 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삼손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삼손의 허물과 약점을 사용하시기로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약속들을 자신의 뜻을 이루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의 죄를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고정 관념을 뛰어넘는 정말 기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런 삼손을 무엇을 위해 또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한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블레셋의 지배는 이전 이방 민족들의 지배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서로의 지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결혼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점령은 무척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지 않습니다. 뒤에 보면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나옵니다.

과거에 이방 민족의 지배는 군사적, 정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신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지배자에게 저항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의 가치, 풍습, 우상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순응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블레셋의 앞선 문화를 사모하고 동경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위험한 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두어 세대만 지나면 자칫 블레셋에 완전히 흡수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과 평화롭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약4:4). 왜 그렇습니까? 만약 우리가 세상과 같아지면 우상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야고보 선생의 말씀대로 영적인 간음을 하는 사람들로 전락하고 맙니다.

삼손의 시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다시 영적으로 구별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블레셋에 점점 동화되어 가는 것을 어떻게 하든 막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삼손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의 친분, 삼손의 독특한 취향, 복수심과 혈기를 사용하셔서 두 나라를 대립하게 하려 하십니다. 삼손때문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피를 부르는 반목이 초래될 것입니다. 이는 점점 더 큰 갈등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둘이 서로 분리될 것입니다. 이는 배드 엔딩 같지만, 사실은 해피 엔딩이 될 것입니다.

한자 친할 친(親) 자는 친구, 친척, 친밀감 등등 대체로 좋은 뜻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영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인 친일 또는 친북입니다. 우리 나라와 일본이나 북한과는 무조건 친해질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교회가 그러합니다. 교회는 ‘친세상’이 되면 안 됩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면 이미 세상이 교회를 정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사랑하는 일, 또는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오래 지속되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세상이 나를 괴롭게 하는 덕분에 내가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군대이든 직장이든 어디를 가든 원수 같은 인간을 만난 바람에 세상에 정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심 과장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가 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3:13)

도리어 우리와 세상이 아무런 갈등이 없이 너무 평화롭기만 하다면 이상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금에서 짠맛이 사라지고 등불이 빛을 잃어 가고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삼손이 원했던 대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장면이 14장과 15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에 여러 사건사고가 일어나는데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삼손은 결혼식을 하기 위해 딤나로 내려나던 길에 포도원 옆을 지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갑자기 사자를 만납니다. 그 순간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했고 삼손은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 버립니다. 삼손의 괴력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얼마 후 삼손은 자기가 죽인 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그 자리를 다시 찾습니다. 그때 사자의 죽은 몸 안에 벌 떼와 꿀이 있는 것을 봅니다. 벌 떼가 윙윙거리고 있으니 그 근처로 접근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게다가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동물의 시체를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삼손은 너무 꿀이 먹고 싶습니다. 나실인 규례에 아랑곳하지 않고 삼손은 사자의 시체를 뒤져 얻은 꿀을 길을 가면서 흡입합니다.

두번째는 결혼식 중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삼손은 딤나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일주일 동안 피로연을 엽니다. 이때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수수께끼로 내기를 합니다. 자기만 알 수 있는 문제를 냈기 때문에 승리를 자신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답을 알아내려 합니다. 눈물로 애원하며 답을 가르쳐 달라는 아내의 요구에 삼손은 버티지 못하고 답을 알려주고, 그녀는 즉시 이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전달합니다.

분노한 삼손은 혼자서 블레셋 사람 삼십 명을 때려죽입니다. 아직 화가 덜 풀린 삼손은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삼손의 장인은 딸이 이혼 당한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 버립니다. 이렇게 삼손의 국제 결혼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세번째는 결혼 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얼마 후 삼손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장인이 이미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분노한 삼손은 블레셋의 곡식 밭을 몽땅 불태워 버립니다. 삼손에 대한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태워 버립니다. 삼손은 다시 이에 대한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쳐서 죽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올바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삼손과 삼손의 장인과 블레셋 사람 모두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그 결과 사건이 점점 커져 갑니다. 마침내 블레셋이 유다 지파 앞에 진을 치고 삼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충격적인 것은 이때 유다 지파가 자신들의 사사인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이 또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자 삼손은 결박을 손쉽게 끊습니다. 삼손은 근처에 있던 나귀의 턱뼈를 집어 들더니 블레셋 사람들을 치기 시작합니다. 무려 천 여명의 블레셋 사람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사건들 속에 다음과 같은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자보다 강한 삼손의 모습입니다. 배우 마동석의 호쾌한 맨주먹 타격 액션 신을 보기 위해 며칠 만에 벌써 이백만 명 이상이 “범죄 도시” 3편이 상영 중인 극장가를 찾았다고 합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얻어 맞는 악당이 안쓰러워 보인다는 평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하의 마동석도 삼손 앞에서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은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버립니다. 혼자서 삼십 명의 블레셋 장정들을 쳐 죽이고 옷을 뺐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을 몰살시키기도 합니다. 삼손은 영화적 상상력마저 뛰어넘는 괴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면 이런 삼손의 엄청난 힘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14: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14:19, 15:14)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할 때에만 삼손은 괴력을 발휘합니다. 이를 볼 때 삼손이 가진 힘의 원천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십니다. 신약의 표현으로 바꾸어 본다면 삼손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은사는 하늘이 내린 은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흉내조차 내기 힘든 은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왜 이런 은사를 주십니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할 때를 보면 전부 다 주변에 블레셋 사람들이 있을 때입니다. 삼손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성령이 임하지 않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 삼손을 블레셋 사람을 치는 도구로 쓰시고자 할 때 그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이 은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삼손이 있는 자리가 그런 은사가 필요한 자리였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은사가 필요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시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꿀에 약한 삼손의 모습입니다. 삼손의 이야기에서 꿀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방 여인이 주는 달콤한 쾌락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비록 힘은 장사이나 여인의 유혹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집니다. 예쁜 블레셋 자매님을 보고 넋이 나가서 이스라엘의 사사요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을 다 내팽개치고 결혼을 해버립니다. 또 그 여인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 달라고 울며 매달릴 때 결국 굴복하고 맙니다. 항상 이방 여인 앞에만 서면 삼손의 자제력은 순식간에 방전되고 맙니다. 그 꿀 같은 여인 때문에 삼손은 나실인의 서약을 하나씩 다 깨트려 버립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머리털 밖에 없습니다. 이 머리털이 삼손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추세대로 간다면 그것 또한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삼손을 우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길들여 지지 않은 짐승은 절제와 인내라는 것을 모릅니다. 야생 동물의 특징은 거칠고 잔인하며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 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똑같은 짐승이라도 사람에게 길들여진 동물은 놀라운 절제심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어떤 주인이 강아지 앞에 음식을 놓아 두고 “기다려”라고 말하자 강아지가 정말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잠시 “먹어”라고 하자 그때부터 먹기 시작했습니다. 하물며 삼손은 짐승이 아닌 사람입니다.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인내심과 자제력을 갖출 수 있어야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에게서 인간의 품격이라는 것을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신약의 용어로 삼손을 묘사한다면 우리는 이런 삼손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보면 성령의 열매들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꼽고 있습니다. 하나 같이 삼손의 모습과는 참 거리가 먼 단어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그런데 삼손은 이 말씀과 딱 정반대의 길로 갑니다. 삼손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대신 육체의 일을 이룹니다. 육체의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고 바울은 열거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삼손의 삶에 착 달라붙어 있는 단어들입니다.

위의 두 가지를 종합하면 삼손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으나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모두 진실이라는 점이 우리를 심히 당혹스럽게 합니다. 삼손이 하나님의 성령을 가졌다면 거룩함 면에서도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삼손이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면서도 인내심이나 겸손, 자제력은 이토록 결여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일관되게 성령의 은사를 가졌지만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봄 수양회 말씀이었던 고린도전서 13장이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훌륭한 가르침, 남 다른 추진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랑의 열매는 없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 없는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자신도 이런 면에 주의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어떤 사람 안에 매우 강하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사람들을 돕고 운동을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의 내적인 삶은 완전히 황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의외로 매우 흔합니다. 두드러진 외적 삶과 황폐한 내면 생활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 측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좋은 성과를 내면서도 사생활에서는 유혹, 실망, 분노, 두려움에 굴복 당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재능과 능력, 더불어 죄의 유혹에는 한 없이 취약한 영혼! 화려한 외적인 성공과 성취, 더불어 공허하고 우울한 내면! 이 얼마나 심각한 불균형입니까? 물론 한 동안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습니다. 은사를 가지고 자기가 영적으로 괜찮다는 자기 정당화의 증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말하는 이 사람들을 보세요.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는 게 분명해요.”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이 불균형을 감당하지 못하고 인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올 지 모릅니다. 삼손처럼 쓰임 받기는 하되 결국 자신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게 될 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불균형을 극복하고 온전함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성령의 은사를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할 수 있을까요? 삼손은 다른 사사들과 달리 늘 혼자라는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삼손은 조언을 받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절대로 다른 사람과 함께 일어가나 팀을 이루지도 않습니다. 삼손은 늘 독불장군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분열로 고통 받으면서도 외적인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게 만드는 조건이 됩니다. 아무도 가까이서 우리의 영적인 삶을 지켜 봐 주지도 않고 영적인 삶에 대해 격려해 주지도 않고 도전을 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독한 방랑자’의 영성을 지양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과 친밀한 교제야말로 내면 생활과 외적인 삶이 온전히 통합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혼자 수련하고 도를 닦아 특별한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함께 하는 영성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이 많고 할 일이 많아도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삼손은 온갖 일을 다 저지르고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찾는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딱 한 번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삼손은 사람과의 교제도 부재하지만 주님과의 교제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기도 생활은 우리의 영적 건강을 잴 수 있는 최고의 척도입니다. 꾸준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가 즐거우십니까? 기도하면서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도 하고 배우고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삼손처럼 평소에는 안 하다가 최후의 수단으로서 기도합니까? 그 기도마저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만 기도합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이끄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혼자가 되지 맙시다. 성도의 공동체와 함께 하고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합시다. 그래서 우리 안암1부가 성령의 은사도 풍성하고 성령의 열매도 풍성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능력과 품격을 모두 갖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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