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

이창무 2023. 6. 2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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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15 강 / 이창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

말씀 / 사사기 19:1-21:25
요절 /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요즘 수능 문제 때문에 말들이 참 많습니다. “문제가 너무 어렵다. 킬러 문항을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견해도 있고, “변별력을 위해 어려운 문제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저는 학력 고사 세대라 누구의 말이 맞는 지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어떻게 나오든 해결하는 과정은 다 비슷합니다. 먼저는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다음으로 그 문제에 맞는 적절한 해법을 찾는 것, 이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문제를 이해 못하거나 잘못된 해법을 적용하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씨름해봐야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난이도가 아주 높은 킬러 문항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부터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 풀이 과정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그 문제의 해법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번 째 질문은 ‘이스라엘 가운데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 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19:1)

사사기의 첫번 째 에필로그와 마찬가지로 두번 째 에필로그에서도 한 레위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첫 등장부터 실망감을 줍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할 레위인이 나이 어린 첩을 맞이합니다. 첩도 문제가 있습니다. 간음을 저지르고 냅다 친정으로 도망칩니다. 넉 달 후 레위인은 첩을 데리러 처가집으로 향합니다. 장인은 날마다 하루 종일 사위를 붙잡고 먹고 마시기만 합니다. 장인이 왜 이렇게 사위 접대에 필사적일까요? 사위가 아내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그냥 못 본 척 지나가 주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이들 가운데 진실된 회개와 용서와 화해는 아예 시도조차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좋게 좋게 해결하자 입니다.

닷새가 지나서야 레위인은 장인의 손을 겨우 뿌리치고 첩과 하인과 더불어 떠납니다. 날이 저물자 하인은 가까운 여부스에서 숙박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조금 더 가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이방 사람의 성읍인 여부스보다 기브아가 더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곧 산산히 깨어지고 맙니다. 아무도 레위인 일행에게 말을 걸거나 환영해 주지 않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다행히도 같은 고향 출신인 한 노인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해 줍니다. 한숨 돌리나 했는데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22)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노인의 집을 포위하고 당장 레위인을 내놓으라 요구합니다. 그들은 대놓고 집단으로 동성 강간을 저지르겠다고 위협합니다. 오랜 전 소돔과 고모라에서 벌어졌던 일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니 참 충격입니다. 이어지는 노인의 반응도 충격적입니다. 노인은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대신 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호해야 하는데 어떻게 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결국 레위인의 첩은 밤새도록 불량배들에게 시달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풀려납니다. 순도 100% 공포의 밤을 겪어 본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여인일 것입니다. 여인은 기어서 가까스로 집 앞에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서 숨이 끊어지고 맙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레위인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냉혹함과 비인간성을 보여줍니다. 레위인은 자기의 첩을 붙잡아 밖으로 끌어내고, 잠을 잘 자고 일찍 일어나고, 첩을 찾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길을 떠나고자 준비합니다. 문 앞에 엎어져 있는 그녀를 향해 “괜찮아?”라는 말 한 마디조차 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귀에게 지시하듯 “일어나 가자!”고만 말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모습은 다음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29)

사울 왕이 소를 잡아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냈던 사건과 흡사해 보입니다. 결국 이 레위인은 자기 첩을 말이나 소와 같은 가축처럼 여긴 것입니다.

사사기 19장에 기록된 이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폭력성과 잔인함에 경악하게 됩니다. 너무 혐오스러운 일들이라 듣고 있기가 괴롭습니다. 아무리 성경이라지만, 이 부분만큼은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를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JBF 교사들은 여기를 건너 뛰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기 저자가 굳이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부끄럽고 어두운 면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에 빠진 사람들이 어디까지 가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먼저 희생자가 되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당시 사회의 대표적인 약자가 나그네와 여성입니다. 기브아에 들어 온 나그네인 한 레위인이 불량배들에게 위해를 당합니다. 그보다 더 약한 레위인의 첩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자기 남편으로부터 심지어 아버지로부터도 철저한 무시를 당합니다. 강자는 약자를 학대하고 또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학대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회! 이것이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주는 것은 이 모습이 하나님이 없는 이방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 하는 이스라엘 사회 한 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적들로 주로 상정된 것들은 가나안, 모압, 암몬, 블레셋과 같은 이방 민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압제 때문에 이스라엘은 많은 고통을 겪고 삶을 위협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일상의 평안한 삶을 위협하는 자들은 이방의 압제자들이 아닙니다. 같은 동족이고 이웃이고 가족들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빌런이자 최악의 빌런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자신입니다.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는 기브아 사람들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오직 자기만 사랑하는 레위인 역시 위협이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진짜 문제,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죄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자 죄의 세력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죄는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고 인간성을 잃게 만듭니다. 마침내 그들 스스로 이스라엘 가운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그들이 우리의 영적 조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그렇게 될 리가 없어 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죄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그들처럼 변할지 모릅니다. “안암UBF가 개척된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하면서 탄식하는 상황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죄를 이기는 복음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번 째 질문은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20:1)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에서 벌어진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히 미스바에 모입니다. 세어보니 무려 사십 만 명입니다. 이들은 먼저 레위인을 불러 피해자 진술을 받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자초지종을 보고하되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자신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만한 부분을 쏙 빼놓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의 말만 듣고 그 말을 덥석 믿은 바람에 사태의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그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에게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을 처리하고 이 사태를 빨리 종결시키자는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들은 옳든 그르든 내 사람들은 건들지 말라고 외치며 전쟁까지 불사하겠다고 나섭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세 번의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중 첫번 째, 두번 째 전투는 놀랍게도 베냐민 지파가 승리합니다. 이스라엘이 숫자만 믿고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는 자세를 낮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승을 거둡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육백 명의 남자를 제외하고 모두 다 죽임을 당합니다. 승리는 완료되었으나 이스라엘의 분노는 아직 식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번 분노가 폭발하자 이스라엘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48)

이스라엘은 방향을 돌려 베냐민 지파의 모든 남녀노소와 심지어 가축까지 하나도 남김 없이 모조리 다 죽입니다. 이것은 결코 정의가 아닙니다. 그저 대량 학살일 뿐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이 정신을 차려보니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전쟁 전에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에는 현재 육백 명의 남자들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중의 한 지파 전체가 아예 사라지게 됩니다. 이 일만은 막아야 한다며 그들은 머리를 맛대고 방법을 고민합니다. 그렇게해서 찾은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21:10)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응징한다며 군대를 보냅니다. 그곳 모든 주민을 죽이고 처녀 사백 명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들을 베냐민의 생존자들과 강제로 결혼을 하게 합니다. 동족 학살로 생긴 문제를 또 다른 동족 학살로 해결하려 들다니 정말 말문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러나 아직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남은 이백 명은 어떻게 합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머리를 맛댄 이스라엘은 명절 때마다 실로의 처녀들이 한곳에 모여 춤을 추는 풍습이 있다는 것에 착안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20,21)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에게 처녀 이백 명을 납치할 것을 사주합니다. 그리고 자의로 딸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맹세를 어긴 것은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야 겨우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각각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야베스 길르앗과 실로에서 납치된 처녀들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 여인들의 흐느끼는 울음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기브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자신들 가운데 있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어 집단 지성을 동원하고 적지 않은 희생까지 치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 해결에 성공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대로 실상을 파악하는 일에도 실패했고, 성급한 복수심에 휩싸여 일을 그르쳤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더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결국 문제 해결에 실패하고 말았을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직면한 문제가 사람의 내면에 역사하는 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 본질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인간 차원에서는 처리하기 힘든 악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늘 있고,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군대나 정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9 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타락하여 죄의 상태에 있게 되었으므로 구원을 가져오는 어떤 영적인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력을 모두 상실했다. 그래서 자연인은 영적 선을 아주 싫어하고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회개하거나 회개를 위한 준비도 할 수 없다.”(김모세 번역, 개혁주의 신앙고백, p317) 인간은 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합니다. 사사기는 이 진술의 내용이 진실임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문제일 뿐더러 우리 스스로가 해결책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내놓은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오히려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들거나 또 다른 문제들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세번 째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번 째 질문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답이 무엇인가?’ 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5)

사사기 저자는 사사 시대를 한 마디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시대로 요약합니다. 어려운 단어를 써서 고상해 보이지만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전부 다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내 욕심대로 살았던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마다 개성이 돋보이는 다양성의 사회,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사회, 모두가 즐거운 사회가 되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강한 자만 살아 남고 약자는 죽어 나가는 야만적인 사회, 어디에서도 안전할 수 없는 불안한 사회, 공동체는 무너지고 각자도생을 요구 받는 냉혹한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꼭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돋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를 사사기 저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 등장한 여러 사사들만으로는 온전한 구원을 얻기에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쓰임을 받기는 했지만 완전한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 왕도 완전한 구원자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수요 예배 사무엘서 말씀을 통해서 다윗 왕의 빛과 어둠, 의와 불의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다윗 왕은 다만 완전한 구원자를 보여주는 그림자의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윗 이상의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사사기 전체에 걸쳐서 특히 끝부분으로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우리의 왕은 우리가 부르지 않아도 먼저 우리를 찾아오는 왕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에 빠진 우리는 그분을 기다리지도 찾지도 않을지 모릅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으셔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왕은 혼자서 구원을 완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짊어진 짐을 나누어 들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고 홀로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왕은 우리의 악함을 씻어 주는 왕이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마음의 죄악을 씻어 줄 왕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악함과 죄성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이런 왕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를 다스릴 사람, 우리를 구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더 위대한 구원과 해방을 이룰 더 위대한 왕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을 줄 수 있는 단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가장 위대한 왕, 영원한 사사이자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전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홀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와 악함을 씻어 주십니다. 주홍보다 더 붉은 내 죄를 씻어 우리 영혼을 흰 눈보다 더 희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을 성령으로 거듭 나게 하시고 늘 새롭게 하십니다.

이 예수님 만이 우리 내면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이 예수님 만이 우리를 공평과 정의, 은혜와 자비로 다스려 주시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이번 사사기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에게 얼마나 절실히 꼭 필요한 분인가를 발견하셨기를 바랍니다. 이후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더욱 간절히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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