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이창무 2023. 1. 23.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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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누가복음 제 38 강 / 이창무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말씀 / 누가복음 22:14-20
요절 /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오늘은 우리 나라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설날입니다. 설날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고 함께 떡국을 먹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은 유월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유월절이 되면 옛적 일을 기억하고 가족들끼리 모여 식사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부터 기원한 성례가 잘 아시는 대로 바로 성만찬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유월절 식사에 담긴 고난의 의미, 성만찬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14)”

때가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유대 달력으로 1월 14일 목요일 저녁 이 땅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심판하여 죽게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당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어린 양을 잡아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형식이 없는 식사는 아니었습니다. 총 네 번의 포도주를 마시는 순서가 있습니다. 축도를 함께 첫번째 잔을 마십니다. 식사 도중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해 준 후 두번째 잔을 마십니다. 식사를 다 마치면 축사하고 세번째 잔을 마십니다. 그리고 나서 시편으로 찬송을 부른 뒤 네번째 잔을 마시면서 모든 식사를 마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17절에 나오는 잔은 식사 시작을 알리는 첫번째 잔이고 20절의 잔은 식사를 마친 후 마시는 세번째 잔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와 함께 앉아 유월절 식사를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15)”

매년 하던 유월절 식사였지만, 이번 식사는 예년과 다른 무게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식사하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원한다는 말을 두번이나 반복하십니다. 그만큼 이번 식사가 예수님께 간절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체포 당하시고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님의 고난에 담긴 의미,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이 찢겨지시고 피 흘리셔야 하는 이유를 제자들에게 전달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전달할 가장 적합한 수단으로 선택하신 것이 바로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를 열두 사도만 알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알아야 하고 당연히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성만찬이라는 성례를 제정하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성만찬의 떡과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며,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만찬을 중요하게 여기고, 여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만찬을 시행하는 것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핵심적인 표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는 성만찬이 아니어도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얼마든지 깨닫고 마음에 새길 수단이 있다. 소감을 깊이 쓰고 메시지를 잘 들으면 된다.’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만찬에는 말씀에서 받는 은혜와는 또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말씀은 주로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만찬에서는 우리 눈으로 떡이 나누어지고 찢겨지는 것을 보고, 포도주의 붉은 색을 봅니다. 손의 감촉을 떡을 만지고 코 안으로 포도주의 향이 들어옵니다. 또 입으로 떡과 포도주를 맛봅니다. 우리의 모든 감각 기관이 거의 총동원 되다시피 합니다. 온 몸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성만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만찬은 얼마나 자주 해야 할까요? 현재 매주 성만찬을 시행하는 교회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인 루터교도 성공회도 매주 합니다. 감리교와 순복음 교회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합니다. 한국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는 칼빈이 제네바 시에서 했던 전례를 따라 일 년에 네 번 정도를 시행합니다. 사실 칼빈은 더 자주 하고자 했지만 과격한 종교개혁자인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제네바 의회가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도 장로교의 예를 따라 일 년에 네 번 정도 성만찬을 시행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만찬 때문에 예배가 늦게 끝난다고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많아야 겨우 일년에 네 번 밖에 안 하는데 성만찬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시고 단지 해야 하니까 하는 의무감만으로 참여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성만찬의 자리 가운데 예수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에게 하늘의 복을 부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는만큼 성만찬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하기를 원하고 원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성만찬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성만찬은 소망과 기쁨입니다.

이제 다음 해 유월절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식사를 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여 제자들 곁을 떠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유월절 식사는 그들과 함께 할 마지막 식사일까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16)”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날까지 유보될 뿐입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그날은 유월절의 의미가 완성되는 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넘어가시고 자기와 화목을 이루시는 일이 온전히 성취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18절에서 그날이 언제인지 한번 더 부연설명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18)”

그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그날이 올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겠노라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제자들과 함께 마실 그날을 갈망하는 데 있습니다. 그날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새로운 포도주로 함께 마실 것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에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잔치가 열릴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잔치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의 주인공은 당연히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도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명나무의 열매로 만든 음식을 먹고 천국산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이 넘치게 될까요?

성만찬은 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미리 당겨서 맛보는 시간입니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 같은 것입니다. 예고편을 보고 본편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기대가 되는 것처럼 성만찬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살짝 맛을 보기만 했는데도 너무 좋아서 즐겁고 기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성만찬 분위기는 즐겁고 화기애애한 잔치집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다함께 ‘애찬’이라고 부르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이어서 성만찬을 시행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만찬이 중세 시대로 넘어가면서부터 장례식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 전염병, 기근, 전쟁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성만찬이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 착 가라앉는 분위기로 바뀌어 오늘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만찬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잔칫집입니까? 장례식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장례식도 그렇게 많이 무겁거나 가라앉은 분위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전브리스가 선교사님 모친의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고인이 되신 권사님께서 천국에 가셔서 하나님 품에 안겨 안식하고 계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장례식이지만 분위기가 어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랫만에 선교사님 가정을 보니 너무 반가워한 나머지 잔치집 분위기에 더 가까웠습니다. 선교사님만 봐도 이렇게 반가운데 장차 예수님을 만나면 얼마나 더 반갑겠습니까? 그날이 되면 지금 내가 겪는 슬픔이 모두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내가 받은 깊은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주님이 우리 눈에서 흘린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 그날을 소망하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성만찬은 기억과 감사입니다.

유월절 식사 시간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시간이 있습니다. 주로 떡과 음식을 나누면서 과거 하나님이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설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십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19)”

예수님은 떡은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십니다. 떡을 떼어 나누어 주려면 떡을 부수고 찢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은 부숴지고 찢겨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야만 우리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예수님을 먹어야만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기꺼이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남김 없이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먹는다고 하니까 살짝 거부감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식인종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때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먹는다는 괴담이 돈 적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굳이 내 몸을 먹으라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먹은 것은 분해되고 흡수되어 몸의 일부가 됩니다. 예수님을 먹으라는 것을 예수님을 흡수해서 너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거룩과 사랑, 온유와 자비, 겸손과 인내 등이 내 안에 쌓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며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곧이어 예수님은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십니다. 기념하라는 것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의 희생을 계속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 이런 당부를 제자들에게 하셨을까요? 주님이 내게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할 때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망각하는 순간 감사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날 위하여 자기의 몸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기억을 통해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성만찬을 가리켜 헬라어로 ‘유카리스트’라고 합니다. 유카리스트라는 말 자체가 그냥 ‘감사’라는 뜻입니다.

지난 번 신년 말씀 때 나이가 들면서 점점 건망증이 심해진다는 말에 많은 분들이 공감을 표현해 주셨습니다. 다 내 이야기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나는 아직 젊은데도 그래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건망증이 심해져도 사람들이 잘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받았던 상처와 아픔은 잘 기억합니다. ‘내가 그 인간에게 받은 모멸과 상처를 어찌 잊을 수 있겠어?” 하면서 두고 두고 기억하고 곱씹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기억해 봐야 인생에 도움이 안 됩니다. 미움과 증오로 자기 인생을 소모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런 것은 빨리 잊어 버리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진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주까지 기억했더라도 이번 주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하며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기억하고 또 성만찬에 참여하여 몸으로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미움과 원망 대신 감사와 찬양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성만찬은 믿음과 신뢰입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세번째 잔에 포도주를 따라 부으신 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0)”

앞에서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포도주를 말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 대신 잔을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포도주를 잔에 담기 위해 흘려서 부어야 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가 땅에 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에는 계약 체결은 보통 서명 날인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으로 부족하면 법무사에게 가서 공증을 받습니다. 그런데 고대에는 언약을 체결한 후에 이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주로 양이나 소와 같은 짐승의 피를 흘려 사방에 뿌렸습니다. 사람들이 굳은 결의를 다질 때 손가락을 깨물어 자기 피로 혈서를 쓰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피를 흘려야 언약을 견고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언약 체결식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내용의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은 돌판에 새겨졌고 언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짐승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 언약입니다.

옛언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하게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의무를 모두 다 깨트렸습니다. 헛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옛언약은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옛언약은 인간의 언약함과 죄 때문에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구원의 소망은 다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새 언약은 옛언약과 다릅니다. 새 언약은 사람의 행위에 기초하지 않고 믿음에 기초한 언약입니다. 행위에 따른 상과 벌이 아니라 은혜에 따른 죄사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돌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언약입니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언약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아예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계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옛언약과 클래스가 다른 완전한 구속의 언약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새 언약에 속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언약을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을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너무 헤매고 바닥을 기게 되면 하나님이 새 언약은 없던 걸로 하고 다시 옛언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보증을 하셨기 때문에 변경되거나 취소될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변해도 너무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최근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놀랍습니다.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이 미술대회에서 대상을 타기도 하고 인공지능이 작곡도 하고 소설을 쓰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예측불허입니다. 이런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 한 가지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그곳에 우리 인생의 닻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 하신 그 언약 말입니다. 이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언약이기 때문에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에서 참여하여 잔을 나눌 때마다 이 사실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내가 일생 믿고 의지하고 신뢰할만한 유일한 약속이 여기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만찬이 가지는 세 가지 의미를 살펴 보았습니다. 성만찬은 첫째로 소망과 기쁨입니다. 이것은 성만찬의 미래지향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만찬은 기억과 감사입니다. 이것은 성만찬의 과거회상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만찬은 믿음과 신뢰입니다. 이것은 성만찬의 현재진행형인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성만찬 규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지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의미를 다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만찬은 의미를 아는 만큼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성만찬의 다채로운 의미를 알게 되었으니 우리 가운데 성만찬의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리라 믿습니다.

사실 오늘은 말씀이 말씀인만큼 성만찬을 하기에 딱 좋은 날입니다. 하지만 설날인 관계로 아쉽지만 몇 주 뒤에 하고자 합니다. 몇 주 뒤에서는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도 해제된 시점이 될 것입니다. 지난 코로나 동안 다른 것은 비대면 온라인으로 어떻게 하든 할 수 있었는데 유일하게 제약을 많아 하기 힘들었던 것이 성만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제약이 사라지고 자유롭게 성만찬을 시행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앞으로 성만찬을 통해 마침내 주님을 만나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기쁨의 만찬을 나눌 그 날을 소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만찬을 통해 나를 위해 자기 몸을 찢어 내어주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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