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이창무 2023. 1. 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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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누가복음 제 36 강 / 이창무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말씀 / 누가복음 20:27-40
요절 / 누가복음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천로역정에 보면 ‘현세의 정책(Carnal-Policy)’이라는 도시에 사는 세속현자(Mr. Worldly-Wiseman)가 나옵니다. 그는 믿음의 길을 막 출발한 크리스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연약한 인간들이 쓸데없는 걱정에 휩싸이다가 당신처럼 정신착란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착란증은 인간성을 잃게 하고 자기도 모르는 것을 얻으려고 무모한 모험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속현자의 눈에는 부활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며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요 정신착란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세속현자는 천로역정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세속현자를 많이 닮은 사두개인이 등장해 부활을 주제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누가 진짜 착란에 빠진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진정 제 정신으로 사는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27)”

사두개인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을 때부터 제사장으로 일해왔던 사람들입니다. 제사장 사독의 후손들이라서 사두개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최고위급 성직자가 대놓고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이 전부이고 죽으면 심판도 부활도 없다고 가르치는 목사님! 신부님?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두개인이 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죽음 이후 심판도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구약성경 전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들이 어째서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성경 자체도 자기 입맛대로 선별해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오래동안 현실과 타협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직을 줄줄이 세습해 오면서 유대 사회의 부와 권력을 상당 부분 독점해 왔습니다. 그들은 이런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 정부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덕분에 유대인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식민 치하에서도 으리으리한 대저택에서 수많은 하인들을 거느리며 호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이해 현실과 맞서 싸우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 현실의 유익을 최대한 얻기 위해 믿음을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들은 현실과 차이를 보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신착란으로 여겼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그들에게 참이고 진리였습니다. 이처럼 사두개인들은 종교인의 외피를 쓰고 있긴 했지만 속으로는 뼈속까지 세속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만 현실과 믿음의 차이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또는 국가적인 재난을 만났을 때 극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을까?’라고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삶에 관여하지 않는 방관자인 것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또한 죄의 유혹에 반복적으로 넘어질 때 말씀에 대한 신뢰를 흔들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정욕의 죄에 반복해서 지을 때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멀리하라 말씀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현실의 만족과 즐거움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이기는 일이 계속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말씀에 붙들며 사는 것이 무슨 힘이 있냐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다를 때 우리는 눈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까요? 바로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에 두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에 믿음을 두고 그것을 따라야지 항상 변하는 현실을 따라 살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믿음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는 올바른 방식입니다. 믿음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현실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실패하여 현실의 손을 들어준다면, 다시 말해 계속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 우리도 사두개인과 똑같이 변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성도,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천국 백성, 죄를 지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거룩한 백성, 돈과 명예와 권력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는 예수님의 제자… 완전히 모순 덩어리이지요? 믿음과 현실이 충돌할 때마다 계속 현실의 손을 들어준다면 우리가 그런 모순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성경을 믿는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 점점 세속화되면서 마음이 불신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사두개인처럼 대놓고 말하게 될지 모릅니다. “부활은 없다. 최후의 심판도 천국도 지옥도 없다.” 이 말은 사실상 하나님은 없다, 나에게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28)”

그들은 먼저 신명기 25장에 기록된 수혼 제도에 대해 언급합니다. 수혼 제도란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여 형을 대신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에게 죽은 형의 이름을 붙여주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형에게 속한 땅을 아들이 물려 받게 하여 후손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법이면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29-32)”

그런데 사두개인의 이야기는 여기부터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이런 상황이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요? 물론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막장 드라마에도 안 나올 만한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여자가 연쇄살인범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조사를 해 봐야 합니다. 두 세번이라도 의심할 법한데 일곱 법이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합니다. 사두개인이 이런 극단적인 예시를 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33)”

그들은 한 여자와 일곱 남편이 부활하여 만나면 누가 진짜 그녀의 남편인가를 묻습니다.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부활이 있다면 이런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이 생기는데 부활이 있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이런 질문을 만들어 내려고 얼마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을까요? 속으로 예수님이 외통수에 딱 걸렸다고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이들의 곤혹스러운 질문에 예수님은 어떤 답을 내놓으실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34,35)”

예수님은 먼저 사두개인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부활 이전이 세상과 부활 이후의 세상은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에 따라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아이도 낳습니다.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이후 이것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나라의 합계 출산율이 1이하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려와 걱정이 많습니다. 이러다 대한민국이 소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 이후 세상에는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식을 낳을 일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36)”

부활 이후에는 다시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부활시키시고 천사들처럼 완전히 새롭게 된 존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썩지 않고 고통받지 않고 슬픔과 죽음이 없고 죄가 없는 상태로 영원히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 속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더 깊게 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며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과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세상이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저 세상에서는 내 동역자와 더 이상 부부가 아니라니!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천국에 가면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큰 기쁨에 압도되어 아쉬움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부활의 삶이 이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고 차원이 다른 삶입니다. 사두개인은 이것을 단단히 오해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에 기초해 스스로 고안해 낸 부활을 가정하고 그런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따진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성경이 부활을 증명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37)”

예수님은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셨을 때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나타나내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구절의 시제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그 분은 참 좋은 분이셨지” 이런 식으로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언급하실 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었다’라고 말씀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전부 다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현재 살아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시편 16편, 이사야서 26장, 다니엘서 12장 등 구약 성경에는 부활을 입증하는 많은 구절이 있지만, 이처럼 모세 오경 역시 부활이 있음을 동일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얼마나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시는지, 동사 하나의 시제까지 얼마나 세심하게 살피시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3장은 사두개인들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었습니다. 똑 같은 구절을 읽는데 그들은 왜 예수님이 발견하신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성경을 읽기는 하되 말씀이 드러내고 있는 생명의 세계를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경험은 죽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져온 사례도 죽고 죽고 다 죽는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현실에 갇힌 그들은 성경 때문에 내 생각이 바뀌고 내 삶이 변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읽는 목적은 다만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과 경험을 더욱 굳히고 강화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는 이름 자체에 성경 읽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 읽기만으로는 부족해 일용할 양식과 소감 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소감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두개인 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삶을 1 밀리미터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래 놓고서 ‘말씀이 내 삶에 도움이 안 된다. 소감 쓰기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생각을 교정하고 바른 교훈으로 예리하게 우리 마음을 다듬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 길의 등불과 빛이 되어 우리를 의로운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에 충분합니다. 단, 성경을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살고자 할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현실과 믿음이 충돌할 때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현실을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에게는 성경이 새롭게 열리게 됩니다. 그냥 흰 종이에 검은 색 글씨가 아니라 구절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며 일어나서 내 손을 잡아주고 이끌어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번 겨울 방학 중에 러너스 가운데 양식 챌린지, 소감 챌린지를 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러너스가 현실을 이기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제목은 러너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힘든 현실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함께 깎여 나간 것은 아닐까요? 믿음보다는 현실이지 하면서 점점 사두개인을 닮아 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고 무섭고 불만족스럽다 하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38)”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얼핏 보면 이 말씀은 부활과 영생이 있다는 말씀을 부연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들어가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늘 믿음을 저버린 사두개인들이 죽은 자입니다. 이 땅이 전부인 줄만 알고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죽은 자입니다. 딱히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지만 실제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사람이 죽은 자입니다. 현실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이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살아 있는 자입니까? 바로 앞 절에 나온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사람이 살아 있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가 되도록 한 명의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너를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현실보다는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고향집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삭은 목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물을 세 번씩이나 양보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 땅을 장차 자기의 유업으로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네 명의 아내와 열 두명의 아들로 말미암는 끔찍한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말하듯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열 두 아들 모두를 축복한 뒤에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후손 가운데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믿음을 선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일생을 걸고 의지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리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살아 있는 자 자들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큰 파도가 넘실거리는 홍해 앞에서 믿음으로 지팡이를 내밀었던 모세도 살아 있는 자였습니다.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사백 오십 명, 아세라 선지자 사백 명과 대결했던 엘리야도 살아 있는 자였습니다. 나라가 한창 망해가고 있는 와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새 일을 이루실 것이라 외쳤던 선지자 이사야도 살아 있는 자였습니다. 모세도 죽고 엘리야도 죽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당해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모세, 엘리야, 이사야 모두 다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직접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우리 역시 살아 있는 자 중 하나입니다. 지난 주 예배가 끝난 후 안겸손 목자님에게서 카톡이 왔었습니다. 요회 이름을 이공삼공에서 미라클 요회로 변경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카톡이었습니다. 2023년 새 일을 행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요회원들과 함께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행하실 기적 같은 새 일을 기대하는 미라클 요회 목자님들은 살아 있는 자입니다. 어제도 변함없이 눈이 내려 쌓아 있는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목자님들이 나섰습니다. 아직도 눈에 보이는 확실한 열매는 없어도 믿음의 도전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입니다. 지난 주 저는 안암1부 역사 보고서를 쓰면서 안암 1부의 모든 분들이 지난 한 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현실과 얼마나 치열하게 씨름하면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셨는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요절 심포지움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누리며 사는 우리가 살아 있는 자입니다. 2023년 새해에도 계속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장차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비롯한 수많은 살아 있는 자들과 더불어 장엄한 부활의 행진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39,40)”

성경을 필사하고 율법을 연구했던 학자들인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참되게 대답하셨다고 인정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예수님께 질문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모든 그룹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정확하고 분명한 이해와 설명을 도무지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명에 따라 부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수용했을까요? 자신들이 크게 오해한 것을 성경의 진리로 교정했을까요? 그들이 “옳다”고 인정한 그 말씀에 순종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 안타깝고도 슬픈 사실입니다. 죄인은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이 싫어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의 특징입니다. 결국 이 사람들이 주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맙니다.

이처럼 현실의 유익을 얻기 위해 진리를 알면서도 거부하는 사람이 가게 될 종착역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마치 박물관에 박제된 호랑이나 곰처럼 고정시켜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생에는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능력과 복을 베풀어 주고 싶어도 베풀어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모양뿐인 박제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동적으로 역사를 창조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제 2의 아브라함, 제 2의 이삭, 제 2의 야곱의 인생을 창조하시고 그 인생의 영광스러운 스토리들을 만들어가길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 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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