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이창무 2022. 12. 1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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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5 강 / 이창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19:28-40
요절 / 누가복음 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우리 나라 대통령실에는 의전 비서관이라는 자리가 있습니다. 의전 비서관이 하는 일은 대통령이 치르는 행사의 모든 것을 사전에 계획하고 조율하는 일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따로 필요한가 하면 대통령의 넥타이 색깔부터 동선 하나 하나가 다 대통령의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긴 여행 끝에 드디어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착해 입성식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의전 비서관 대신 본인이 직접 입성식을 준비하고 기획하십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입성하셨는지 함께 살펴보며, 이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28)”

예수님께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십니다.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을 때 누가 앞서서 갑니까? 목적지가 어디이며 어떻게 언제까지 가야할 지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역시 예루살렘에 어떻게 들어가서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앞장 서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의 첫번째 단계가 무엇일까요?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29)”

예수님이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안암동과 제기동처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동네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는 3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이 정도면 거리면 당시로서는 걸어가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 입성하실 때 쓸 탈 것을 굳이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을 타고 들어가시느냐’ 그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에 대해서는 잠시 후 생각하기로 하고 먼저 탈 것을 준비하는 과정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30,31)”

예수님이 준비하시는 과정이 여러모로 놀랍습니다. 첫번째 놀라운 점은 맞은편 마을에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예수님이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CCTV가 있던 시대도 아니고 예수님이 무슨 천리안이라도 가지고 계신 것일까요? 참 신기합니다. 두번째 놀라운 점은 나귀 새끼를 데려오는 방식입니다. 제자들에게 그냥 풀어서 끌고 오라 하십니다. 혹시 누가 왜 풀어 가느냐 묻는다면 주께서 쓰시겠다 짧게 한 마디만 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이거 자칫하면 주거침입에 절도죄로 철컹 철컹 아닙니까? 예수님이 왜 이렇게 나귀 새끼를 준비하도록 하셨을까요?

먼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님이시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가 보지 않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내가 주인이다. 내가 원할 때 그것을 사용할 합법적인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딱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과 동등한 주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엄청난 사실을 믿고 영접할 수 있을까요? 만약 영접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것이요, 영접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리 하십니까?’ 하며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32)”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순종합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정말로 그곳에 아무도 타 본 적 없는 어린 나귀가 묶여 있습니다. 믿고 왔지만 그래도 제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은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역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만왕의 왕이 틀림 없으시네.” “암, 그렇고 말고. 끌고 가세.” 

그런데 제자는 그렇다 치고 문제는 나귀 주인들입니다. 그들이 펄쩍 뛰며 난리를 치면 다 소용 없는 일 아닐까요?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33-35a)”

놀랍게도 나귀 주인들도 주께서 쓰시겠다 하는 말 한 마디에 순순히 나귀 새끼를 내어 줍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혹시 보냄 받은 제자 중 한 명은 강호동, 다른 한 명은 서장훈 같은 스타일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런데 이 마을이 베다니와 이와 인접한 벳바게 중 하나라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곳은 얼마 전 예수님께서 죽어 무덤이 있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까지 나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곳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자신들의 코 앞에서 생생하게 목격을 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 주님께서 ‘내가 쓰겠다’ 하시니 ‘기꺼이 얼마든지 쓰셔도 좋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33절에 ‘임자’라는 말이 나오고 34절에 ‘주’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서로 다른 단어이지만 원어로는 ‘주인(퀴리오스)’이라는 뜻의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 나귀 새끼에게는 겉으로 드러난 주인과 드러나지 않은 참 주인, 이렇게 두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의 임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위탁을 받아 잠시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진짜 주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만유의 주님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들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쓰시겠다고 할 때 내어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 소중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집도 소중하고 차도 소중하고 다 소중하지만 그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내가 섬기고 돕는 양이 너무 소중하고, 나의 배우자와 자녀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물질도, 양들도, 가족들도 근본적으로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쓰고 싶다.” 또는 “네 아들을 사용해야 하겠다. 네 딸을 써야 하겠다. 네 남편이 필요하다.” 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이 쓰시겠다 하시면 주님께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싫은데요. 내 것인데 왜 주님이 쓰려고 하십니까?” 이렇게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로 죽었던 나를 십자가로 다시 살리시고 그분의 영원한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지으시고 나의 삶과 죽음을 다 주관하시는 주님(Lord)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가 쓰시겠다 하실 때 이를 거절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문 속 나귀 새끼가 특별한 짐승은 아닙니다. 더하기 빼기를 할 줄 아는 천재 나귀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귀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나귀입니다. 하지만 이 지구 상에 존재했던 모든 나귀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나귀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제 큰딸이 어렸을 때 일산 병원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탤런트 조인성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 조인성과 매니저, 저와 큰딸, 넷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본 조인성은 생각보다 키가 훨씬 컸고 얼굴이 작았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조인성이 갑자기 딸의 뺨을 두 손을 감싸 쥐더니 “너 참 귀엽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집에 온 후 저는 딸에게 적어도 앞으로 일주일 동안 세수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조인성이 뺨을 만져 주어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온 세상의 구주이자 하나님의 아들을 등에 업어 보다니! 저는 이 나귀가 너무 부럽습니다. 제가 만약 나귀 주인이라면 나귀를 향해 ‘너는 우리 가문의 자랑이다.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 이를 거절하는 것은 영광을 얻을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뒤늦게 후회하게 될 지 모릅니다. 평범하고 달리 내세울 것 없는 우리 인생이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길은 주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예수님을 등에 업고 함께 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값어치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렇게 주님께 쓰임 받는 이렇게 영광스러운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35b,36)”

제자들이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은 것은 안장을 대신하려는 것입니다. 겉옷을 예수님이 가시는 길 앞에 펼쳐 놓은 것은 레드 카펫을 대신하려는 것입니다. 둘 다 왕의 행차에 어울리는 연출을 하려 한 것이나 많이 어설퍼 보입니다. 마음은 갸륵하지만 폼은 안 납니다.

왕이 수도에 입성한다고 하면 적어도 백마를 타고 들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십니다. 나귀 새끼라니요? 퍼레이드를 하는데 대통령이 마티즈를 타고 나타난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나귀 새끼를 직접 본 적이 있는 한 목자님의 말씀에 따르면 틀림없이 예수님의 다리가 질질 끌리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티즈도 과분하고 자전거를 타고 입성하신 것에 비유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틀림없이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에이, 무슨 왕의 입성식이 이 모양이야?”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마치 돈키호테 같은 몽상가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왜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실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왕은 왕이시되 세상의 여러 왕들과 다른 왕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어떻게 하든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최대한 위엄 있고 화려하게 보이기를 원합니다. 보통 사람이 꿈도 꿀 수 없는 넓은 집에서 살고 큰 차를 타고 비싼 옷을 입습니다. 그 앞에서 누구나 다 주눅이 들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짓누르고 밟아버려 다시는 반항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전쟁을 벌이기를 좋아합니다. 고대에 이런 권력자들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 바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에 올라타기를 거부하십니다. 대신 말보다 훨씬 더 약한 짐승인 나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것도 어른이 된 나귀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사람이 타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겁을 줄 의도가 전혀 없으십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을 보이심으로 모두의 경계심을 풀어주십니다. 가난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아무런 부담 없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왕이 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길, Jesus Way 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겸손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손에 든 무기를 내려 놓게 만드는 평화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위에서 군림하는 길이 아니라 아래에서 섬기는 길입니다. 이 예수님의 길은 여관에서 밀려나 마굿간 구유에서 탄생하실 때부터 시작되었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뭇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시다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길은 일생 예수님을 닮고자 했던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길이기도 합니다. 몇 해 전 저는 고린도후서를 읽다가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이 참된 사도인 것을 변호하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내민 자신이 참 사도인 증거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의 약함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양들을 위해 늘 노심초사하고 근심 걱정하고 때로는 눈물 흘리는 이 약한 모습이 내가 진짜 사도인 증거다 라고 그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예수님이 앞서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길은 우리를 구원한 길이고 우리를 살린 길입니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께 다가설 수 있었고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 예수님의 길은 이제 우리가 뒤따라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결코 힘으로, 전쟁으로, 강함으로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섬김으로, 져주고 양보함으로, 약함으로 이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힘을 과시하고, 그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해 버리라는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의 왕은 백마를 탄 군주가 아닙니다. 우리의 왕은 나귀 새끼를 탄 겸손의 왕, 평화의 왕이십니다.

제가 한국 현대사를 전공하신 어떤 학자로부터 흥미로운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한국 교회가 현재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된 과정의 출발 지점에 마이클 잭슨이 있다고 합니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첫 내한 공연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개런티를 절반이나 줄일 정도로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기독교계가 들고 일어나 마이클 잭슨 내한 반대 운동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장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이 불허 결정을 내림으로 공연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 동안 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약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팝의 황제라고 불리우는 세계적인 스타의 공연을 막을 정도로 강한 힘이 있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때 교계도 자신들의 힘에 스스로 놀랐다고 합니다. 이후로 자신감이 생겨서 현안이 있을 때마다 반대 혹은 찬성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안티 기독교 세력이 급증하게 됩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지고 전도가 점점 어려워지게 됩니다.

역사는 교회가 힘을 과시하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비극적인 실수라는 점을 보여주어 왔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랬고, 중세의 마녀 재판이 그랬고,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 그랬습니다. 교회가 나귀 새끼 대신 말을 타려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대신 칼을 쥐려 하면 항상 그랬습니다. 힘으로 밀어 부쳐 원하는 바는 이룰 지 몰라도,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말에서 내려와 다시 나귀 새끼를 타야 합니다. 황금으로 빛나는 보좌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마구간의 구유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하게 낮아지고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약한 자로 살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소박하게 살려 하니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나도 좀 폼 나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은 장차 예수님이 다시 한번 입성하실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 보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입성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 만국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모든 반역자를 맹렬한 분노로 짓밟으실 것입니다. 그때 무엇을 타고 오실까요? 그때도 나귀 새끼일까요? 아닙니다. 그날에 예수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이 백마 타고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그날까지 우리는 나귀 새끼를 타신 우리 왕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겸손의 길, 평화의 길, 약함의 길, 섬김의 길, 예수님의 길을 걸어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길을 따르며 예수님을 닮아 가며 세상을 살리는 예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서로 반대되는 두 부류로 나뉩니다. 첫번째는 왕이신 예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37,38)”

나귀 타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문 가까이 다가오자 제자의 온 무리가 나와서 그분을 영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들이 부르는 찬양의 전반부는 시편 118편 26절과 흡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바꾼 것이 인상적입니다. 후반부는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천군천사들이 들판에서 양 치던 목자들 앞에서 노래했던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의 거짓 평화와 영광이 아닌 하늘의 참된 평화와 영광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왕이심을 노래합니다. 이 찬양의 전부가 다 제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찬양이 아닐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들이 이 정도로 예수님을 깊이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령으로 감동시키셔서 예수님의 입성에 딱 맞는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39)”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앙하는 제자들의 반응이 몹시도 못마땅합니다. 일시적인 군중 심리에 휩싸여 선전선동을 일삼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왕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선생이여” 이것이 그들이 예수님께 붙일 수 있는 존칭의 최대치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왕이 아닌 줄 본인이 잘 알면서 왜 자제를 안 시키느냐?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이냐?” 이렇게 힐난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40)”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 사람들이 나를 찬양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돌들이라도 나를 찬양할 것이다.” 입니다. 곧 예수님은 찬양 받기 합당하신 왕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 피조물 중에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유일한 피조물이 바로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 그 안에 지으신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오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싫어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여기 교만의 대명사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입성하시는 데도 직접 찬양하기를 거부하고 다른 이의 찬양도 거슬려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찮아 보이는 이 돌멩이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에수님을 향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앞드려 경배하며 뜨겁게 찬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돌멩이보다 더 무겁게 침묵하고 있습니까?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왕께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해 구유에 태어나시고, 냄새 나고 더러운 죄인들을 섬기시다가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왕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 겸손의 왕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의 왕을 우리가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이 왕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왕이 주시는 하늘의 참된 평화를 덧입고 누리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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