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이창무 2023. 1. 15. 15:36
반응형

2023년 누가복음 제 37 강 / 이창무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말씀 / 누가복음 21:5-38
요절 /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우리가 잘 아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을까요? “내 속옷은 어디 갔지?”라는 생각을 한다는 조금 철지난 유머가 있기는 합니다. 이 조각상은 원래 ‘지옥의 문’이라는 큰 조각품의 일부분이었습니다. 로댕이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지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며 깊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평소 별 생각 없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난 후 세상의 종말과 최후 심판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말씀이 종말과 재림의 문제를 함께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5,6)”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합니다. 당시 성전은 완공에 이르기까지 84년이나 소요되었으며, 예루살렘 전체 면적의 1/6이나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이었습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기둥과 벽이 세워졌고, 천정과 문은 기부 받은 막대한 양의 금으로 입혔습니다. 여기에 햇빛이 반사되면 눈이 부셔서 쳐다보기조차 힘들 정도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여기에서 언급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위용에 놀라며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와~ 선생님! 이 건물들이 어떠하며 이 돌들이 어떠합니까? 기가 막히네요. 죽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들 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성전의 수많은 돌 중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예언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전 내부의 부패와 타락 때문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지난 주 말씀에 나왔던 사두개인들이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현실의 부와 권력을 얻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을 비즈니스 모델로 이용하는 종교 자영업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성전의 겉모습은 크고 화려했지만 안으로는 썩을 대로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수 밖에 없음을 보고 계십니다.

전 세계의 가장 큰 교회 50개 교회 중에 한국에 몇 개의 교회가 있을까요? 미국 크리스챤 월드 지의 발표에 따르면 23개가 한국에 있다고 합니다. 대망의 1위도 당연히 한국의 차지입니다. 이런 교회 근처에만 가도 그 크기와 화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마냥 감탄하고 자부심을 가질 것만은 아닙니다. 과연 한국 교회는 그 화려함과 명성에 걸맞는 영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혹시 그 안에 참된 예수님의 제자보다는 현대판 사두개인과 현대판 바리새인이 더 많은 것이 아닐까요? 진리의 복음보다는 값싼 위로와 평안을 추구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은 아닐까요? 만약 정말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럽에는 엄청난 크기와 높이를 자랑하는 수많은 오래된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곳이 관광지로 전락했고, 최근에는 술집으로 개조되는 참담한 일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신앙을 잃고 복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얼마든지 그 전철을 뒤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되기 않기 위해 한국 교회가 숫자와 외형보다는 복음의 본질을 온전히 회복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늦기 전에 바로 우리부터 말씀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개혁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전 멸망에 대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 질문은 일차적으로 성전 멸망의 시기와 징조에 관한 질문입니다. 아울러 세상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성전의 멸망이란 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말세의 때에 일어날 일들이 무엇이며 이에 제자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두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9절부터 11절에서 예수님은 말세에 여러 가지 무서운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난에는 내란이나 전쟁과 같이 사람이 일으키는 재난이 있고, 지진, 기근, 전염병과 같은 자연 재해가 있습니다. 이런 재난의 소식이 들려올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8)”

재난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불안해 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대로 가다가 세상이 곧 멸망할 것만 같습니다. 무언가를 기대고 의지할 곳을 찾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이단 사이비 세력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보라! 이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 너희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나다.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당부하십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거짓 예수가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약 50명의 재림 예수가 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OO의 이OO 교주가 있습니다. 이런 이단들의 특징은 종말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신OO는 계시록을 자기 입맛대로 가르치면서 때가 임박했으니 어서 구원 받을 144,000 명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미 등록 교인이 17만명이 넘어 수 만명은 짤리게 생겼습니다. 재림 예수를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종말론을 기초로 괴상한 음모론을 설파하고 현실도피를 유도하는 거짓 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유튜브가 불건전한 종말론을 확산시키는 주요한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둘째, 박해를 받더라도 진리를 증언하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말세에 믿는 자들이 박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박해를 받습니까? 서로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목표를 지향합니다. 세상은 이런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미워합니다. 크고 작은 불이익을 주기도 하고, 왕따를 시키기도 하고,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박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공적인 박해입니다. 12절에 보면 회당과 옥에 넘겨지고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려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너무 쫄아서 권력자들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15)”

예수님은 이때 해야할 말을 우리 입에 쏙 넣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도 함께 불어넣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은 박해 받을 때 위축되기는 커녕 오히려 이것을 진리를 증언할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여러 사도들이 이 말씀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사적인 박해입니다. 16절에 보면 이번에는 부모, 형제, 친척, 벗이 박해의 주인공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만큼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일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두 눈 딱 감고 타협하면 안 될까? 이제부터 나 성경 공부도 안 하고 교회에도 안 나갈테니까 제발 미워하지 말아 줘!” 흔들릴 수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9)”

예수님은 인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내하지 못하고 타협해 버리면 천하보다도 더 소중한 우리 영혼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부드럽게 말을 해도 안 통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럴 때는 무조건 참아야 합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 영혼을 얻게 됩니다.

2017년 미국 고든-콘웰 세계기독교연구센터에서 보고한 “박해받는 크리스천에 대한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매해 약 9만 명의 크리스천이 목숨을 잃어 10년간 약 90만명이 순교했습니다. 이 보고에 따르면 2016년에는 6분마다 한 명의 크리스천이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선진국은 다를까요? 기독교 배경을 가진 미국과 유럽은 핍박이 덜할까요? 한국은 안전할까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물론 폭력과 죽음의 공포는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된 교회에 대한 크고 작은 압박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 차례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절대 진리를 외치다가는 편협하고 꽉 막히고 자기만 맞다고 주장하는 이기적인 광신도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시대와 환경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한다면, 크고 작은 핍박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융통성이라고 말하는 것,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죄라고 말하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비슷하게 살아가며 타협하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의 비난과 조롱을 감수하며 예수님이 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염려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입술을 통해 지혜롭게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진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감격과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런 종류의 핍박은 “내가 제대로 살고 있구나. 내 안에 영생이 있구나”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표지입니다. 우리가 이런 표지를 가진 예수님의 참 제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변에 나이 든 분들이 종종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까 지금이 말세로구만 말세야.” 도대체 말세가 언제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란 예수님의 승천 때부터 재림 사이에 전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이 기간 동안에 계속해서 일어날 일들과 그에 대한 대처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마치 영화 감독이 전체 중에 특정 부분을 줌 인해서 들어가는 것처럼 말세 중에서 특정 시기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십니다. 예수님이 줌 인으로 잡으신 첫번째 시기는 언제일까요?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20)”

바로 예루살렘 멸망의 시기입니다. 기원후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가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피신하고자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침내 로마 군대가 성을 함락시키고 그 안의 모든 자들을 학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끔찍한 지 특별히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더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 수 십만 명이 로마군의 칼날에 죽임을 당할 것이며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에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예고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 날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도성이었던 예루살렘은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것으로 종말을 고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에게 밟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뒤집으면 이방인의 때가 차면 그 후에 예루살렘이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인의 때가 찰 때가 언제입니까?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의 수가 다 차는 날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돌이키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선택하신 백성을 결코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 순서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구원 역사를 중심으로 시간표가 짜여 있습니다.

이 모든 구원의 계획이 다 성취된 후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이제 카메라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시기로 줌 인해 들어갑니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25)”

그때에 온 우주 가운데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곧 이어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다가 너무 무서워서 기절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겪는 산통이 가장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7)”

그때 예수림이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처음 오셨을 때와 많이 다릅니다. 처음 오셨을 때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도록 공개적으로 요란하게 오실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는 겸손하고 초라하게 말구유 위에 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을 부인하던 자들에게는 최악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의 날, 뼈아픈 패배의 날, 처절한 치욕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의 날, 승리의 날,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이 땅의 모든 수고와 근심을 벗어버리는 날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잠시 헤어졌던 사랑하는 성도를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슬픔과 눈물이 씻기는 날입니다. 이 땅에서 낮고 천한 삶을 살았더라도 높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반전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날은 주님을 위해 한 모든 일에 대해 칭찬을 받는 날입니다. 핍박과 고난에 대한 풍성한 보상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는 그분이 약속한 모든 것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성취되는 날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고 살았던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 날이 점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 삶에 진정으로 큰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29,30)”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편이십니까? 둔감한 편이십니까? 저는 둔감한 편입니다. 그런데 식물을 키워 보면 계절 변화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식물에서 싹이 나면 봄이 온 것을, 잎이 무성해지면 여름이 온 것을, 열매가 맺히면 가을이 온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알려면 종말의 징조에 대해 민감해져야 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둔해지면 재림의 징조를 보고도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게 됩니다. 전혀 준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다가 덜컥 예수님이 오시면 큰 낭패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둔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별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34)”

예수님은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를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방탕함과 술취함은 이런 저런 세상의 온갖 재미와 쾌락을 과도하게 탐닉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빠지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영적인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생활의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돈 걱정, 장래 걱정, 자식 걱정, 건강 걱정 등등 계속 걱정만 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재림, 시대의 징조 등에 관심을 둘 수 있겠습니까? 삶의 양상은 서로 다를지라도 결과적으로 마음을 둔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우리는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영적인 감각을 예민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인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깨어 있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36)”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지 않고 항상 예민한 상태로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뜻의 영어 속담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라도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서로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우리 마음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점점 멀어지다 보면 보고 싶은 생각, 그리운 마음도 옅어집니다. 마침내 이렇게 말하게 될지 모릅니다. “예수님, 번거롭게 다시 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면 많이 어색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평소에 예수님 앞에 서는 삶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온라인으로 계속 만난 사람을 오프라인에서도 반갑게 만날 수 있듯이 지금 기도를 계속 해야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재림하신 예수님을 뵈올 때 어색하지 않고 진심으로 “예수님!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종말의 징조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이고 대만에서, 우리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상 한파, 유럽의 이상 고온 등 기후 위기의 징조가 뚜렷합니다. 백두산이 곧 폭발할 가능성이 백 퍼센트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반기독교 정서는 점점 더 팽배해 지고 이것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징조들을 보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지 모르는 이때,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이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쾌락에 빠져있다는 것, 방탕함에 잠겨 있다는 것, 세상에 이 사실을 경고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산다는 것, 생활의 염려에 마음이 둔해져서 세상의 종말에 신경 쓰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깨어 기다리는 삶은 각자 혼자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권면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잠자는 사람이 있나 서로 살펴 보고 깨워줍시다. 무엇보다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냥 만나서 기도합시다. 오프라인이 어려우면 온라인에서라도 수시로 기도합시다. 줌으로 기도하고 카톡방에서도 기도하고 전화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2023년이 시도 때도 없이 항상 기도했던 한 해로 기억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늘 깨어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