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이창무 2023. 2. 1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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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누가복음 제 41 강 / 이창무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 / 누가복음 24:13-35
요절 / 누가복음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T.S.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당신 옆에서 항상 동행하는 그 세 번째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세어보면, 거기에는 당신과 나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눈을 들어 그 하얀 도로를 올려다보면 거기에는 당신 곁에 또 다른 사람이 걷고 있습니다.” 1차 대전으로 황폐해진 황무지 같은 세상 속에서 엘리엇 시인은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동행하는 그 어떤 존재에게 희망을 건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와 동행하던 미지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제 3의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3,14)”

그날은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날은 승리의 날이요 위대한 영광의 날이요 축제의 날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짐을 챙겨 센터를 빠져 나온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슬픔과 절망과 낙심 속에서 엠마오로 낙향하던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입니다. 두 제자는 엠마오로 향해 길을 걸으며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까?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을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토론을 해봐도 결론은 없고 제자리만 맴맴 돌 뿐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두 제자 곁으로 다가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5,16)”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제자가 자기 스승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나요?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셔서 못 알아봤을까요? 말씀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에 의해 가리어져 있을까요? 바로 제자들의 불신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다는 불신이 눈을 가려 코앞에 예수님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야 나! 너희 스승 예수란 말이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어떻게 나를 몰라보느냐?” 하시며 꿀밤을 한 대씩 먹이셨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17)”

예수님은 시치미를 뚝 떼시고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그들에게 넌지시 물어보셨습니다. 십자가 사건도 전혀 모르는 척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은 연기의 달인이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곧바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셨을까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어떤 장애물이 부활 신앙에 이르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지 먼저 들어 보시고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 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잠시 자신의 정체를 감추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아직은 낯선 여행객으로만 알고 있는 예수님 앞에 자신의 속내를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글썽거리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멘탈이 붕괴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들입니다. 왜 그들은 멘붕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까? 19절부터 24절까지 제자들의 말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 상 이제까지 없었던 말씀과 사역 모든 면에서 탁월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바벨론 포로기 이후 600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 가슴 속에 맺힌 독립의 한을 풀어 줄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들려온 빈 무덤 소식은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시신이 도난 당한 것인가?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인가?” 휘몰아치듯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그 사건 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멘탈이 붕괴되는 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간절히 바라고 기대했던 것이 산산조각 났을 때,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는데 갑자기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버렸을 때입니다. 이럴 때는 계속 눈물이 나고 심지어 숨 쉬기조차 힘들게 느껴집니다. 또는 내 삶에 일어난 사건을 도무지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몰라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안개에 휩싸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안 나오고 머리만 아픕니다. 이럴 때 불쑥 다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곳으로 훌쩍 사라지고 싶어집니다. 이런 우리 곁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끙끙 앓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는 인생길에 슬며시 길동무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어 하는 그 순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제 3의 인물인 예수님이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고 먼저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고 이해해 주십니다. 여기서부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해와 공감만으로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25,26)”

예수님은 일단 책망으로 제자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다음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메시아관을 바로 잡아 주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진 메시아관은 무엇입니까? 영광에서 시작해서 영광으로 끝나는 영광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서 막힌 그들은 부활까지 진도를 나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바로 잡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경 공부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을 자기에 관한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시면서 그들이 말씀에 눈을 뜨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

제자들의 마음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길 위에서 예수님과의 성경 공부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목적지인 엠마오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을을 지나쳐 더 가실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자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페인트 동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날이 저물었다는 핑계를 대고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과의 성경 공부를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30)”

이 장면은 어디서 많이 본 듯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에도 비슷한 묘사가 있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실 때에도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애정이 그득 담긴 눈길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빵을 찢어 한 사람 한 사람 그들 앞에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인자하시고 자비로운 주님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다시는 그 모습을 못 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그 모습이 제자들의 눈 앞에서 똑같이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의 마음 속에 강한 스파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31)”

그제야 제자들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처럼 이 땅에 남겨 두고 떠나신 줄 알았던 예수님이 거기 계셨습니다. 죽음에 의해 빼앗겨 버린 줄 알았던 예수님이 거기 계셨습니다. 악에게 패배하신 줄 알았던 예수님이 당당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거기 계셨습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하늘의 어떤 권세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슬픔과 절망에 짓눌려 보지 못하던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밝아지도록 하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 공부와 식탁 교제, 이 두 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성경 공부와 식탁 교제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 모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지금까지 열심히 해 온 것도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뜨거워졌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배 아래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섬김과 사랑의 식탁 교제를 나눌 때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고 여기 임재하시는구나’ 라고 느꼈던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불꽃이 튀듯이 눈이 영적인 눈이 떠지는 것 같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내 삶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말씀의 빛에 의해 조명되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확 들어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지금 내 인생길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 영혼의 온도는 몇 도입니까? 현재 예수님과 우리와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성경 공부를 통해 우리 마음에 불이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도의 교제를 통해 공동체 가운데 임재하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33)”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루 종일 걸어 방금 엠마오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뒤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 밤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35)”

부활의 목격자이자 산 증인으로 이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 두 제자는 슬픔과 절망과 혼돈 속에서 사명도 공동체도 다 버리고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 제자는 기쁨과 희망과 확신 속에서 사명과 공동체를 회복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누리는 축복이자 부활의 능력이 인생 가운데 일으키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그렇게 유명한 제자는 아닙니다. 열두 사도 그룹에 끼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똑같이 소중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믿음이 없어 낙향했으니 더 이상 제자 자격이 없다 하시며 잘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엠마오 행 기차 옆 좌석을 끊고 다가 오셔서 여행길 내내 함께 하셨습니다. 섬세하게 그들의 회복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셔서 인격적 대화를 통해 부활의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회복된 제자들이 하나둘씩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고 초대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저도 그동안 믿음이 없어서 엠마오로 갔다가 예수님께 붙들려 온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저만 갔다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 낙향하고 드러누울 때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한심하다 하시며 가차 없이 우리를 잘라 버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찾아와 대화하시고 성경을 가르쳐 주시고 사랑의 교제를 통해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역의 손과 발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절망과 혼란 속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찾아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말씀을 나누어 주고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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