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이창무 2022. 12. 1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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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4 강 / 이창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말씀 / 누가복음 19:11-27
요절 / 누가복음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오늘 말씀은 흔히 므나 비유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이보다 좀 더 유명한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어 머리 속에서 두 비유가 뒤섞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두 비유는 엄연히 다른 비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므나 비유 속에 담으신 예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11)”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서 말씀을 한참 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을 보니 듣는 척만 할 뿐이지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실현될 것 같은 기대와 설렘으로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면 버림 받고 죽임 당할 것이며 그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만 하면 곧바로 예수님이 왕이 되실 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오해와 착각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열 므나 비유를 더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12)”

여기 한 귀인이 있습니다. 그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납니다. 왕의 자리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좀 생소합니다. 하지만 당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던 청중들에게는 익숙한 내용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식민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 로마 당국의 인준이 있어야만 왕이 되어 유대 땅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헤롯 아겔라오가 황제 아구스도에게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 중에는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50여명의 사절단을 따로 황제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는 헤롯 대왕의 유언을 존중해 아겔라오를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분봉왕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그들에게 친숙한 이 사건을 이용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 속에서 어떤 귀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 나라로 가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통치할 왕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로 올라가실 승천 사건을 가리킵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올라가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나라 국가 대표팀은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 비결이 벤투 감독이 지난 4년 동안 준비해 온 빌드 업 축구라고들 말합니다. 빌드 업 축구란 요행을 바라며 무조건 뻥뻥 내지르는 축구가 아니라 후방부터 패스를 통해 차근차근 전진해 나가는 축구를 말합니다. 이런 축구를 했기 때문에 승패와 상관없이 대표팀이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빌드 업 과정이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예언하시고, 때가 되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속 역사가 완성되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탄생하고, 교회를 통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마침내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완벽한 플랜입니다. 빨리 완성을 보고 싶은 열망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완성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그 비전을 향한 열망이 필요합니다. 그와 동시에 비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빌드 업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다음 세대 리더를 세우자는 것은 전세계 UBF의 기도 제목입니다. 우리의 꿈이요 열망입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헌신이 쌓이고 기도가 쌓이고 필요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꾸준히 빌드 업을 해 나감으로 다음 세대에서 골을 넣고 복음의 승리를 맛보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13)”

비유 속 귀인은 왕위를 받으러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자기의 종들을 부릅니다. 10명의 종에게 전부 열 므나를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명령합니다. 10명이 열 므나를 받았기 때문에 한 사람당 한 므나 씩 받은 것입니다. 한 므나는 백 드라크마이고 약 100일치 임금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천만 원 정도에 해당합니다. 천만 원을 밑천으로 무슨 장사를 할 수 있을까요? 제기 시장에서 붕어빵 장사는 어떨까요? 아니면 유튜버로 수익을 내보면 어떨까요?

이 비유 속에서 ‘종 열’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각자에게 나누어 준 한 므나는 무엇일까요. 므나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의 달란트와 다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렇게 종들에게 각기 다른 달란트를 줍니다. 이것은 재능과 은사의 다양함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므나 비유에서는 모든 종들에게 똑같이 한 므나가 주어집니다. 여기서 므나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하나씩 주어진 한번 뿐인 인생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는 한 번 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해야 할 장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 장사입니다. 장사의 목적인 이윤을 남기는 것이듯이 복음 장사의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받은 영혼을 남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어받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 장사를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돌아오시는 재림의 때까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바로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명을 어떤 환경 속에서 이루어가야 합니까?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14)”

여기에 보면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방해하려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종들이 열심히 장사하는 것을 달가워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든 훼방을 놓으려 할 것입니다. 종들이 사명을 완수하려면 외부의 이런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위축되지 말고 꿋꿋이 장사를 계속해야만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 돌아오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대리하여 복음 장사하는 사람들도 미워합니다. 복음 장사가 망하도록 악담과 저주를 퍼붓고 은밀히 방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에 위축될 필요 없습니다. 화를 내거나 복수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만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 제자 양성의 사명을 계속 묵묵히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유익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이것이 해답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15a)”

귀인이 반드시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아무리 반대하고 훼방을 놓아도 이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왕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27).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반드시 만왕의 왕, 만유의 주님으로서 다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아무도 이 날을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날에 돌아온 주인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15b)”

주인은 자신의 종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각자 나눠주었던 한 므나를 가지고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결산하기를 원합니다. 과연 열 명의 종들은 장사를 잘 했을까요?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16)”

첫 번째 종은 장사를 아주 잘했습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으니 무려 1000%의 수익을 냈습니다. 첫 번째 종은 제기 시장에서 붕어빵 장사를 했습니다. 가게의 이름은 고심 끝에 ‘오병이어’로 정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기성품으로 나오는 통조림 팥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직접 팥을 삶아 정성이 듬뿍 담긴 수제 팥 앙금을 만들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굶고 1교시 수업을 들으러 가는 학생들이 안쓰러워 아침부터 나가서 붕어빵을 팔았습니다. 학생들이 오면 활짝 웃는 모습으로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기말 고사 잘 봐요” “어제 시험 못 봤어도 괜찮아요. 하나 더 줄 테니 이거 먹고 힘내요” ‘오병이어’ 붕어빵 가게의 이름은 금방 소문이 났고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소문을 듣고 경희대에서도 외대에서도 붕어빵을 먹으러 왔습니다. 매출이 점점 늘어나 두 배 세 배의 매출을 올리더니 어느 날 열 배의 매출을 찍었습니다. 마침 그때 주인이 돌아왔던 것입니다. 주인은 첫 번째 종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17)”

주인은 잘하였다고 종을 칭찬합니다. 어떤 점에서 칭찬합니까? 10배나 남긴 것을 칭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것에 대해서 칭찬합니다. 착하다는 것은 주인과의 관계성이 좋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종에게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겨우 천만 원 가지고 무슨 장사를 하라는 말이야 하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붕어빵 장사라고 하찮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이 맡긴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종에게 주인은 열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18,19)”

두 번째로 나온 종 역시 장사를 잘 했습니다. 그는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똑같이 한 므나를 받았는데 왜 이익은 두 배 차이가 났을까요? 그들의 능력 차이에 따라 이런 결과가 발생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두 번째 종도 칭찬했습니다. 첫 번째 종과 비교하며 왜 절반 밖에 이익을 내지 못했냐 하면서 질책하거나 힐난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종에게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두 종의 공통점은 주인의 명령대로 충성했다는 점과 주인은 그들에게 엄청난 보상을 했다는 점입니다. 주인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다고 칭찬했는데 한 므나가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맡게 될 일과 비교해서 아주 작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열 고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준다는 것은 오늘날로 하면 서울시장이나 도지사 정도로 높이 추대하는 것입니다. 종들이 남긴 이윤에 비해 보상이 너무 파격적인지 않습니까?

이것을 통해 주인이 왜 종들에게 장사하라는 방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이 왕이 되어 돌아오게 되면 오자마자 나라의 곳곳을 다스릴 사람을 임명해야 합니다. 주인은 능력 많은 사람보다 주인과 관계성이 좋고 충성스러운 사람을 고위직으로 등용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한 므나 씩 주며 장사하게 하여 그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해 보려 한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장차 우리를 불러 모아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했는지 결산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하루, 한 시간을 가볍게 흘려 보내서는 안 됩니다. 아무 의미 없는 시간으로 그냥 흘려 보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이 끝나지 않았고, 우리에게는 아직 남은 시간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 주님께 충성을 다할 수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받게 될 보상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충성을 보시고 어찌하든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주 신년 스탭 수양회 첫날 목회데이터연구소 지용근 소장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강 말미에 자신이 대학교 3학년 때 연희 센터에서 제자 훈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일대일 목자님이었던 최사무엘 목자님이 직장 생활을 하느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때로는 저녁 식사도 거른 채 매주 밤 9시, 10시에 성경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할 때 울컥하여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또한 최근에 진정주 약사라는 분이 다니엘 기도회라는 곳에 나와 간증을 했는데 유튜브 조회수가 50만이 넘습니다. 다른 센터 목자님의 추천으로 들어보았는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준 UBF 언니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 그런데 그 UBF 언니가 바로 서영미 사모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분들이 이토록 충성스럽게 복음 장사를 하신 것을 한 때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만 기억하겠습니까? 설령 사람은 잊을지라도 주님은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캠퍼스 전도에 동참하고 계신 분들의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요회 목자님들, 부장단 목자님들, 교사 목자님들을 비롯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섬기고 빌드 업하고 계신 분들의 충성과 헌신을 주님은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분명 넘치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며 장차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20)”

여기 또 한 종이 나옵니다. 그는 주인이 맡겼던 것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주인은 분명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했는데 이 종은 그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마땅합니다. 적어도 몸이 아팠다든지 하는 그럴 듯한 변명이라도 늘어 놓을 법합니다. 그런데 이 종은 자기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모든 원인이 주인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1)”

종은 주인이 워낙 엄한 사람이라 내가 무서워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만약 내가 장사에 실패해 본전을 날렸으면 당신이 나를 아주 박살을 내놓을 것이 뻔해서 내가 본전이라도 남겨놓으려 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신은 종들을 착취하는 주인입니다. 당신 같은 악랄한 주인을 위해 내가 열심히 장사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는 말과 같습니다.

종의 말이 맞습니까?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주인은 가혹하게 종들을 몰아세우고, 자기 재산에만 집착하는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 왜 너는 열 므나를 남기지 못했느냐라고 책망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에 엄청난 보상으로 갚아주는 선한 주인입니다. 자기가 왕권을 가지고 돌아올 때 다스릴 권세를 종들에게 기꺼이 나눠주는 은혜로운 주인입니다.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으로 가득 찬 종의 말을 들은 주인은 얼마나 기가 차고 황당하겠습니까?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22,23)”

주인은 종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말합니다. “그래, 어디 너의 말대로 내가 엄한 사람이라고 치자. 정말 네가 나를 그렇게 봤다면, 너는 내 돈을 은행에 맡겨 내가 돌아왔을 때 이자를 함께 찾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에 종은 주인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말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인은 그가 가졌던 한 므나마저 열 므나 가진 사람에게 주도록 합니다(24). 이처럼 주님께 충성된 마음을 없이 게으르고 나태하면이미 받은 축복마저 잃게 됩니다(26).

도대체 이 종은 어떻게 주인을 이렇게 잘못 알고 있을 수 있을까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이 다 자기 같은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의 말은 사실 자기 고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종 자신이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입니다. 장작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주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실패했을 경우 주인의 책망보다 자신이 입게 될 마음의 상처, 자존심의 손상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종은 자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가 다치지 않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실패할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던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 종처럼 실패를 너무너무 두려워합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큰 기대를 품고 뜨거운 열정을 안고 열심히 노력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좋지 않고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이것 때문에 큰 상처를 입고 멘탈이 다 부서졌습니다. 이후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만약 또 실패할 경우 그 충격과 스트레스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안으로 움츠려 들다가 마침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폐인처럼 살게 되기도 합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 허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가, 세상이, 심지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면서 모든 책임을 밖으로 돌리곤 합니다. 그러나 외부로 책임을 돌린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나친 자기 사랑이었기 문제의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란다고 해서 다 그대로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나의 실패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이신 지, 나를 얼마나 축복하기를 원하시는 분인지를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도 하지만 우리의 모든 삶은 선하신 주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해도 실패가 아닙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예수님의 비유에는 농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독특하게도 장사를 소재로 말씀하셨습니다. 농사와 장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러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장사는 농사에 비해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장사하라 하신 것은 주님을 믿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 시도해 보고 도전해 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장사에서 중요한 것은 성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닙니다. ‘얼마나 주님께 충성하는 삶을 살았는가’ 입니다.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떻습니까? 그 덕분에 내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었고 좀 더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면 이미 이 땅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충성스러운 삶으로 주님을 기쁘게 한 사람에게 상상 이상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왕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로 그 기회를 허비하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대신 왕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로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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