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이창무 2022. 12. 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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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3 강 / 이창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19:1-10
요절 / 누가복음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OOO이 OOO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흥민이 손흥민했다’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이 말은 손흥민 선수가 경기에 손흥민 선수 답게 빠른 스피드로 돌진해 들어가 특유의 양발 감아 차기로 골을 넣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김정은이 김정은했다’ 하면 또 미사일을 쏘면서 벼랑 끝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가진 이름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삭개오’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당시 유대인이라면 분명 ‘악질 중의 악질’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그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달려가 나무에 올라갔던 사람” “참된 회개의 대명사” 이런 긍정의 아이콘으로 대부분 그를 떠올릴 것입니다.

어떻게 ‘삭개오’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가 이렇게 반대로 바뀔 수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한 사건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1)”

현재 예수님이 계신 곳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요단 강 동편과 유대 땅을 연결시켜주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많은 상인들과 여행객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기에 관세와 통행세를 걷는 큰 세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길에 이곳을 거쳐 가시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2)”

이곳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히브리어로 ‘순결’이라는 뜻입니다. 삭개오의 부모는 삭개오가 누구보다 순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해서 이런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실제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현재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입니다. 악명 높은 세리들 중에서 또 장이 되기 위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악착같이 세금을 뜯어냈을까요?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대다수 유대인들이 로마의 착취 하에 빈궁하게 살던 시대 삭개오는 더러운 돈을 긁어 모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이런 식으로 조롱했습니다. ‘이름이 순결이야? 웃기고 있네. 앞으로는 불결이라고 불러주마’ 삭개오의 인생은 철저하게 자신의 고귀한 이름을 배반해 온 인생이었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3)”

이런 삭개오가 마침 여리고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왜 보고자 했을까요?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었을까요? 뒤따르는 그의 행동을 보면 호기심이 전부는 아니라 꼭 보고 싶다는 열망이 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삭개오의 열망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세리 출신이 있다는 들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돈만 보고 달려왔고 원하던 돈도 많이 벌었지만 그 과정에서 더 소중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와의 관계를 단절함으로 그를 응징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친구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너무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부르는 그분의 얼굴이라고 꼭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꿈 같은 이야기이겠지만 그분이 나와도 친구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첫째로 삭개오의 키가 너무 작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까치발을 해고 뛰어올라봐야 다른 사람의 등판 구경만 실컷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로 사람이 너무 많아 앞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좀 비켜 달라고 하소연해 봤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은근히 더 밀어내고 가로막았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만 날이냐? 다음에 오자’ 하면서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4)”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예수님 일행이 곧 지나가게 될 지점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중년에 배 나온 키 작은 아저씨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까? 하지만 삭개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돈에만 환장한 사람인 줄만 알았던, 영적인 소원은 눈곱만큼도 없을 것 같았던 삭개오에게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이토록 강할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삭개오의 은밀한 소원을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오직 한 분만이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5)”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예수님이 자기를 보시리라고는 전혀 기대도 예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길을 걸어 가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머리를 들어 나무 위에 있던 삭개오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눈과 삭개오의 눈이 딱 하고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삭개오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야’ 하시며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전에 삭개오를 만난 적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름을 아셨을까요? 참 신비한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으니 속히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다짜고짜 ‘네 집에 좀 같이 가자’ 하시니 너무 일방적인 것 아닐까요?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과 삭개오의 눈빛이 서로 맞부딪치는 순간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마음을 스캔해서 읽어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삭개오는 예수님이 우리 집에 한번 와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인된 죄인 처지에 차마 이 말을 예수님께 먼저 꺼낼 수 없었습니다. 감히 용기 내어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예수님께서 먼저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당혹스러워하기보다는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우리 나라 축구 대표팀이 포르투갈에 2:1로 승리하고 월드컵에 진출한 것만이 반전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삭개오 이야기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 쪽은 항상 삭개오였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한 사람은 삭개오였고, 내외부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나무 위에 오른 사람도 삭개오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삭개오를 전혀 모르시고 특별히 관심 둘 이유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먼저 나무 위의 삭개오를 쳐다보셨습니다. 심지어 오래 전부터 그를 알았다는 듯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당신 집에 유하고 싶소’라고 먼저 말을 꺼내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삭개오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모든 상황을 결정적으로 주도한 쪽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삭개오와 동일한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처음에 우리는 내가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권한 쪽은 목자님이라 하더라도 어찌되었든 온 것은 내 발로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크고 작은 장애물이 엄청 많았는데 거기에 내가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도에 떠난 사람도 많은데 그래도 나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알면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내가 예수님을 찾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나를 찾으셨습니다. 내 발로 온 것은 맞지만 내 발을 이끄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나를 아셨습니다. 언제부터 아셨는가 하면 성경은 창세 전부터 너를 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름을 아시고 먼저 불러 주셨습니다. 내 이름 뿐 아니라 내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다 아셨고, 나의 외로움과 고독을 아셨고, 내 영혼의 깊은 갈망과 소원을 다 아셨습니다. 너무 부끄럽고 송구하여 감히 “함께 해 주십시오” 말할 수 없는 우리 안에 이미 성령님과 함께 들어오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주도하여 이루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가 90장의 가사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내가 예수님을 찾기 전 날 먼저 찾아 오시고 내 이름을 불러 주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

삭개오는 속히 내려오라는 예수님을 말씀 듣자마자 급히 내려왔습니다.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 순간 삭개오는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삭개오는 일평생 돈을 버는 즐거움, 번 돈을 펑펑 쓰는 즐거움이 즐거움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 즐거움을 누릴 만큼 누려봤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즐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도 모두 다 파괴되고 자기 자신마저 파괴시키고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삭개오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즐거움, 참된 행복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행복, 교제하고 사랑하는 행복이었습니다.

아주 넓지만 오가는 사람이 없이 텅 빈 채로 있어 늘 썰렁했던 삭개오의 집은 정말 오랜만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이야기 소리가 끝이지 않고 간간히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찬 공기보다 더 차가왔습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7)”

뭇 사람이란 모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전에는 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는데 이번에는 모두가 예수님의 행동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신 것 자체가 불만의 이유였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죄인 삭개오와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그의 죄에 합당한 응징을 가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응징이 있어야만 삭개오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놓고 이 룰을 깨트리시니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 삭개오 한 사람을 위해 평판이 깎이는 위험, 구설수에 오르는 위험, 비난의 표적이 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이런 위험을 감수할 만한 정도로 삭개오에게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요?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

삭개오는 마치 일어나서 손을 들고 맹세하듯이 자신의 결단 두 가지를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첫째는 자신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유의 20% 정도를 기부하는 것을 경건한 사람의 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무려 50%를 내놓은 것입니다. 둘째는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원래 가치에 1/5을 더해서 배상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단 남의 양이나 소를 도둑질했을 경우 네 배를 갚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삭개오는 종류에 상관없이 최고 기준으로 배상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아마 나머지 절반도 이렇게 배상하고 나면 별로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입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이 어떻게 그 돈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온갖 욕이라는 욕은 다 들어가며 모은 돈인데 아까워서 어떻게 줄 수 있습니까? 게다가 속여 빼앗은 것을 배상하겠다는 것은 ‘제가 불법적으로 남의 돈을 강탈한 적이 많았습니다. 저는 강도이며 도둑놈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도 다 내려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결단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부자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겠습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압박을 주고 왕따를 시키고 비난을 해도 꿈쩍하지 않던 삭개오를 변화시킨 힘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 무슨 특별한 일을 하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삭개오를 영접하시고 삭개오와 함께 하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삭개오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때 삭개오는 돈이 줄 수 있는 만족보다 더 큰 만족,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재물의 신을 우상으로 섬기던 삶을 청산하고 움켜쥐고 있었던 돈을 내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물질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비로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올해 실시한 대학생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고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혼자 해결한다’가 39.2 %로 가장 높았습니다. 또 65%가 어떠한 모임에도 참여하고 있지 않다고 응답해 사회관계가 매우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더불어 수면장애/불안증/우울증 등 정서적 장애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는 비율이 40%로 크게 늘어났습니다. 청년 세대 뿐만 아니라 중장년 세대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더 심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시대 여기저기에 많은 삭개오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정사철 ESF 대표는 먼저 친구가 되라는 해답을 제시하고 구체적 대안으로 공동체로 접근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영접하고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행하신 바로 그 일입니다. 영접하고 함께 하는 것,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심지어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이야기는 영접하고 함께 하는 것에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우상들을 해체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진실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믿고 우리가 먼저 서로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는 관심을 많이 주는 반면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고 친구가 되는 것에 무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자주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나면 따뜻하게 영접해 주고 집으로 오라고 하기도 하고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세상 수많은 삭개오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병든 자가 치유되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잃어버린 자가 돌아오는 역사는 계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

삭개오와 그의 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두 가지를 선포하십니다. 첫째,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이른 것은 실체적으로는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곧 구원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어 들이는 그 순간부터 구원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둘째,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하나님의 백성의 지위를 회복했다고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삭개오를 다시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의 신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한 그에게 이렇게 이웃과의 관계성도 회복시켜 주고자 하십니다.

이제 남은 일은 삭개오의 주변 이웃들이 삭개오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십니다. 이웃들도 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앞선 7절에서 뭇 사람은 삭개오를 가리켜 죄인이라 지칭했습니다. ‘죄인’하면 연관 단어로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처벌, 응징, 격리 등이 연상됩니다. 반면 ‘잃어버린 자’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불쌍하다, 안타깝다, 반드시 다시 찾아야 한다 등이 연상됩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처벌하고 응징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삭개오를 죄인으로 보시기보다 먼저 잃어버린 자로 보십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삭개오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이고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 동전 하나이고 아버지의 집을 잃은 아들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이 삭개오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시고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에게 참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고,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공동체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불결의 대명사로 불리던 삭개오라는 이름을 순결이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한 삭개오가 나중에 혹시 이런 고백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 제가 2017년 썼던 ‘삭개오의 고백’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번 기회에 한번 나눠보고자 합니다.

내가 앞서 달려가기 전에 
그가 먼저 앞서 여리고로 들어오셨다.

나만 그를 볼 줄 알았는데 
그도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가 먼저 내 이름을 알고 불러 주셨다.

내가 했어야 하나 하지 못했던 말을 
그가 먼저 말해 주셨다.

내가 찾은 줄 알았더니
그가 먼저 나를 찾고 계셨다.

영원 전부터, 저 하늘에서부터 
나를 그렇게 찾고 계셨다.

그와의 그런 만남이 
나를 변하게 하였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 하나가 있는데 바로 눈입니다. 삭개오의 눈은 계속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삭개오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주친 예수님의 눈에서 우리를 향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것에 한눈을 팔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을 모른 채 엉뚱한 곳에서 인생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은 잃어버린 자 삭개오를 향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의 눈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찾으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를 외면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이 서로 어긋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주님과 같은 곳을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나를 아시고 내 이름을 불러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세상의 헛된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향하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잃어버린 자들을 향하고 우리가 그들을 찾고 구원하는 일에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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