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창무 2022. 11. 1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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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1 강 / 이창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 / 누가복음 17:20-37
요절 / 누가복음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집중해서 세상을 현재보다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해서 말세의 징조를 찾고 재림을 준비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구 말이 맞나요? 둘 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리고 ‘아직’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20a)”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가 묻습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에 기초해서 하나님 나라가 엄청난 표적과 함께 이 땅에 임할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적이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20b)”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리새인의 기대처럼 눈에 확 띄는 표적과 함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미 은밀하게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구간 아기의 모습으로 조용히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사렛 작은 마을에서 이름 없는 목수의 아들로 삼십 년을 사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중에도 큰 권세와 능력으로 단숨에 세상을 뒤엎는 대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거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으로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이처럼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로 시작해서 마침내 큰 나무가 되는 것, 누룩이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나라의 모습입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1)”

다음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다닐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곧 바리새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말씀하십니다. ‘위선적이고 교만한 바리새인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 안에’라는 말은 ‘너희 마음 속에’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 손 닿는 가까운 곳에’ 또는 ‘너희 사이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여기저기 찾던 바리새인들에게서 손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와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그들 눈 앞에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선포하신 예수님 말씀 그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합니다. 그러나 만약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계속해서 나와는 거리가 먼 나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둘을 마구 섞어 버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일까요? 핵심은 바로 죄사함과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죄사함이 임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후에 하는 것 보고 죄사함을 주시겠다 하지 않으시고 당장 지금 죄사함을 베풀어 주십니다. 또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님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셔서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어지고 또한 그 안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죄의 본성과 연약함이 사라진 몸으로 부활하는 것과 사탄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 최후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또 죄를 짓고 연약하여 넘어지고 죽음의 증상들을 앓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서 빨리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22)”

예수님은 앞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는데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그들에게 인자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되는 날입니다. 제자들은 이 날을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이 날은 열 두 제자들 뿐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정류장에 오래동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십시오. 왜 안 오냐고 욕하는 사람, 중간에 포기하고 그냥 가는 사람, 느긋하게 옆사람과 대화를 즐기는 사람, 버스가 나타나면 먼저 타려고 새치기하는 사람 등등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천태만상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모습도 다양합니다. 예수님은 그 기다림 속에 나타나기 쉬운 두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주의하도록 하십니다. 첫번째는 열광주의입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날을 너희가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당장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너무 조급하게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지 않은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할 것입니다. 만약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한 기대에 들뜨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23)”

예수님은 ‘재림하신 예수가 저기 있다. 여기 있다’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들의 정체가 누구입니까? 바로 신자들을 미혹하는 이단의 세력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신자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고자 하는 악한 자들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아야 합니다. 눈길도 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재림하신 예수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말은 전부 다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왜 거짓입니까?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24)”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을 번개가 내리치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번개가 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또한 순식간에 갑작스럽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처음 오실 때와는 정반대로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오실 것입니다. 신속하게 임하실 것이기 때문에 오시나 싶으면 벌써 와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만 재림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알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거짓에 미혹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25)”

예수님이 승천과 재림에 앞서 무엇을 통과하셔야만 했습니까? 십자가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영광과 승리에 앞서 고난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맞이하기 전까지 수많은 눈물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고 오래 참고 견디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재림에 대해 지나치게 열광적인 사람들 마음 속에는 현실의 고난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심리가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미혹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조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묵묵히 현실의 고난을 참고 인내하면 됩니다. 기다림이 길수록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기쁨도 더욱 커지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열정을 악용하는 이단 세력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신OO입니다. 교주 이OO는 자신을 재림 예수이며 보혜사라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과거 안OO 증인회라고 불렀던 하나님의 교회도 있습니다. 교주 안OO이 죽자 이제는 그의 부인 장OO를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차라리 안전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은밀히 다가와 ‘직통으로 계시를 받는 사도요 선지자가 여기 있다’ 하면서 재림과 종말의 비밀을 알려주겠다 하는 정체 모를 자들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말세의 비밀을 알려 주겠다는 사람은 무조건 멀리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재림과 종말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그 외의 다른 계시나 비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이런 이단이나 거짓 가르침은 얼굴을 바꾸어 가며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서 그 누구도 미혹되지 일이 결코 없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잘못된 반응 두 번째가 무엇일까요? 바로 무관심입니다. 26절부터 30절까지 두 가지 예시를 들어 주십니다. 하나는 노아의 때이고 하나는 롯의 때입니다. 둘 다 무서운 심판이 있었던 때입니다. 노아 시대에는 노아의 가족 8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홍수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롯의 때는 롯과 그의 딸들을 제외하고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던 모든 사람이 비처럼 내리는 불과 유황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노아 시대와 롯의 시대를 비판할 때 주로 그들의 악함과 타락에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무관심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시대 사람들이 일상에 매몰된 나머지 다가올 심판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날에 대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에게 ‘하늘이 이렇게 맑기만 한데 무슨 대홍수냐? 제 정신이냐? 노망이 들었냐?’며 비웃기만 했습니다. 롯의 사위들은 롯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어느 날 생각하지도 못한 때에 심판의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인자의 날에도 그럴 것입니다. 그 날이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평온한 삶을 살 것입니다. 맛집을 찾아가고 비즈니스 미팅을 하고 집을 보러 다니고 내년 여름 여행 계획을 짜고 있을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갑자기 모두에게 임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준비하라고 말하면 코웃음 치면서 비웃을 것입니다. ‘나 바쁘니까 더 이상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다’ 하면서 냉담한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오직 임박한 재앙을 준비한 깨어 있는 소수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제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 들이든 우리는 인자의 날을 소망하며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31,32)”

인자가 올 때 만일 지붕에 있다면 집안에 세간을 가지러 가지 말고 밭에 있다면 집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처가 소돔에 불과 유황이 떨어질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롯의 아내가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요? 소돔에 두고 온 재산에 대한 미련, 그 놈의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를 기억할 때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아주 쿨합니다. 별 관심도 미련도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적인 모든 관심에 대해 쿨합니다. 제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비즈니스도 하지만 거기에 모든 것이 걸린 것처럼 전전긍긍하지는 않습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자세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다시 오실 인자를 영접하기 위한 첫번째 준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쿨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핫한 부분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에 핫해야 할까요?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3)”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영원히 지속될 가치를 지닌 것을 열정적으로 추구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에 진심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등 일상의 일도 열심히 합니다. 단, 부를 쌓고 권력을 쟁취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쓰임 받기 위해 일상의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는 쿨하지만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대해 핫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런 삶을 살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너 참 독특하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넌 별 것 아닌 것처럼 대하고, 어떤 것은 네가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는 반응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제자는 마치 물살의 반대 방향으로 거꾸로 올라가는 연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그래서 상류까지 올라 온 연어는 살이 쪽 빠져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순간에는 다 포기하고 둥둥 떠내려가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둥둥 떠내려가는 물고기는 죽은 물고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살고자 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지느러미를 열심히 휘젓고 젖 먹던 힘을 다해 점프를 시도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겨우 1 미터를 올라갔는데 어느새 다시 90 Cm 뒤로 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 덕분에 10 Cm 전진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로 향한 순례의 여정은 유유자적 하면서 설렁설렁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계속된 투쟁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다시 오실 인자를 영접하기 위한 두번째 준비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인자의 날을 대비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만사 오케이 일까요? 더 생각해 볼 것이 없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4,35)”

밤에 한 자리에 눕는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요? 아마 부부이거나 형제일 것입니다. 또한 함께 맷돌을 갈고 있는 두 여자는 어떤 관계일까요? 아마 가까운 친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자의 날에 한 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가깝다고 해서 친하다고 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자의 날에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 마음은 어떨까요? 데려감을 얻게 되어서 무척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와 친하고 가까웠던 사람이 버려둠을 당하는 것 때문에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것입니다. 같이 데려가고 싶어도 그 시점에는 더 이상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둘이 한 자리에 누웠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의 인생 소감을 들려 주기에 딱 좋은 시간입니다. ‘내가 주를 알기 전에 얼마나 비참한 인생을 살았는가?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얼마나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가?’ 진솔하고 담담하게 들려주면 어떻게 될까요? 상대방이 ‘졸린데 그냥 자자’ 할 수도 있지만 듣고서 복음에 마음을 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둘이 맷돌을 갈면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탤런트 누구랑 가수 누구와 사귄다는 소문이 있다더라’ 이런 이야기만 해서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났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소개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혹시 맷돌 갈다가 감동의 눈물, 회개의 눈물을 콩국물에 섞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혹시 이번 이태원 참사 때 한 경찰관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이동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영상을 보셨습니까? 그 경찰관은 음악 소리에 묻혀 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중에는 높은 곳에 목이 이미 쉰 상태에서 계속 목청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이동해 주십시오.” 저는 그 모습을 보면 여러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연애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 버는 일에 파묻혀 자신의 영혼이 심판이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그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회개하고 구원의 복음을 영접해 주십시오.’라고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10대 때에는 세월호 사건을 겪고 20대 때에는 이태원 참사를 겪은 이 시대 청년들을 향해 “당신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실 목자 예수님이 계십니다”라고 누군가는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하고 죄송했습니다. 맨날 전도가 어려운 이유를 분석만 하고 있었지 목이 쉬도록 복음을 외쳐본 적이 없어 부끄러웠습니다. 아직 종말은 오지 않았고 지금은 골든 타임입니다. 우리가 이때 힘써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 받게 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37)”

제자들은 이런 구원과 심판이 갈리는 일이 일어날 장소가 어디냐고 묻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사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 들듯이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 심판이 뒤따르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깨어 있는 자가 되고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르며 사는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밤이나 낮이나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여기에 살 길이 있다고 외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어느 때에 어느 장소에서 일어나든 별 상관이 없습니다. 늘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오실 때까지 그렇게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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