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

이창무 2022. 11. 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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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0 강 / 이창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

말씀 / 누가복음 17:1-10
요절 / 누가복음 17: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지난 주 토요일 밤 이태원에서 비극적인 참사가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아파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을 도무지 가눌 길이 없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이 10대와 20대이기에 기성세대로서 또 어른으로서 책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작은 자 한 사람에 대한 제자의 책임에 대해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책임에 대해서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감사하게도 그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1a)”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본래 의미는 말 그대로 ‘발이 걸려 넘어지게 할 장애물을 두다’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는 것, 믿음을 잃거나 잘못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을 죄로부터 건져내야 할 사람입니다. 믿음을 갖도록 북돋우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제자도 없고 일부러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들려고 마음 먹은 제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십니다. 실제로 원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사람의 내면이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가 죄에 빠지고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도록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고자 하지만 죄의 유혹에 넘어지고 거짓 진리에 깜빡 속아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서요” “제가 너무 연약해서요.” “워낙 세상이 죄악되다 보니까요 …”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성급히 결론을 내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런 느슨하고 게으른 태도로 실족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1b,2)”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매어 깊은 바다에 던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연자맷돌은 나귀나 소에 연결하여 곡식을 가는데 쓰이는 아주 크고 무거운 돌입니다. 이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지면 어떻게 될까요? 올림픽 수영 금메달 선수라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 주님의 엄중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가 누구입니까? 작은 자란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작은 일에도 믿음이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사람, 특정한 죄 문제에 취약한 사람, 이제 막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해서 배워야할 것이 많은 사람 등 특별한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작은 자들이 누구일까요? 어린 자녀들, 좀 더 확대하면 러너스가 아닐까요? 그들은 아직은 미성숙한 부분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담고 있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다음 세대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해 왔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전용의 예배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교육관을 세웠습니다. 많은 목자님들이 CBF, EBF, JBF의 예배와 양육을 위해 헌신하고 계십니다. 목자님들과 사모님들은 러너스가 서로 풍성한 교제를 나누고 즐겁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지원하고 계십니다. 그 덕분에 넘어졌다 일어났다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조금씩 믿음이 성숙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전 예배 때 러너스가 없으니 좀 허전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러너스가 자립적으로 예배와 모임을 섬기면서 자유롭게 배우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나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혹시나 내가 다음 세대를 실족하게 한 일은 없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에 실망하여 하나님을 완강히 거부하려는 고집을 갖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 받아 교회를 찾아온 한 영혼이 교회 안에서 더 큰 상처와 괴로움을 당하고 좌절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요? 목자요 성경 선생으로서 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양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지는 않았을까요?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해 놓고서 아무 일도 아닌 하찮은 일로 치부한 것은 아닐까요? “겨우 이만한 일로 실족하는 네가 문제다.” “내 성격이 원래 그렇고 내 말투가 원래 이 모양이고 자라온 환경이 그런 것인데 이 정도도 못 받아주냐?” 하면서 도리어 실족한 사람을 탓하지 않았나요?

이런 질문들 자체가 우리 마음을 아프고 무겁게 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물어야 할 질문들입니다. 왜냐하면 병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먼저 병의 심각성부터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연약하고 어린 성도를 바른 길에서 미끄러지게 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계속 누적이 되면 오랜 세월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 삶을 낭비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런 사태를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3a)”

첫째로 우리가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내가 먼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나를 끊임 없이 유혹하고 넘어뜨리려 하는 사탄 마귀가 쳐 놓은 덫이 있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방심하고 있다가 순식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나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고 매사에 함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자유가 혹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지 주위를 잘 살펴야 합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3b)”

둘째로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이제는 반대로 실족하게 하는 일을 당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지체가 범한 죄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가령 뒤에서 욕하거나 헛소문을 내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또는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여 모두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낙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사소한 잘못이나 무심결에 지은 죄를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형제의 죄가 중대하고 공동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에는 일방적인 용서만으로는 해결이 되기 않습니다. 이런 때조차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 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결국 그것이 나와 형제 사이를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고 잊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으로 남게 됩니다. 이것은 사랑으로 허물을 덮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다루는 것을 회피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럴 때 먼저 그에게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경고’란 솔직하고 부드러운 책망을 가리킵니다. 분을 이기지 못하여 짜증난 상태에서 상대방을 잘못을 들추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책망하지만 예의를 갖추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그 형제가 죄에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경고해 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죄를 일깨워주는 것은 그 형제가 짊어져야 할 짐을 내가 나누어 지는 사랑의 행동입니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3c)”

셋째로 형제가 회개하거든 즉시 용서해야 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자의식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만 해도 자기를 험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만약 진심으로 회개했는데도 용서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의에 빠져서 실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한 형제를 뜨거운 사랑으로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형제의 죄를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4)”

예수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사실상 무한정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하루에 일곱 번 죄짓는 사람은 없겠지만 죄의 습성이 몸에 배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진심으로 회개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또 그때마다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하는 척만 하면 안 됩니다. 일단 용서했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의 잘못을 기억하거나 증오심을 품거나 보상을 요구하거나 보복하겠다는 일체의 생각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입니다.

교통사고를 제외하고 10년째 대한민국 국민의 사망 원인 1위인 질병이 무엇일까요? 예상하시는 대로 바로 암입니다. 암의 특징은 암을 일으키는 세포가 우리 몸 밖이 아니라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암세포를 내버려 두면 온 몸에 퍼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죄는 마치 암세포와 같습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한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는 계속해서 번져 나가 가족과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죄 문제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배려와 관심과 용서로 서로의 죄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이것이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전부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도는 항상 이런 공동체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시대 정신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동체주의보다는 개인주의가 점점 더 팽배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마저도 이런 흐름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죄 문제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방식대로 다루는 것을 피곤해 합니다. “나는 내 맘대로 살고 싶다. 내가 왜 다른 사람을 의식해야 하는냐?” “남이 죄를 짓든 말든 난 신경 쓰지 않겠다.” “내가 왜 용서를 해주어야 하나? 용서 하느니 차라리 얼굴을 안 보고 살겠다.” 이런 식입니다. 대세가 이렇게 가고 있으니 편승하는 수 밖에 없을까요?

그러나 신약 성경은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몸에 속한 지체들입니다. 우리 몸의 조직과 기관이 연결되어 서로를 의지하고 있듯이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 가을 수양회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일인가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죄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그 소중한 지체 중 하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내버려두면 곧 이어 다른 지체에게 번져 나가게 되고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스란히 모두에게 큰 피해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입니다. 형제 자매의 죄 문제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동시에 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죄 문제부터 철저하게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지제들의 죄 문제를 나 몰라라 할 수 없고 때로는 부드러운 권면과 책망으로 때로는 용서와 사랑으로 함께 씨름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모이고 쌓일 때 우리는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 사랑과 용서가 흐르는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5)”

제자들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지 듣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연자맷돌을 매고 줄줄이 바다에 빠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하라는 말씀을 듣고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한 번 용서해 주기도 너무 힘든데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제자들은 예수님께 구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런 일을 하려면 태산만한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

예수님은 태산만한 큰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양보다 믿음의 질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보십니다. 겨자씨 한 알처럼 비록 아주 작을지 언정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참된 믿음이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은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뽕나무의 특징은 뿌리가 깊고 넓게 박혀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뽑을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어도 그런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바다에 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필 뽕나무를 뽑는 일로 비유하셨을까요? 앞에서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죄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렇다면 뽕나무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죄성(죄를 짓게 하는 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성이 사람 마음 속에 얼마나 깊숙이 그리고 폭넓게 뿌리내리고 있는가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도 나로 인해 실족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또 실족하게 했을 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탄식하게 됩니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 그에 못지 않게 변하지 않는 너의 모습을 보며 절망하게 됩니다. 매번 똑같은 죄를 짓고 또 회개한다고 했을 때 “정말 회개한 것이 맞을까? 이번에도 용서해 주었다가 또 뒤통수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힘도 없고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지 않고 살아갈 자신도 없습니다. 나의 죄든 다른 사람의 죄든 죄 문제를 다루는 것은 너무 어렵고 고달픈 일이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태산 같은 믿음은 없어도 이만한 믿음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에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신 것과 장차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일단 말부터 달라집니다. 더 이상 “안 될 거야. 못할 거야. 힘들어”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 될 수 있다. 변할 수 있다.” 긍정적인 말, 도전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 말 그대로 도저히 뽑힐 것 같은 죄의 뿌리가 뽑혀 나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던 용서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변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 사랑과 용서가 흐르는 공동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건강한 공동체! 믿음만 있다면 환상이나 꿈이 아닙니다. 대단한 믿음이 아니어도 됩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작은 믿음만 있으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렛대의 원리와 같습니다. 지렛대가 있으면 작은 힘으로도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친히 우리의 지렛대가 되어 주셔서 우리의 작은 믿음으로 큰 일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긍정적인 말, 소망의 말,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 말한 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 삶 속에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큰 일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이룬 뒤에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7절부터 9절까지 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습니다. 그 종은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일어나 “종님,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어서 와서 잡수십시오”라고 할 주인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에 서빙을 한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습니까? 종이 주인이 명한 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사례하겠습니까?

이 비유가 깨우쳐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0)”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 비유에 나오는 종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앞으로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 사랑과 용서가 흐르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모든 일을 이루 후에 이렇게 말하라 하십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다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무익하다니요? 너무 심한 것 아닐까요? 그래도 조금은 쓸모 있는 종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 종은 쓸모 있는 종이 맞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칭찬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진짜 쓸모 있는 종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쓸모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진짜 효자는 자신이 늘 불효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그 무수한 돌봄과 그 많은 사랑에 비하면 내가 부모님께 해 드리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당신 같은 효자 없다고 해도 정작 효자의 18번은 아이러니하게도 ‘불효자는 웁니다’ 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 노릇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지난 가을 수양회 주제강의 말씀처럼 주의 집에 거하는 것 그 자체가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성한 후에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죽도록 충성하고 나서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게 된 것으로 이미 분에 넘치는 보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뿌리 뽑아야 할 은밀한 뽕나무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보상 심리입니다. 이 정도 했으니 이 정도 보상은 받아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이런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작은 일에도 섭섭하고 분노가 생기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 보상 심리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 해 놓고 시험에 들고 마침내 실족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마음을 뿌리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상관없이 주님께 충성스러운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비유 속 주인과 달리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제자 공동체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공동체, 용서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 겸손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살아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우리 안에 박힌 죄의 뿌리를 뽑는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에 주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 쓰임 받은 후 나는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는 충성된 종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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