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복이 있는 사람

이창무 2022. 8. 1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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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0-2 강 / 이창무

복이 있는 사람

말씀 / 누가복음 11:27-36
요절 / 누가복음 11: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흔히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기복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기복 신앙’이란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원하는 믿음이라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자체로 잘못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복 받기를 구해야 하지, 그럼 뭐 저주 받기를 구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복 받기를 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엉뚱한 복을 구하는 것에 있습니다. 누가 진정 복 있는 사람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27)”

여기서 이 말씀이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는다는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셨던 말씀을 가리킵니다. 열띤 논쟁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한 여인이 불쑥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이 여인은 왕년에 시를 좋아했던 문학 소녀였던 것 같습니다. 이 표현을 쉽게 바꾸면 “당신 같이 위대한 분을 낳은 어머니는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인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 여인이 지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인은 단숨에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내어쫓으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고 크게 놀랐습니다. 게다가 악의적인 공격에 침착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하시는 예수님의 지혜에 더욱 놀랐습니다. 아마 이 여인에게도 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예수님처럼 능력과 지혜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아들이 큰 인물이 되길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이 너무 부러운 나머지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에 있던 말을 밖으로 불쑥 꺼내게 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28)”

‘오히려’ 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여인의 말을 일정 부분 긍정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을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마리아 자신도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찬양했습니다. 메시아의 모친이 된 마리아가 큰 복을 받은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는 좋은 마음 밭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완고하게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 골라서 듣거나 피상적인 기쁨이나 감정적인 만족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집중하고 그 외에 다른 것에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듣고 순종할 준비가 된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 밭에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면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합니다.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점점 닮아가고, 내면 세계가 안정되고 질서가 생깁니다. 말씀이 힘이 되어 세상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는 승리자가 됩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자녀가 잘 되고 큰 인물이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복 받은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잘 나간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좀 부족하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 그것 만으로 얼마든지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 신학 교수님으로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의 장인 장모님은 믿음이 신실하신 분들인데 그분들에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강남에서 성형외과 원장을 하던 아들을 무조건 감싸고 편든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신앙을 버렸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 여자와 결혼했고, 사람들을 무시하고 돈만 밝히는 아주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인 장모가 이런 아들을 항상 두둔하고 자랑스러워 할 뿐 아무런 훈계도 하지 않아 무척 답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 아들의 아내가 전 재산을 챙겨서 태국으로 도주를 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동성의 애인과 함께 도망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아들은 죽으려고 한강 다리 위까지 갔습니다. 문득 이 근처에 젊을 때 다니던 교회가 있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 교회에 한번만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예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고 그날 설교 말씀이 그에게 힘있게 역사했습니다.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린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처럼 모든 예배에 다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또 병원에 제일 먼저 나와서 청소를 하고 모든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이 적응을 못하겠으니 그만 하시라고 말릴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이 일을 계기로 교수님의 장인 장모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더 가치 있게 여겼던 죄를 깊이 회개하셨다고 합니다.

이번 우리 여름수양회에서 러너스 가운데 열 아홉 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소감과 인생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양적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질적으로도 수준이 높았습니다. 한편 한편마다 말씀 앞에서 자기 발견과 말씀을 통한 열매가 담겨 있어서 큰 은혜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자 하는 러너스 형제 자매들이 있다는 것!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에게 이런 큰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분명한 기도 제목이 생깁니다. 러너스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여기고 말씀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모 세대는 자녀의 성공에 너무 얽매이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대신 다른 것을 추구하면 어떻게 될까요?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29)”

예수님은 그 세대의 사람들을 향해 악한 세대라고 표현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세대가 말씀이 아닌 표적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왜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악한 일이라고 하셨을까요? 표적을 구한 일 자체가 죄라기 보다는 그런 행위가 보여주는 그들의 마음 상태 때문입니다. 원어로 보면 ‘악하다’는 단어가 34절에 ‘눈이 나쁘다’고 했을 때 ‘나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곧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본래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망가졌다. 고장 났다.”는 뜻입니다. 고장 난 차에 기름을 주유해 본들 차가 움직일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마음이 고장 난 사람에게 표적을 더 보여준다고 해서 믿음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다 소용 없는 짓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더 이상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일까요? 요나서에 보면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가 그곳 사람들에게 무슨 특별한 기적을 보여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믿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요나의 전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30)”

예수님은 요나 자체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 국가였습니다. 잔혹한 통치로 무고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수도 없이 학살한 나라입니다. 니느웨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임할 재앙을 경고하고 그들에게 살아날 길을 알려주기 위해 요나라는 사람이 왔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다른 데도 아닌 바로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가 구원의 길을 알려 주기 위해 여기 왔다는 것 그 자체, 요나의 존재 자체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놀라운 소식이었고 충분한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라고 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일, 물 위로 걸어오신 사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등등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런 일들이 다 표적입니다. 하지만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표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었습니다. 심판 받고 버림 받아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나는 억지로 하는 수 없이 니느웨에 왔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표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소식, 더 큰 표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큰 표적을 보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완고하게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은 거절의 결과를 두 가지 구약의 사건을 들어 경고하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31)”

첫번째 사건은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찾아왔던 사건입니다. 남방 여왕은 열왕기 10장에 나오는 스바 여왕을 가리킵니다. 스바는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멘 지역으로 이스라엘에서 봤을 때 남쪽의 땅끝입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왔습니다. 굳이 그것을 확인하려고 그 먼 길을 가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바 여왕은 진리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고 마침내 진리를 찾았습니다.

사람들 앞에 지금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계십니다.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 솔로몬의 지혜의 근원 되시는 분이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멀리 있어서 찾으러 가야 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 오셔서 여기 계십니다. 그들 곁에서 지혜의 말씀을 쏟아 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남방 여왕이 답답하다는 듯 일어나서 유대인들을 정죄하지 않겠습니까?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32)”

두번째 사건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사건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분명 하나님이 삼일 동안 전하라 하셨는데 요나는 딱 하루만 전했습니다. 그것도 모기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전했습니다. “이 성이 무너진대요. 그러니 회개하시든가 말든가” 신 구약 통틀어 이렇게 건성으로 전도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성실한 전도를 듣고서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습니다. 성안 모든 사람이 회개했고 심지어 짐승까지 금식을 시켰습니다. 요나는 이 모습을 보고 ‘왜 회개하냐’고 화를 냈습니다.

사람들 앞에 지금 요나보다 큰 이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요나와는 정반대로 간절하게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는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큰 소리로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니느웨 사람들이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오히려 그들을 정죄하지 않겠습니까?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둘 다 이방인이라는 점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복과 거리가 먼 사람들, 아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는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점입니다. 말씀이 얼마나 귀한 줄 알았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진리와 구원이라는 축복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반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복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자손이었고 말씀을 맡은 특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직접 들었고 능력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무관심했고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을 추구하고 싶을 뿐 자신을 쳐서 말씀에 복종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복은 더 큰 수치와 심판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들보다 훨씬 더 복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알았고 구약 말씀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이 계시된 신 구약 말씀 전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여름 수양회를 통해 증명되었듯이 특히 우리 가운데 빼어난 말씀의 종들이 정말 많이 계십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얼마나 마음을 다해 말씀을 준비하셨는지 모릅니다. 유튜브에 수많은 설교 영상이 넘쳐 나지만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웃고 운 목자님들이 전한 메시지와 같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감동과 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 안암1부는 유명하지도 않고 큰 교회도 아니고 건물이 화려하지도 않지만 뭐 어떻습니까? 이런 표적이 꼭 필요합니까? 예수님의 복음이 살아 있고 복음이 중심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듣는다고 해서 다 잘 나가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나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잘 되기도 하지만 잘 안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씀이 주는 행복, 말씀이 주는 기쁨이 우리 가운데 있으니 우리는 복 받은 사람임이 틀림 없습니다. 만약 이 복이 얼마나 귀한 지 모르고 무시한다면 우리 또한 스바 여왕으로부터 니느웨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인정과 이목을 끌 수 있는 표적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더욱 더 말씀을 가까이 하고 복음에 순종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등불의 비유를 통해 긴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자 결론을 말씀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33)”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켰습니다. 왜 켰을까요? 어두움을 밝혀 사람들이 빛을 보게 하기 위함 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등불을 두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기껏 등불을 켜서 움 속이나 말 아래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움이란 물건을 쌓아 두는 창고를, 말은 곡식을 담는 그릇을 가리킵니다. 등불을 이런 움 속이나 말 아래 두면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밝히 보려면 등불의 빛을 가리는 것부터 치워야 합니다. 그런데 밝히 보기 위한 또 다른 중요 요소가 있습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34)”

마치 밤길에서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야 앞을 볼 수 있듯이, 고대인들은 눈에서 빛이 나와서 사물을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몸에서 등불 역할을 하는 것이 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두 가지 상태의 눈이 있습니다. 먼저 성한 눈 곧 건강한 눈, 제 기능을 다 하는 눈이 있습니다. 눈이 성하다면 잘 볼 수 있습니다. 멀리서도 사람을 먼저 알아보고 인사할 수 있고, 길도 잘 찾아갈 수 있고, 작은 글씨까지 거침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쁜 눈, 곧 병든 눈, 기능을 상실한 눈이 있습니다. 눈이 나쁘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처럼 친아들도 구분이 안 돼서 엉뚱한 사람에게 축복을 주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힘들어지고, 스마트폰도 폰트 크기를 최대로 조절해야 합니다. 이처럼 밝히 보기 위한 두번째 요소는 눈이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실내 인테리어에서 조명의 중요성이나 시력 보호의 중요성을 교훈하시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사람들이 왜 영적인 무지와 어두움에 빠지게 되는지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여러 표적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놀랐기는 했지만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았지만 귀신의 짓이라고 사실을 왜곡했습니다. 그들은 들었지만 시험하기 위한 표적을 구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입니까? 무언가 그들의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거나 마음의 눈이 병들어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욕망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교만해서 눈에 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의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문제일까요? 당시 유대인들만의 문제일까요? 양의 문제이고 자녀의 문제이고 배우자의 문제일까요?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

예수님은 먼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하십니다. 말씀에 대한 나의 태도와 마음 상태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성찰하고 점검해서 바로 잡게 된다면, 나의 영적인 눈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6)”

말씀을 듣는 자세가 올바르게 된다면 등불의 빛이 나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시력이 좋아지면 무엇이 보이기 시작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 가운데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두신 소망이 얼마나 큰 지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담김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지가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 지가 보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감격스럽고 가슴이 뛰고 설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고백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나의 힘입니다. 성도의 교제와 사명이 나의 힘입니다. 오직 십자가가 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전혀 빈약하지 않습니다. 크고도 풍성하고 경이롭습니다. 다만 우리 눈이 성치 못하여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이것입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해 외쳤던 간구, 바로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입니다. 주님께 우리 눈을 고쳐 달라고 간구합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편견 없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지 않기를, 온전한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참된 복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에 있음을 깨닫고 실천함으로 복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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