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이창무 2022. 8. 2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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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1 강 / 이창무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말씀 / 누가복음 12:1-12
요절 / 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미국의 소설가 러브크래프트는 두려움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은 참 다양합니다. 좁은 공간을 두려워하는 폐소공포증, 넓은 장소를 두려워하는 광장공포증,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하는 비행공포증 등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외에도 뾰족한 것만 보면 기겁하는 첨단공포증, 길이가 긴 단어를 보면 두려움을 느끼는 긴 단어 공포증, 동그란 무늬를 보면 공포에 휩싸이는 환공포증 등등 별별 공포증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두려운가요? 혹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할 대상이 누구일까요?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1a)”

여느 때처럼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였는데 그 수가 수만 명이나 되어 서로 밟힐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BTS, 아이유 못지않았습니다. 과거 갈릴리 촌구석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았던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있다가 덩달아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자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우리도 공인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말투부터 변했습니다. 좀 전까지 ‘어이, 베드로! 뻥치지 마.’ 이러던 제자들이 ‘베드로 형제! 이제 과장된 표현은 삼가고 체통을 지키셔야 하지 않겠소.’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몰려드는 무리들보다도 조금씩 변해가는 제자들이 더 걱정스러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b)”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외식을 주의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외식은 본래 배우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배우가 어떤 배역을 연기할 때 정말 그 사람인 것처럼 꾸며서 관객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사람들의 보는 눈이 많아지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보여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먼저 생각하기 쉽습니다. 진짜 나를 숨기고 좋은 이미지를 주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얻고자 하게 됩니다. 이렇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겉만 그럴 듯 하게 꾸미는 것, 이것이 외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째서 이 외식을 바리새인들의 누룩으로 비유하셨을까요?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외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외식은 누룩과 비슷한 점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 전체를 크게 부풀게 합니다. 이처럼 외식은 우리 삶에 침투해서 삶 전반에 퍼져 우리를 실제 모습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그저 남들의 평가에 의해 부풀려진 거품이고 껍데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삶에 이렇게 외식하려는 모습이 있는지 주의하여 지켜보고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외식에서 벗어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2,3)”

무엇을 감추고 숨기겠습니까? 나의 부끄러운 본 모습과 그 모습에서 나온 말과 행동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꽁꽁 싸매서 철저하게 숨기려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 동안 사람들이 속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이 광명한 곳에서 들릴 것입니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될 것입니다. 영원한 비밀은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참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경찰 고위직에 임명된 한 분의 과거 논란이 뜨겁습니다. 수십년 전 밀정 노릇을 했고 그 보상으로 특채가 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걸그룹 멤버는 과거 학교 폭력 사건의 가해자였다는 폭로가 이어졌습니다. 결국 데뷔한 지 두 달이 못 되어 자진하차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비슷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제는 잊혀졌고 아무도 모를 것 같지만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인간 세상 속에서는 우연한 계기로 불쑥 진실이 드러나고 그 동안 쓰고 있었던 위선의 가면이 한꺼번에 벗겨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물론 요행히 이런 일이 현실화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체를 감추며 위선자로 살아가는데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1,12)”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총결산하는 그 날에 하나님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감춰두고 숨겨두어 봐야 일시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꾸며낸 겸손과 경건으로 사람들 앞에서 훌륭한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아봐야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불꽃 같은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다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는 날이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그토록 신경 쓰고 그들의 기준과 기대에 부응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을까요? 외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외식의 뿌리는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외식에 빠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에 민감합니다.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인 경우가 많습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고 좌절하고 괴로워합니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 나의 행동을 규정하는 기준이 내 앞에 서 있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 의해 내 삶을 규정짓습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이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과 같은 고가의 제품을 테이블 위에 두고 화장실에 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기 나라에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 한국인을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CCTV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오지랖이 넓은 주위 한국 사람이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한국 사회는 이렇게 유독 남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덕분에 질서가 유지되는 면이 있습니다. 동시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습니다. 명예를 잃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 눈치보고 분위기 파악하느라 힘이 듭니다. 이런 스트레스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일탈 행위로 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익명이 확실하게 보장된 공간에서 한국인들은 순식간에 개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가진 양면성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이런 양면성을 보이기 쉽습니다. 교회 사람들의 압박이 강할 때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마음이 없더라도 열심히 합니다. 칭찬은 못 듣는다 해도 적어도 욕 먹을 짓은 안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압박이 없으면 안 합니다. 싫은 소리하는 사람이 없으면 손을 놔 버립니다. 아니면 안 하고 싶어서 성도들의 시선을 피해 사적인 영역으로 숨어 버립니다. 무엇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모든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그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3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 죄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사람을 두고 살기 시작한 이후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있는 때 내 모습과 혼자 있을 때 내 모습이 다른 두 얼굴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외식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바뀐 것을 제자리로 돌려 놓으려 하십니다. 외식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4)”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마치 친구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충고를 해 주듯이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몸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을 해치려 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생명의 위협이 아니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람, 내 인생길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 그들은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어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사실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이 많은 한 인간이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알고 보면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겁주는 이유가 자신들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허세요 허풍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다 알아도 우리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주시는 해답은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습니다. 바로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그분이 누구일까요?

첫째,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5)”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할 분은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그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실 권세가 있으신 분, 이생 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제자들의 생명을 빼앗을 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자들의 목숨을 뺏는 자들을 영원히 지옥에 보내는 권세가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니 그분만 두려워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람들은 너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너를 지옥에 보낼 수 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내용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마치 ‘제가 더 무서워? 내가 더 무서워?’라는 식의 강압적인 협박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전혀 그런 뉘앙스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6)”

당시 시장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삼 천원 정도에 팔렸습니다. 원래 참새 두 마리 가격이 한 앗사리온입니다. 그런데 네 마리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얹어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팔린 것입니다. 이처럼 참새 한 마리는 길거리에 사 먹는 붕어빵 같은 하찮은 간식 거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한 마리도 하찮게 여겨지지 않고 잊어버리신 바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7)”

지금 내 머리에 난 털이 몇 가닥인지 알고 계십니까? 수시로 빠지고 다시 나기 때문에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아예 셀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한 가닥 씩 일일이 세신 후 ‘네 머리카락이 97,645개로구나. 어제보다 261개가 줄었구나’ 하십니다. 그 정도로 우리 각 사람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미물인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얼마나 더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내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장님에 대한 두려움은 부장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더 큰 권세를 가지신 부장님이 나를 지지하신다면 과장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권세는 지극히 미약하고 한계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으실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한 어느 누구도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진실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성자 예수님을 두려워하라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8,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천사들 앞에서 너희들을 시인할 것이고, 만약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천사들 앞에서 너희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시인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현재의 일이고, 예수님이 시인하거나 부정하시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현재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랜트 오스본이라는 주석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고 다른 이들과 복음을 나눌 기회를 찾으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정의의 편에 서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다” 반면 현재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스본은 이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기를 바라거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침묵한 채 사회의 비기독교적 문화의 가치체계를 수용하고 거기에 흡수되는 것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을 내버리고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교회 안에서는 위선으로 나타난다면 교회 밖에서는 소위 말하는 두더지 신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 당하고 소외 당할까 두려워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숨기려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이 잠시 박해를 모면하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아주 심각한 사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이 수많은 천사들 앞에서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큰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듣고 잠시 미움 받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말씀 공부 중에 사람을 두려워하느냐는 질문에 한 형제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고요 오래 볼 사람은 두려워하고 잠깐 볼 사람은 별로 두렵지 않아요” 우리가 가장 오래 보게 될 분, 죽음 이후에도 계속 보게 될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입니다. 이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잠깐 볼 사람,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두려워하고 사람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예수님께 충성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나를 아시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만나 영원히 함께 거할 그날을 소망하는 가운데 지금 이곳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0)”

예수님은 누구든지 말로 예수님을 거역한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용서 받았고, 무지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사도 바울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고의적으로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내어 쫓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일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 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에 비해 성령 하나님은 좀 만만한 분으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큰 착각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거부하고 도리어 비난만 일삼는다면 결국 용서받지 못하고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반면 성령님을 경외하는 사람, 성령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11,12)”

그런 사람은 권력자 앞에 끌려 갔을 때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할 말을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좋은 예입니다. 그가 대제사장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인 장본인이라 담대히 말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의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들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가방 끈이 짧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탁월한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냐며 의아해 했습니다. 그 원동력은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님이 그를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두려워하고 그 인도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을 성령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자기도 모르게 용기가 나고 담대함이 생기고 전에 없던 지혜가 솟아납니다.

결국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교회 안에서는 위선자가 되고 교회 밖에는 겁쟁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눈치 보며 가면을 쓰고 사람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은 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할 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진실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담대함과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 없이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진리를 증언하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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