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더 강한 자 예수님

이창무 2022. 7. 3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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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0 강 / 이창무

더 강한 자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11:14-26
요절 / 누가복음 11:21,22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회색 지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중간 지대 또는 제 3 지대라고도 부릅니다. 회색 지대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범위를 가리킵니다. 좋게 표현하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을 의미합니다. 국제 정치에서는 여러 강대국들의 세력권에 명확히 속해 있지 않은 지역을 말할 때 종종 사용합니다. 그런데 과연 신앙의 영역에서도 회색 지대가 존재할까요? 완전히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예수님께 헌신한 것도 아닌 어중간한 회색 지대가 있을까요? 가능성 여부를 뒤로 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색 지대에 있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다 누리고 또 하나님 안에서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다 누리고 싶어 합니다. 아주 지혜로운 선택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도 무시를 당하고 하나님 안에서도 아무런 열매 맺지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14a)”

귀신이 말을 못하게 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코로나에 감염되었을 때 목이 붓고 아파서 제대로 말이 안 나왔습니다. 목 아픈 것도 힘들지만 말 못하는 것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잠깐 동안도 이렇게 힘든데 이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오랫동안 막혀 있는 말문이 트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투 머치 토커로 유명한 박찬호 선수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사람들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14b)”

첫번째로 어떤 이들은 놀랍게 여겼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를 외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병 고침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놀라는 반응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놀라움이 그저 놀라움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때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반응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15)”

두번째로 어떤 이들은 강하게 의혹제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알세불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알세불이란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일컫는 별명입니다. 그러니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런 기적을 행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가리켜 사탄 마귀의 하수인라고 말한 셈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질 낮은 모욕입니까? 진실을 완전히 정반대로 뒤집어 버리는 심각한 왜곡입니다. 정말 터무니없고 논할 가치조차 없는 거짓 뉴스입니다. 성경은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정작 사탄의 똘마니 노릇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인데 거꾸로 예수님에게 이런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있으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도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든 사사건건 닥치고 반대만 하려다 보니 이들이 이런 무리수를 두게 된 것입니다.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16)”

세번째로 어떤 이들은 더 큰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말 못하던 사람을 말하게 만드는 것으로는 이 프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적극적인 지지도 적극적인 반대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보다 더 위대한 표적을 보여주신다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한번 재고해 볼 수 여지도 있겠다는 식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정말 표적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들에게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도대체 또 무슨 표적이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더 큰 표적을 보여주어 봐야 그 다음 또 다른 표적을 구할 것이 뻔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경험이 또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의 완고한 마음, 교만한 마음부터 부서지고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보고 어떤 사람은 지지하고 어떤 사람은 공격하고 어떤 사람은 판단을 유보했습니다. 사람들 모두 똑 같은 일을 경험하고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 부류의 반응으로 나뉘어진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사실 자체보다도 사건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마음의 눈이 맑고 투명하면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빨간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이고 노란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보이듯 마음의 눈에 덧 칠이 되어 있으면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눈 앞에 놓인 명백한 증거까지 부인하고 진실을 왜곡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만 제대로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10여년 전 가수 타블로에 대한 학력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3년이나 계속된 논쟁 속에서 그는 자신의 여권, 성적증명서, 당시 다른 재학생의 인터뷰 등등을 제시했지만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짜로 만들어 낸 허구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방송에서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거잖아요.’라고 절규했습니다. 그에게 의혹을 제기했던 30만명의 사람들이 모였던 카페의 이름이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실을 반대하는 사람, 진실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저도 한때 인터넷에서 접하게 된 음모론에 심취한 적이 있습니다. 전세계는 프리메이슨이 장악하고 있고 정치 지도자들 뒤에는 이들을 배후 조종하는 그림자 정부가 있다고 확신했었습니다. 한번 이렇게 보기 시작하니까 세상 모든 일들이 다 여기에 딱딱 끼워 맞춰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만 진실을 알고 있고 주변 사람들이 다 거짓에 속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정신차리고 보니 이상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았던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에게 아무리 증거를 보여주고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고 설득을 해도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만 답답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너무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너무나 명백한데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수많은 증거들을 보여 주어도 도무지 믿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탄의 앞잡이라는 정말 참기 힘든 악선전에 시달리셨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아직 많이 부족하니 더 센 것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얄밉습니까? 만약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명예훼손죄, 모욕죄로 검찰에 고발해서 싹 다 콩밥을 먹게 했을 것 같습니다. 민사 소송까지 걸어서 위자료를 받아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을 설득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견고하게 굳은 그들의 마음을 어떡하든 풀어주기 위해 친히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17,18)”

예수님은 먼저 귀신의 왕이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답이 없는 나라로 손꼽히는 나라가 소말리아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습니까? 장기간 내전을 겪었고 지금도 내전 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 사실이라면 사탄의 왕국은 벌써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일사불란하게 일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든 누구든 사탄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19)”

두번째 반박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서’와 같은 문헌들을 보면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퇴마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초를 만들고 귀신을 쫓아내는 주문을 외웠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느냐 묻는다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똑 같은 일을 하는데 자기 편은 하나님의 힘이고 예수님은 사탄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내로남불입니다.

예수님은 위의 두 가지 논거를 가지고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주장의 모순과 허점을 날카롭게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사건의 진실,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친히 밝혀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0)”

하나님의 손을 힘입는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악령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이 사건의 명백한 진실입니다. 그리고 가장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해석입니다. 욕망과 욕심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바라본다면 누구나 다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동기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곳에 임하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2차 대전 때 독일이 유럽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통치 하에서 유대인 학살을 비롯해서 끔찍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 상륙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을 몰아내고 하나씩 히틀러의 통치 하에 있던 지역들을 해방시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지배 하에 있던 신음하고 고통받던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상륙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사탄의 통치 하에 있던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해방시키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서 의와 공평, 은혜와 자비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 가운데 가져오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21,22)”

예수님의 비유는 전쟁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강한 자는 사탄을, 그 소유는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합니다. 얼마나 강한 지 무장을 하고 지킨다고 했습니다. 한번 손아귀에 쥔 사람을 절대 놓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스스로 탈출할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탄의 포로 된 사람이 풀려날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탄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 가능합니다. 더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탄은 우리보다 더 강하지만 예수님이 사탄보다 더 강하십니다. 예수님이 언제 강한 자를 굴복시키셨습니까? 바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 사탄에게 삼 라운드 티케이오 승을 거두셨습니다. 이때 사탄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귀신들이 쫓겨나는 것을 보고도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치명상을 입습니다. 마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함으로 히틀러의 패망이 시간 문제였듯이 예수님이 최후의 승리는 이제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사탄은 결박된 채 지옥의 무저갱에 영원히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은 사탄에게 빼앗길 것이냐? 사탄에게서 빼앗을 것이냐? 하는 싸움의 연속입니다. 이때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길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혜와 의지를 총동원하여 맞서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또다른 실수는 악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절대 악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죄와 싸우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요 우리는 너무 연약해서 항상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자신만만도 문제이고 패배주의도 문제이고 둘 다 문제입니다. 내 힘과 내 지혜로 이 세상의 악과 내 안에 역사하는 죄와 싸우려고 하면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들이 강력하다 해도 결코 천하무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를 이기시고 악을 굴복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더 강한 자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더 강한 자 예수님을 꽉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탄의 진영을 무너뜨리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건져내서 하나님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앞장서서 사탄과 영적 전쟁을 벌이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팔짱 끼고 뒤에서 누가 이기나 구경만 하고 있을까요?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23)”

주님은 누구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회색 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든지 반대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왜 그럴까요? 북유럽의 핀란드와 스웨덴는 오랫동안 중립국을 표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서둘러 나토에 가입했습니다. 전쟁에서 중립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 진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반대편인 사탄을 이롭게 하는 일입니다. 사탄의 승리, 악의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분명하고 단호하게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흔히들 하나님 나라의 전초 기지라고 부릅니다. 이 땅 가운데 사탄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세우신 기관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사탄이 결코 손쉽게 자기 영역을 내어주지 않기에 사탄에게 사로잡힌 영혼을 빼 내오기 위해서는 치열한 영적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 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 뿐만 아니라 예배와 양육, 곧 있을 여름 수양회까지 이 모든 것이 ‘사탄의 지배 하에 있을 것이냐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이냐’ 하는 영적 전쟁의 일환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확고한 스탠스를 정하라고 하십니다. 무관심층, 방관자, 회색 지대, 기계적인 중립에 서려 하는 것은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결국 사탄을 편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십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함께 모으는 것입니다. 꼭 무슨 거창한 것만 생각해 필요 없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맨 앞에서 싸우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후방 지원과 보급이 정말 중요하듯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도 지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응원하는 한 마디와 한 번의 섬김이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만 있다면 어떤 모습이라도 하나님 나라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암1부에 이런 작은 힘들이 모아졌을 때 약한 영들이 물러가고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는 새 역사를 체험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먼저 외롭게 병마와 싸우고 있는 분들을 위해, 여름 수양회를 위해 기도의 싸움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중립 지대가 왜 허상일 수밖에 없는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부연설명해 주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게 되었습니다(24a). 물 없는 곳이란 생명이 살 수 없는 사막을 가리킵니다. 거기에서 귀신이 자신이 기생할 만한 숙주를 찾지 못하자 원래 있던 집으로 돌아가겠다 결심을 합니다(24b). 와 보니 그 집이 깨끗하게 빈 상태로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25). 귀신은 옳다구나 하고 친구 일곱을 데리고 와서 거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귀신 들렸던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26).

앞선 비유에서 예수님은 강한 귀신이 있더라도 더 강한 자인 예수님이 왔을 때 너끈히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비유에서는 한 귀신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을 점령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힘겹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너무 손쉽게 다시 빼앗긴 상황이니 허탈한 심정마저 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악한 귀신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더 강한 누군가가 그 집을 계속 지키고 있어야 막을 수 있습니다. 귀신이 혹시나 하고 왔다가 자기보다 더 강한 예수님이 계신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줄행랑을 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더 강한 자 예수님 덕분에 귀신에서 놓임을 받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계속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떠한 주인도 원치 않아” 외치며 빈 집으로 있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몰려드는 귀신을 몰아낼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빈 집은 환상이었고, 곧이어 귀신들이 득시글득시글 하는 귀신의 소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 동안 우리 목자님들의 입에 회자되던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더니 세리가 되더라’ 매일 무기력하게 누워만 지내던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일어나 걷게 됩니다. 그후에 힘이 없어서 못했던 것들을 이제 힘이 생겼으니 다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발동해 세리 같은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되기 쉽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중풍병에서 일어난 후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일평생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확실히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께 함께 모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감히 사탄이 우리를 틈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더 강한 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순종함으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더 강한 자 예수님과 함께 일함으로 이 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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