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이창무 2022. 7. 1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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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8 강  / 이창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 / 누가복음 10:25-37
요절 / 누가복음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제 마음이 불편해질 것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말씀이 제 아픈 부분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이 느껴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씀 중에 최상급에 해당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찔릴 것이라면 차라리 제대로 찔림을 받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제대로 된 방향 설정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어떤 율법교사가 등장해서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율법교사는 이 중요한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지 여부를 가지고 예수님의 실력을 테스트해보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

예수님은 질문에 또 다른 질문으로 답을 주셨습니다. 이 질문이 대답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영생의 길에 대한 해답이 율법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영생의 길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하나가 아닙니다.“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두번째 질문이 의미심장합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성경 속에 있는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는 사람의 주관적인 자세가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과연 이 율법교사는 이 두 가지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을까요?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러 나왔다가 어느새 자기가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율법교사의 이 대답에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구약에는 613개의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열 개로 축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율법교사는 이 십계명을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합친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대단하지 않습니까? 만점 짜리 대답이라 할만 합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사실 완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질문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율법학자는 두번째 질문이 있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율법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 알면 그만이지 어떻게 읽는가가 뭐 그리 중요한가?”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율법학자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28)”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속에 담겨있는 영생의 길에 대해 네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아직 듣지 못한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알려 주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교사가 정말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행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의에 따르면 말씀을 제대로 읽는 것은 곧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는 율법교사가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 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와 ‘이를 행하라’는 이 두 문장이 서로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거리가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 앞에 서서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면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 지금까지 제가 머릿속으로는 말씀을 잘 알고 가르치기까지 했지만 정작 삶에서 실천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온전히 지켜 행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율법교사도 역시 이렇게 반응했을까요?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

율법교사의 반응은 좀 뜬금이 없습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 사랑에는 자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논외로 두고 예수님께 이웃의 범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이 질문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율법교사에게 자신을 옳게 보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민족만 이웃으로 삼았습니다.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은 아예 이웃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하면 예수님이 “그야 당연히 동족인 유대인이지” 라고 대답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웃을 충분히 사랑했습니다. 이미 다 행하고 있는 새삼스럽게 뭘 행하라 하십니까?” 이렇게 대답하려 했습니다. 만약 이 작전이 통하지 않더라도 플랜 B가 있었습니다. “내 이웃은 누구일까요? 이웃인 듯 이웃 아닌 이웃 같은 이웃도 있지 않습니까? 이웃의 범위가 애매모호하다보니 이웃 사랑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네요.” 라고 말함으로 율법교사는 이웃 사랑을 실천이 아닌 논쟁의 영역으로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고 은근슬쩍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정말 머리가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공부를 하고 메시지도 듣습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먹고 따로 성경다독을 합니다. 또한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율법교사처럼 성경을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자타 공인 상당한 성경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행하고 있느냐? 얼마나 실천에 옮기고 있느냐? 입니다. 알기는 알지만 행하지 못할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말은 그럴듯한데 삶은 여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현주소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율법학자처럼 자신을 옳게 보이려는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잘 하고 있다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말씀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주일예배에 드리는 정도로 축소하면 지킬 만 합니다. 이웃 사랑을 해야 하는데 이웃의 범위를 가족과 친구로 한정하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말씀을 다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내 입맛에 맞도록 내 취향을 따라 성경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무리이다 싶으면 그냥 결론을 내지 않는 손쉬운 해결책이 있습니다. “말씀이 애매모호해서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면 끝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더라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얼마든지 행함이 없이 요리조리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에게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묻고 계신 것 같습니다. “너희는 이름에도 성경읽기가 들어가는데 제대로 성경읽기를 하고 있느냐? 혹시 너희 입맛에 맞게 너희 편의에 맞춰 읽고 있는 것은 아니냐?” 

왜 이렇게 우리가 말씀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 높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기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의 기준을 낮추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분명히 알려 주시고 사람들이 낮추어 놓은 그 기준을 다시 원대로 높이려고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그 기준에 자신을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수없이 실패하고 수없이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그 하나님의 기준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30)”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총 27 킬로미터에 달하는 좁고 굽은 비탈길입니다. 길 주변에 큰 바위와 동굴이 많아 이를 은신처 삼아 활약하는 강도들의 피해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예루살렘에서 면접 시험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그만 강도떼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가진 것을 다 털리고 심지어 입던 옷까지 빼앗겼습니다. 강도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사람을 반쯤 죽은 상태가 될 때까지 집단 폭행을 가했습니다. 그는 외진 길에 중상을 입고 쓰려졌으니 이대로 버려두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31)”

그런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갔습니다. 이 비유를 듣던 사람들은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자이니 당연히 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상합니다. 제사장은 쓰러진 사람을 보더니 다른 길로 돌아 그를 피해갔습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32)”

그런데 또 한 사람이 왔습니다. 그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도 제사장만큼 고위직은 아니었지만 그대도 성전에서 일하는 성직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 있습니까? 레위인마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왜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피해 그냥 지나갔을까요? 이 사람이 죽은 줄 알고 시체를 만져 부정해지지 않으려 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배 준비가 너무 급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퇴근길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유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희생하기 싫어서였습니다. 이 사람 근처에 아직 강도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괜히 어물쩍하다 나까지 당할 수 있습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사람을 도와주려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들고 돈이 들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목격자 진술을 하러 경찰서에 불려 갈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억울하게 용의자로 오해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도우려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큰 낭패입니까? 남을 돕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향해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기 한 사람이 더 나타났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나왔으니 이제 평신도 유대인이 등장할 차례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게 누구입니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33)”

그는 유대인과 철천지원수지간인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듣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유대인을 보며 “꼴좋네 샘통이다” 하면서 한 대 더 때리고 갈 것 같았습니다. 이제 강도 만난 사람은 죽을 일만 남은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34)”

사마리아 사람은 놀랍게도 쓰려진 유대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는 먼저 군대에서 배운 심폐 소생술과 인공호흡을 실시했습니다. 다행히 심장이 다시 뛰고 호흡이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사마리아인은 가방을 뒤져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 상처 부위를 소독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서 두건을 벗어 쫙 찢어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이어 병자를 짐승에 태우고 자기는 산길을 걸어 안전한 주막까지 데려왔습니다. 밤새도록 곁을 지키며 정성을 다해 간호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거래처와 중요한 회의가 있어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할만큼 다 했으니 이제부터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그냥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35)”

사마리아인은 지갑을 탈탈 털어 두 데나리온을 주인에게 건네주며 병자를 부탁했습니다. 혹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정말 사랑의 끝판왕입니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평소 일면식도 없던 사람을 위해 그것도 원수 같은 유대인을 위해 누가 이런 희생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33절에 나온 대로 죽어가던 한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쓰러진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내 이웃인가 아닌가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이 한 가지만을 생각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고 불쌍히 여겼고 그래서 지체없이 도와 주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네가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다면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의 마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제사장, 레위인, 평범한 유대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사람 순으로 하나님 말씀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은 불쌍한 사람을 그냥 지나쳤고 사마리아인은 끝까지 도왔습니다. 누가 더 성경에 가까이 있습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제사장과 레위인입니까? 아니면 성경대로 긍휼을 실천한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당신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처음에 율법교사는 내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서는 여전히 내가 중심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해서 내 이웃의 범위를 정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서는 내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가 중심에 있습니다. 이웃이 필요한 사람이 기준이 되고 관건은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리이다(37a)”

율법교사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라고 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대답이 더 본질을 잘 드러내는 대답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출신에 상관 없이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정의될 수 없습니다. 오직 내가 긍휼히 여기고 사랑을 실천함으로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분들이 인생 드라마로 꼽는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회사원인 박동훈 부장이 상처 받고 거칠어진 젊은 여직원 이지안의 마음을 녹이고 삶을 변화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선의를 좀처럼 믿지 못하는 지안은 끊임없이 박 부장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박 부장은 더 이해해 주고 끝까지 자비를 베풉니다. 결국은 독기 품었던 지안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만듭니다. 저는 이 드라마가 혹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박 부장은 이지안에 대해 계속 ‘불쌍한 애’라고 부릅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지안에게 있어서 나의 아저씨는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어 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아닐까요? 작가인 박해영 씨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판타지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박동훈 부장 같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도 현실 속에 정말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이 비유를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치부해도 괜찮을까요? 큰 감동 받은 것으로 별  다섯개 주고 끝! 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37b)”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율법교사에게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의 끝판왕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아낌 없이 주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어라 끝까지 책임지고 희생하라” 이것은 너무 무리한 명령 아닙니까? 과연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좀 더 연장해 보겠습니다. 강도 만났던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 덕분에 몸이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다가다 과거 자기처럼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그냥 두고 지나쳐 갈 수 있을까요? 차마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그대로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자에게 해주고 그의 이웃이 되어 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실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 만난 자는 바로 우리였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사단에게 얻어맞아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보시고 더럽다 소망 없다 피해 지나가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들, 하나님의 원수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리 레위를 피하여 지나가지 않으셨듯이 사마리아의 목마른 여인과 만나주셨듯이 우리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와 주셨습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셨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붉은 포도주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나의 이웃, 나의 아저씨가 되어 주셨습니다. 두 데나리온이 아니라 자기 몸을 댓가로 지불하셔서 죄로 죽어 가던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말씀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에 가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죽어가던 자였던 나를 살리신 그 예수님의 은혜와 그 감격,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가지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살라 하시는 명령입니다.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감격을 품에 품고 주님이 가신 그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을 너도 가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에 불쑥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게 하실지 모릅니다. 아니, 이미 우리 주변에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캠퍼스의 양일 수도 있고, 교회의 동역자 중에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려움에 처한 선교사님일 수도 있고,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동네 주민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그 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가 내 중심의 생각과 삶에서 벗어나 이웃이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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