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이창무 2022. 6. 2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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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6 강 / 이창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말씀 / 누가복음 9:46-62
요절 / 누가복음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올해 카타르에서 월드컵이 있을 예정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조별 예선을 통과해서 16강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이번 달에 있었던 평가전을 보고서 아마 안 될 것 같다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축구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축구가 한 단계가 더 도약하려면 공을 간수하고 패스하는 기본기를 잘 갖춘 선수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다운 제자가 되려면 기본기부터 착실하게 익혀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제자도의 기본기 세 가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제자도의 기본기 첫째 / 주위 사람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를 영접하라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46)”

제자 중에서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점에서 적절한 변론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는 왜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주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누가 크냐? 누구의 서열이 제일 높으냐?'를 놓고 제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지난번 전도 여행 때 나만큼 큰 역사를 이룬 사람이 있어?" "오병이어를 들고 나온 사람이 누군지 벌써 잊은 거야?" 그러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습니다. "너희들 중에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런가 몰라."

이런 변론에 한창인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47)”

어린아이는 어떤 존재입니까? 요즘 시대에 어린아이는 너무도 귀한 금쪽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는 하찮고 가치 없는 존재, 끊임없이 보살펴 주어야 하는 귀찮은 존재로 취급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 곁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어린아이 하나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통해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셨을까요?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48)”

어린아이는 집단 안에서 가장 작은 자들을 대표합니다. 제가 군 병원에 갔다가 일병이 병장에게 반말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물으니 군 병원에서는 짬밥이 아니라 약밥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어디든 사람이 모이면 일단 누가 더 큰 지 비교하면서 서열을 정하기 마련입니다. 그 서열상 가장 말단에 있는 사람이 가장 작은 자입니다. 보통 나이가 적거나 직위가 낮거나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말단을 차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작은 자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합니다. 도로에서도 그렇습니다. 경차를 운전하면 그렇게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곤 합니다. 작은 자의 서러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작은 자가 나름 큰 자가 되면 자기가 당했던 것과 똑같이 작은 자를 무시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작은 자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자라고 해서 차별하거나 왕따를 시켜서는 안 됩니다. 귀하게 여기고 영접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영접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가 나에게로 다가오면 예수님이 나에게로 오는 것처럼 여기고, 작은 자 한 사람을 영접할 때는 하나님을 영접하듯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역설을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일 수 있습니까? 사극에 보면 머리가 하얀 고관대작들이 한 어린아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쩔쩔 매는 장면이 가끔 나옵니다. 그 아이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임금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빼고 보면 작은 사람 한 사람만 보일 것입니다. 나와 그 사람이 비교가 될 것입니다. 나보다 잘나 보이기도 하고 못나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자 바로 곁에 예수님이 서계시다면 어떨까요? 예수님 때문에 그를 큰 자로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서로를 볼 때 사람만 보지 말고 그 사람과 함께 계신 크신 주님을 함께 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면서 누가 더 크냐는 변론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 연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몇 학번인가? 어떤 직분을 맡고 있는가? 양이 몇 명이나 있는가? 이런 것들을 기준 삼아 서열이 정해지기 쉽습니다. 심지어 사회적 지위와 재산의 정도와 같은 세속적 기준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등급을 나누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매겨진 서열에 따라 작은 자를 차별하고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일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난다면 교회와 세상과 다른 점이 뭐가 있겠습니까? 과연 여기가 예수님을 닮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 중에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큰 자입니다. 그 사람은 작을지 몰라도 예수님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기 때문에 다 나보다 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영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위대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주위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나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과 가장 거리가 먼 제자, 가장 초라한 제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왕 큰 자가 되고자 한다면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일에 있어서, 연약한 지체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도의 기본기 둘째 / 밖에 있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관대하게 대하라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49)”

요한이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주님, 아 글쎄 어떤 사람이 허가도 안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다가 우리한테 딱 걸렸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혼을 내고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도록 했습니다. 저 잘했지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잘 했다. 네 덕분에 지적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50)”

예수님은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 금지할 필요가 없습니까?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해 놓고 예수님의 반대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 하는 것을 굳이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대신 전파해 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전혀 막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자는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유익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51,52)”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땅으로 가려면 중간에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자들이 먼저 가서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숙소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53)”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과 해묵은 원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행선지가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배척을 한 것입니다. 이는 사마리아인들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너무나 부당한 처사였습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야고보와 요한이 말했습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역시 예수님께서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여주신 제자다운 화끈한 제안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래. 내 속이 다 시원하구나.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어 다시는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자." 이렇게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55,56)”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돌아보시며 꾸짖으셨습니다. 꾸짖으신 내용이 구체적으로 안 나오는 것을 볼 때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한 말로 꾸짖으신 것 같습니다. 왜 꾸짖으셨을까요? 제자들이 이 정도로 속이 좁아서는 앞으로 구속 역사를 이루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할지라도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후에 사마리아에서는 전도자 빌립에 의해 복음을 영접하는 역사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그깟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사마리아 땅에서의 복음 역사를 영원히 망칠 뻔 했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제자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분리하고 배척하려는 태도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멤버들의 강한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정체성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꾸 우리와 너희를 분리하려는 성향도 강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닌 너희에 대한 배타성도 함께 자라게 됩니다. 우리만 최고이고 우리만 잘 하고 있고 우리만 가진 것을 지키려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모든 것을 우리끼리만 하려는 폐쇄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외부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리와 배척의 자세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제자는 관용과 포용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엄청난 오만과 독선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면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들과도 협력하고 동역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은 다 우리를 이롭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포용력을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이름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에게도 관용으로 대해야 합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그들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영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적대한다고 같이 맞부딪쳐 싸우면 나중에 그들은 어떻게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심판의 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은혜의 불을 세상에 내리는 통로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제자들이 빠졌던 것과 같은 함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임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잘못하면 여기서 캠퍼스 선교 단체 중에 우리만이 최고라는 독선과 아집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꾸만 다른 선교 단체나 지역 교회를 비난하고 깎아내리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미련한 짓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같이 맞받아치고 싸워도 괜찮을걸까요? 그러나 이런 마음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자에게 합당한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목자는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화가 난다고 다 쏟아부으면 당장 나는 시원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랑과 온유로 반응해야 합니다. 무지와 오해와 교만을 참고 끝까지 인내로 감당할 때 언젠가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쓸데없이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오늘의 적을 내일의 친구로 만들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갖추어야 할 합당한 자세입니다.

제자도의 기본기 셋째 /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엄격하고 철저하라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나아와 청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제 발로 찾아와 어디든 예수님을 따르겠다니! 얼마나 기특한 일입니까? 이런 사람이라면 환영하고 격려하며 칭찬을 해주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외로 차갑게 반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

여우와 공중의 새와 같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돌아가서 쉬고 누울 일정한 거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일정한 안식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동기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름떼 같은 많은 군중들을 몰고 다니는 예수님의 인기가 부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겉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삶이 너무나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생활은 막연한 꿈과 이상만으로, 낭만으로 쫓을 수는 없습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고 눈에 보이는 보장은 하나도 없는 불안정한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런 희생을 할 각오가 없다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 이건 아닌데' 하다가 낙오할지 모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예수님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영광스러운 제자로의 부르심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60)"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너무 냉정하신 것 아닐까요?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도 치를 수 없는 걸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 이 사람이 요청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허락을 구한 것은 지금 장례를 위해 가봐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께 청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가시면 유산을 정리하고 그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일을 계속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일을 기약 없이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의 모습은 다른 제자들의 모습과는 확연하게 차이 납니다. 다른 제자들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마주하여 융숭하게 장례를 치르는 일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운명의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예수님께 부르심 받은 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즉시 따라야 했고, 먼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먼저 헌신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예수님은 이 사람의 요청에 대해서 ‘안 된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왜 이번에도 예수님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가족과의 작별 인사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너무 매정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 지금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미련이 남은 상태에서 가족들에게 작별을 하러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울고불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가족들을 뿌리칠 수 없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밭은 삐뚤빼뚤 들쑥날쑥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하고 나서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자꾸 토를 달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이것을 하고 나면 저것도 생각날 것이고 저것이 해결되고 나면 그것도 챙겨야 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오락가락하다가 결국에 따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대로 가려면 미련을 버리고 앞서가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확고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필요할 때 잠깐 하고 마는 아르바이트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주중에는 스위치를 껐다가 주일에만 켰다가 하는 삶도 아닙니다. 이것저것 다 참견하고 여기저기 다 신경 쓰고 들락날락하면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우리 삶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건강, 나의 재물, 나의 자녀, 나의 성공, 나의 꿈, 나의 가족 다 소중한 것들이지만 이제 예수님 다음에 자리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과 결단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길은 참 좁은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예수님이 먼저 가셨고, 그 길을 가는 우리와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 길 끝에 먼저 가신 예수님이 우리를 맞이하시며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한 눈 팔지 말고 뒤돌아 서지 말고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부르디외가 처음 제시한 ‘아비투스’라는 개념이 최근 인문학 계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아비투스란 삶의 습관을 통해 형성된 제2의 천성을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이 아비투스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품격이 결정된다고들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가르쳐 주신 “주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를 영접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관대하게 대하라"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엄격하고 철저하라" 이 세 가지가 제자의 아비투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작은 자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우리의 본성과 거스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되지 않고 습관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 자신을 훈련하고 또 훈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작은 자를 섬기고 내 편이 아닌 사람들에게 관용과 포용의 자세를 갖추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는 삶을 실천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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