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이창무 2022. 7. 1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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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7 강  / 이창무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말씀 / 누가복음 10:1-16
요절 / 누가복음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졸고 있는 학생의 책임일까요? 지루하게 가르친 선생님의 책임일까요? 쉽게 답을 내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최선을 다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각의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또한 듣는 자로서 우리의 책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1)”

예수님께서 칠십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려는 동네에 앞서 보내심으로 마치 왕의 행차를 알리는 사자와 같은 역할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전에 이미 열두 제자를 파송하셨음에도 예수님이 이번에 또 칠십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2a)”

추수할 것은 많고 일꾼이 적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 많은 일꾼을 밭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이란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 복음이 필요한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방황하고 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구원자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에게 어서 빨리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열두 제자만으로는 충분치 않기에 이번에 칠십 인을 더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기 전에 먼저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전하는 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하라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2b)”

예수님이 추수하는 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말씀하신 것은 더 많은 일꾼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일꾼을 보내는 것은 주인이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일꾼이 왜 다른 일꾼을 보내 달라고 요청해야 할까요? 이 상황을 진짜 추수하는 상황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주인은 일꾼을 밭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일꾼이 나가보니 자신들이 감당하기에는 추수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일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일꾼들을 찾아다닐 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이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주인에게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추수하는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밭의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어차피 일꾼을 보내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기도하라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기도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일꾼이 된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추수하는 주인과 추수할 일꾼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꾼의 마음이 하나님의 그 애타는 마음, 안타까운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채워지는 것으로부터 전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통로는 바로 기도입니다.

둘째, 가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

예수님은 여기 있으면서 계속 일꾼을 보내 달라 기도만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기도하고 나서 가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기도가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일꾼이 필요한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죄의 길을 걸으며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둠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들이 알아서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전도자를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위험하니 가지 말아야 할까요? 그런데 만약 내가 구조대원이라면 위험이 있다고 해서 재난 현장에 안 갈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알면서도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영혼 구원을 위해 제자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갈지어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지로 등 떠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런 길을 가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만 의지하라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4)”

전대나 배낭은 여러 물건을 휴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도 여행 중 앞으로 먹을 것, 여벌의 옷 등을 여기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필요를 채울 수 있을까요? 길에서 만나는 된 지인에게 구해야 할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먹고 자고 하라는 것입니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5,6)”

전도를 받아 믿게 될 사람들을 통해서 제자들의 필요가 공급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들로부터 필요를 공급 받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추수할 일꾼들의 물질적 필요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먹을 것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사람들을 통해서 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받을 사람 즉 다른 믿는 자의 수고와 봉사를 통해 필요를 공급하실 것입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7)”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꾼들이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집, 더 나은 처우를 찾아 이 집 저집으로 옮겨 다녀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전도자들이 그렇게 하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실린 진정성이 약화될 것입니다. 이 모습이 그들이 말로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지만 실제로는 이 땅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사람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은 신뢰할만한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말뿐만 아니라 삶과 행동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라면 그에 걸맞은 삶, 하나님 한분만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넷째, 복음을 전하라

전도자의 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서 모든 이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응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영접하는 사람도 있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8,9)”

전도자는 영접하는 사람과 함께 먹고 교제해야 합니다. 또한 병자들을 고쳐야 합니다. 교제와 치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치유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10,11)”

전도자는 영접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장차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거절하는 것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전하는 자의 책임에 대해 우리가 배운 교훈들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될 때까지 우리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가야 합니다. 추수할 밭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먼 곳으로 갈 수도 있지만 우리 곁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내가 가야 할 추수할 밭입니다. 캠퍼스, 직장, 가정, 심지어 교회 안에도 추수가 필요합니다. 그때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십니다. 우리도 이런저런 부족함을 이유로 미루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도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꼭 논리 정연하게 복음의 시작과 끝을 다 풀어서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심판의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기까지가 전하는 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모임은 이 전도자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었습니다. 우리들은 기도하고 가서 믿음으로 도전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캠퍼스 구석구석을 다니며 성경 공부에 초대했습니다. 직장일로 바쁠 때는 예배가 끝난 주일 오후에 기숙사로 올라가서 전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니 캠퍼스에 우리 모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조크도 있었습니다. 가까운 곳뿐만 아니라 우리 선교사님들은 인도네시아, 독일, 러시아, 미국, 중남미 등 먼 곳에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전에 비해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요? 너무 바쁘기 때문일까요? 물론 이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명에게 전도를 해서 한 명과 일대일을 할 수 있다면 신나게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대일 하던 네 명 중에 한 명이라도 제자로 세울 수 있다면 기꺼이 헌신할만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백 명을 만나야 한 명의 일대일 양을 얻을까 말까 합니다. 전도에 대한 까칠한 반응과 냉대를 한 번만 겪고 나면 잔뜩 움츠려 들기 쉽습니다. 성경 공부를 계속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제자로 세우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입니다. ‘추수할 것은 없고 일꾼만 많으니 내가 안 해도 되겠네’라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심정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과를 보고 전도를 할 지 말 지 정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요? 우리를 보내시는 주인은 결과까지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전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듣는 자의 몫이요 책임입니다. 추수하는 주인은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명령에 우리가 얼마나 성실하게 순종했느냐 여부로 우리의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전도해서 몇 명의 일대일 양을 얻었느냐, 몇 명을 제자로 세웠느냐고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는 영혼의 추수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느냐?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 속으로 들어갔느냐? 하나님만 의지했느냐?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했느냐?”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전하는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결과에 연연해하지 맙시다. 원하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전도자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우리가 모든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추수할 일꾼으로서 책무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복음을 들은 자의 책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2)”

그날은 최후 심판의 날입니다. 소돔은 가장 타락한 죄악의 상징과 같은 도시입니다. 심판의 때에 지금 제자들을 거절한 사람들은 소돔 사람들보다 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견디기 쉬우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더 중한 심판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런 심판을 향해 가고 있는 세 도시를 직접 언급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3,14)”

고라신은 복음서에 별 다른 언급이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바로 이 마을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까이서 자주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도 직접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십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경험하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 도시를 언급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두 도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23장과 에스겔 28장에 불의한 도시, 하나님을 대적하여 심판받은 대표적인 도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완악한 이방 도시들조차 회개시키기에 충분한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셨는데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여전히 회개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그들이 두로와 시돈보다 더 심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이 받은 자들에게 더 많은 책임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15)”

예수님이 세번째 예로 드신 가버나움은 우리에게 익숙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실 때 중심이 되었던 마을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그 어떤 곳보다 많은 이적을 행하셨고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역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하늘 높을 줄 모르는 교만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특별히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마치 자신들이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여기는 착각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늘까지 높아질 것 같겠지만, 실제로는 음부 곧 가장 낮은 곳까지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예수님이 왜 이런 심한 말씀을 하실까요?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칠십 인 제자를 파송하신 예수님은 다른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실 분도 예수님이시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자들을 저주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한탄하고 애통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있기 때문에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 안에는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혐오의 메시지, 저주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더 늦기 전에 심판을 피할 기회가 있을 때에 복음을 영접하라는 구원의 메시지, 사랑의 호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을 향해 말씀하셨던 주님의 경고가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경고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우리나라야말로 주님께서 많은 권능을 행하신 곳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선교가 성공하고 전 인구의 사분의 일이 신자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많은 선교사를 전세계에 파송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거절하지 않고 마음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많은 민족들 중에 우리 민족만큼 성경 공부에 열심이었던 민족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면에서 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던 나라에서 세계 10 위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손흥민 선수도 나오고 BTS, 블랙핑크 같은 가수들이 팝 시장을 호령하고, 칸느, 아카데미와 같은 유수의 영화제에서 계속 상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19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놀라운 연주로 전 세계인을 매혹시키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우리나라가 잘 먹고 잘 살고 잘 나게 됨과 비례해서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현저하게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권능을 행하신 주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점점 더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해도 영접하는 사람보다 거절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게 된 이유입니다. 마치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점점 교만이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고 잘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요? 이대로 가면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다가 음부에까지 낮아질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물가폭등, 주가 하락 등이 전조가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돌이킬 기회가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영접하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살 길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메시지를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합니까?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6)”

복음을 결코 가볍게 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면서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처럼 복음을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그 복음을 전한 사람을 거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보내서 나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살다 보면 거절해도 괜찮은 메시지가 꽤 많습니다. 저에게 보험에 가입하라는 전화가 자주 오는 데 받자마자 ‘관심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끊습니다. 여론 조사 기관에서 걸려 온 전화도 웬만해서는 받지 않습니다. 한 번 응해 보았더니 생각보다 질문도 많고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 거절해서는 안 되는 메시지, 반드시 귀 기울여 듣고 흘려들을 수 없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구원이냐 심판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존귀하게 될 것인가 비참하게 될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려 회개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새로운 마음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서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나아가 힘써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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