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이창무 2022. 7. 2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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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9 강  / 이창무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말씀 / 누가복음 11:1-4
요절 / 누가복음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예배 마지막 순서로 부르는 찬송의 가사인 주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이라는 명칭에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얼핏 주님이 기도하셨던 기도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예수님이 하실 수 없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비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들의 기도, 바로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오늘은 평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암송만 하기 쉬운 주기도문의 의미를 하나하나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더 빈번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열두 제자를 택하여 사도로 세우실 때, 제자들이 신앙고백을 하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중요한 사건 때만 기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이른 아침 혹은 늦은 밤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

이날도 평소처럼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잔소리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꾸준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도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암만 봐도 예수님이 능력의 역사를 이루시는 비결이 바로 기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소원이 생기게 된 제자 중 하나가 나아와 이렇게 청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도 주변에 기도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자극을 받습니다. 나는 어쩌다 한번 기도하는데 날마다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 나는 이삼십분 기도하기도 힘든데 두시간 세시간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한번 그렇게 기도해 보고 싶어집니다. 나도 기도의 사람이 되면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앞선 시대의 신앙 위인들처럼 능력 있는 사람, 영적인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기도하려고 하면 막막합니다. 기도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주변 사람들의 조언이나 경험담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떨 때는 ‘통성으로 기도해라. 침묵 가운데 기도해라. 방언 기도해라. 방언 기도하지 마라. 기도 음악이 도움이 된다. 기도 음악이 방해가 된다.’ 등등 서로 말이 다 달라 더 헷갈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시 기도는 기도의 최고 마스터이신 예수님에게 먼저 배워야 되겠습니다. “예수님! 제가 기도하고 싶은데 기도를 모릅니다. 저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2a)”

예수님은 마치 이날이 오기를 기다려 오신 듯 예수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시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단, 기도의 형식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이를 볼 때 기도의 폼, 억양, 방식 등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또는 때에 따라 자유롭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범이 될 기도문 하나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 되시는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지를 발견합니다. 이것을 기초로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지,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2b)”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여”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 혁명에 버금가는 대 사건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 높은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당시 임금님을 부르던 호칭과 같은 주(The Lord)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임금님 앞으로 나아가려 하니 기도할 때마다 얼마나 긴장되고 겁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여’라는 호칭은 전혀 다릅니다. 개인에 따라 시대에 따라 편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친밀함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특히 아무런 수식어가 없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도 아니고, 왕과 신하의 관계도 아니고, 가족의 의미에서 아버지를 말합니다. 제가 과묵해 보이지만 수다스러울 때가 두 경우 있습니다. 하나는 제 동역자와 대화할 때고 다른 하나는 기도할 때입니다. 사실 동역자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다 합니다. 기도할 때 일단 ‘아버지’ 이렇게 부를 때 푸근함과 따뜻함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다 고하게 됩니다. 직장 상사 앞도 아니고 교수님 앞도 아니고 아버지 품 안에 있는데 감출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게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 가운데 친밀한 대화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로 입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롬8:15). 복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 양자됨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너무 잘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세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말은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아버지 앞에 사랑 받는 자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름은 명예와 영광을 대표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되는 독보적인 능력과 영광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 많은 아버지이긴 하지만 기도에 응답해 줄 능력이 없으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무능한 아버지에게 구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합당한 대접을 받으시도록,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 제목인 이유는 이 땅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쳐 놓고 헛된 우상을 숭배하거나 아예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이라 폄하하고 기독교를 조롱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마저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하지 못하고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를 그냥 두고 볼 아들 딸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가슴에서 열불이 나야 정상일 것입니다. 하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 우리가 자녀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현실을 보며 우리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탄식 가운데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전도와 선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삶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거룩하신 아버지이긴 하지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를 돌보고 싶어 하시고 돌볼 능력도 있지만 돌볼 권리가 없는 분이 되어 버립니다. 아무 실권이 없는 아버지에게 우리가 구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은 언제든 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 제목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반역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경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어둠의 권세 아래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질병의 공포, 전쟁의 위협, 빈부격차, 부정부패, 강력범죄 등 각종 죽음의 증상들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는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궁극적인 대안이고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 죄로 인한 고통이 그치게 됩니다. 상함이나 해됨도 없으며 영원히 사망이 없고 생명이 왕노릇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드러워진 어둠을 밀어내고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가기를,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묵상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전반부 기도를 가리켜 흔히들 ‘하나님을 위한 기도’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나의 필요를 구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라’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더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거나 필요해서 우리에게 기도해 달라 요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기도 역시 다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시달리고 있는 우리 인생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너희의 모든 필요 중에 가장 절실한 필요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기도입니다. 전능하신 왕, 자비하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돌보심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가장 복된 삶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한 기도가 나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 제목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고 간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통해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날마다 되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기도하는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 우리는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3)”

예수님은 먼저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날마다 구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리 와 닿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날 먹을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참 더 먹을 것을 쌓아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돈만 있으면 마트에 가든지 쇼핑몰에서 배달을 시키든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정말 그날 먹을 것을 위해 일했고 그날 일한 것을 가지고 먹었습니다. 오늘 배불리 먹었다 해도 내일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걱정 대신 기도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우리와 크게 상관 없는 기도일까요? 당장 먹을 끼니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육신의 필요, 물질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고 살 집도 있어야 하고 자녀를 키울 교육비와 노후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땀 흘려 일하고 열심히 수고한다고 해서 이런 필요를 스스로 다 충족시킬 수 있습니까?

제가 회사 다닐 때 점심 먹기 전에 감사 기도를 하면 부장님이 얼굴을 찌푸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먹고 있는 점심 식사 쿠폰은 내가 준 것인데 왜 나한테 감사하지 않냐? 아니면 네가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쿠폰을 주는 것이니 너 자신에 감사할 일 아니냐?” 이때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부장님이 주신 쿠폰은 회사가 준 것입니다. 그리고 회사가 쿠폰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 회사가 유지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애를 써도 경제 불황이 닥치면 순식간에 회사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물론 부장님께 감사하긴 하지만, 하나님께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 이후로 부장님은 식사 기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다 내가 열심히 돈 벌어서 내가 필요한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먹는다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우리는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4a)”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가 용서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죄 지은’이라고 번역된 부분을 원어로 보면 ‘빚을 진’이라는 뜻의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죄는 마치 채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곧 일당을 16만년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할 정도의 죄의 빚을 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무거운 채무를 한 푼 남김 없이 다 탕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한 없는 은혜와 자비때문입니다. 이런 우리가 우리에게 일백 데나리온 곧 백일 치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의 빚을 진 사람의 채무를 탕감해 주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무거운 죄를 사함 받은 우리는 마땅히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액의 채무를 하나님께 이미 탕감 받았다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범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채무를 쌓아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해서 우리 삶에 있는 죄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된 우리와의 관계에 문제를 가져옵니다. 관계가 영구적으로 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친밀함은 끊어집니다. 해결책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죄 사함을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라도 발을 씻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육신의 필요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필요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몸을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은 용서를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의 죄를 전혀 용서해 주지 않고,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비난과 분노, 저주와 복수가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세상에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든 인식하지 못하고 있든 우리 주위 사람들로부터 날마다 용서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 덕에 같이 어울려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허물을 인내해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담대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지 않고 계속 친밀함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4b)”

끝으로 예수님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말것에 대해 구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분이십니까? 다른 말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분이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그럼 누가 시험합니까?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정욕이면 정욕, 탐욕이면 탐욕, 교만이면 교만, 우리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넘어뜨리려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인생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탄의 시험에 걸려 넘어지면 한 순간에 그 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이 다 날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큰 상처와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탄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고 지혜롭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사탄과 우리가 일대일로 싸운다면 우리는 백번 싸워서 백번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넘어질 위험이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남들은 다 넘어져도 나는 안 넘어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 그래서 기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뿌리치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탄보다 더 강하신 분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유혹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통치자이시고 자녀를 볼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답은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부인하고 있거나 내가 어떤 존재인지 부인하고 있거나 둘 중 최소한 하나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게 스스로 충분한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 그렇게 큰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음으로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능력 많으신 주권자이신 하나님, 일생 의지할 사랑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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