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창무 2022. 6. 1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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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5 강 / 이창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씀 / 누가복음 9:18-27
요절 / 누가복음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통령의 경제 자문관을 했던 아더 번즈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참석하던 백악관 내 기도모임 중 마무리 기도에서 줄곧 면제되는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너무 무게감이 나가는 큰 인물이어서 아무도 기도를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새로운 참석자가 모임을 인도하면서 번즈에게 마무리 기도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다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번즈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후 이 짤막한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전설적인 기도로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고백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더 깊고 풍성하게 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온다는 것은 곧 중요한 일이 있으리라는 예고편과 같습니다. 기도를 마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얼마 전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이 질문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19)”

무리들이 가진 견해는 다양했습니다. 그렇지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언급된 세 사람 모두 다 선지자이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한 반쪽짜리 답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a)”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누구보다 가까이서 예수님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을까요?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20b)”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을 세울 때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란 일차적으로 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왕이라고 해서 다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겠다 하신 약속을 성취할 특별한 왕을 가리킵니다. 인류가 처음 범죄했을 때부터 하나님은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자손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자손 중 영원한 나라의 왕이 올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에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이 구원의 약속을 성취한 왕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가 이런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희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지금 너희들 귀에 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라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제자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왔습니다. 이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지금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은 즉시 널리 전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좀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2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이런 경고를 하셨을까요? 이는 제자들이 아직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들에 관해 큰 오해와 착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해야만 할 일들에 관해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22)”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에도 예수님이 은연 중에 암시하신 적은 있어도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모든 일들이 'MUST' 반드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할 일들이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때 화들짝 놀란 베드로가 그런 말씀 마시라고 예수님을 책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당시 대다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메시아, 민족적 메시아,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민족은 기원전 586년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된 독립 국가를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때도 로마 제국의 가혹한 식민 통치 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 얼마나 절실했겠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하면 전투에서 연전연승 하여 로마 군대를 다 몰아내리라 기대했습니다. 그 후에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부자 나라, 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그 날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고난 받고 버림 받고 죽임 당하는 그리스도라니요?' 제자들은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말씀하셨지만 앞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뒷부분은 제자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리스도에게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죄인들을 의롭게 하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면 죄 없는 자가 그 죄를 대신 담당해야 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죄를 담당해야 하고 그 결과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결국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뜻에 기꺼이 순종하여 그 길을 가시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백에 구원이냐 심판이냐가 달려 있습니다. 이 고백을 철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화형을 당하기도 하고 사자 먹이로 온 몸이 찢기는 죽음을 감수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고백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고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신앙 고백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고백 위에서 예배를 드리고 이 고백을 위해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합니다. 이 고백의 기초 위에서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 고백만큼 중요한 고백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우리 시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신앙 고백의 내용이 왜곡되었거나 변질된 것은 아닙니다. 고백의 내용 자체는 잘 보존이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고백의 무게감이 현저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 대해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18,19세기 부흥 운동을 이끌던 분들의 설교를 보면 인간의 죄에 대한 무시무시한 고발과 지옥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 죄인들’이라는 유명한 설교는 공포에 떠는 청중들의 절규 때문에 끝까지 전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21세기에 무슨 지옥이냐며 더 이상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심판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동시에 영원한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도 사라졌습니다. 이미 수많은 질병을 극복했고 평균 19세기 37세였던 평균 수명이 80세에 근접해 가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만 돈만 있으면 이 땅에서 최상의 만족과 즐거움을 누리면 낙원에 가까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현대인들은 지옥에서의 영벌로부터 나를 건져내 천국에서의 영생으로 인도해 줄 구원자를 더 이상 갈망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라는 단어는 그 속에 이미 내가 짊어져야 할 도덕적 책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러 방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합니다. 유전적으로 그런 성향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며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책임을 질 수 없던 나이에 부모님들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양육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가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내가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 책임이 없으니 내가 저지른 죄로부터 구원 받아야 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현대를 대표하는 관용 정신 소위 톨레랑스가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깁니다. 톨레랑스란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다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톨레랑스 세계 속에서 모든 사람은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평가, 성경의 평가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도, 죄에 대한 심판도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결과가 어떻습니까? 욕망은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책임은 적극적으로 회피하면서 누구로부터도 비난을 받지 않으려 하는 인간, 한 마디로 뻔뻔한 인간들을 양산해 내고 있습니다. 탁월한 성품과 인격을 갖추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관심과 강조는 확실히 시들해 졌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인간’은 천연기념물보다 찾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죄 문제 때문에 베개를 눈물로 흥건히 적시며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는 다윗과 같은 사람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그 대신 분명 잘못을 저질러 놓고 절대 사과하지 않는 사람, 온갖 변명과 구실만 늘어놓는 사람, 모든 책임을 타인과 사회에 돌려 버리는 사람은 너무나 흔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려는 사람들만 넘쳐 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이 너무 힘들어진 시대입니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다 이기적이고 뻔뻔한 사람들 뿐이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관계에 치어서 내면에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자는 누구일까요? 이 얽히고 꼬인 관계를 풀어줄 사람, 상처 입은 내 마음을 치유해 줄 사람, 내적 평안을 가져다 줄 사람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여기에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바로 오은영 박사님이 아닐까 합니다. 이분은 방송 여기저기에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를 풀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이분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매주 그 말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다는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나를 무조건 추앙해 줄 사람을 만나 지긋지긋한 인간 관계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해방을 구원으로 여겼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내면의 상처로부터 치유와 해방을 구원으로 여기는 듯 합니다. 죄로부터 구원, 영원한 심판에서부터 구원은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이런 시대의 조류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은 하지만 그 고백의 무게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신앙 고백의 무게감이 줄어들면 어떻게 됩니까? 내 개인신앙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서 점점 주변부로 밀려 나가게 됩니다. 믿음이 약해져서 쉽게 넘어지게 됩니다. 아울러 신앙 고백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교회의 약화를 초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힘을 잃으면 우리의 예배, 제자양성, 전도와 선교 등 모든 것이 힘을 잃게 됩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그 기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정말 절실한 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죄와 심판을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습니다. 여전히 진리는 살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자는 없습니다. 함께 고백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신앙 고백을 새롭게 하고 옛 성도들처럼 굳게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만 하는 그리스도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3)”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를 다음 세 가지 명령으로 규정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나를 따르라.”입니다.

자기 부인이란 무엇입니까? 부인한다는 것은 ‘거절하다. 포기하다. 내려놓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자기 부인이란 나를 포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 삶의 중심에서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삶의 주인으로서 나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나’입니다. 나의 주인은 나고, 내 삶의 목적도 나입니다. 무엇을 하든 내가 즐겁고 내가 행복한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나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내’가 있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No’ 하고 예수님께 ‘Yes’하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비유적인 표현은 당시 십자가 형을 선고 받은 죄수의 모습에서 온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자신이 지고 처형장으로 가야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게 했을까요? 이는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모욕을 받게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죄수에게 육체적 고통에 더하여 수치를 겪게 하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앞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삶의 모습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께 대하여 'Yes'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크고 작은 대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충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주위 사람들의 따돌림과 냉대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손해나 아픔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세번째 명령은 ‘나를 따르라’입니다. 따른다는 말은 뒤쫓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넓은 길을 가지 않고 예수님이 앞서 가신 그 좁은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다른 것을 함께 따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만 따르면 나는 어떻게 되나요? 나에게 좋은 일은 하나도 없는 건가요? 그러다 망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문이 생길 줄 예수님은 다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4)”

여기서 제 목숨은 각자가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부여 받은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은 죄로 인한 죽음의 저주 가운데 있는 생명입니다. 이 목숨을 아무리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이렇게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25)? 그러나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숨을 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생명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만약 이 역설의 진리를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26)”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사람의 연약함 때문에 단 한 번이라도 그런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사도 베드로도 구원 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거절한다는 말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거절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고난 받고 죽임 당하는 길을 가시지만 장차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주, 심판의 주로 오실 때 예수님께서 영접할 사람들은 지금 고난의 주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들 중 몇몇에게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맛보기로 보여주실 것입니다(27). 예수님은 그 제자들이 보았던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도 나타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을 극대화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자기를 무한 긍정하고, 자기의 꿈을 이루고,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펴져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은 참으로 낯선 삶의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아보며 정말 나를 힘들고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어렵고 힘든 사건이나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보다는 강한 자아와 자기에 대한 집착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중심이 되려고 하다가 관계를 망쳐버렸습니다. 부풀려지고 비대해진 자아가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자기가 죽고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우리는 참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다고 자기가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오염되어 죽을 운명의 자기는 죽고, 그 자리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새로운 자기가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사람이 죄에 오염된 이 세상과 부대끼며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혀 이상한 일,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내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인증이며 표식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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