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자

이창무 2022. 5. 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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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1 강 / 이창무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자

말씀 / 누가복음 8:4-15
요절 /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2013년에 제가 “성경 공부 인도자가 알아야 할 40 가지”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서 UBF 포럼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고 이번 학사 수양회에서 ‘일대일 성경 공부를 위한 가이드’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난 지금 와서 뒤돌아보니 이 글보다 먼저 써야할 글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글의 제목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알아야 할 40 가지’ 정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잘 가르치는 법보다 잘 듣는 실천하는 것이 더 절실하지 않을까요? 성경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어떻게 듣고 배울 것인가 입니다. 잘 듣지 못하면 결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 줄 말씀 듣는 법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4)”

각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나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왔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그러나 무조건 좋아만 할 일은 아닙니다. 이 무리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감시하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냥 친구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과연 이중에 얼마나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여 열매를 맺게 될까요? 열매 맺는 사람과 맺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한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5절부터 8절에 나오는 이 비유는 흔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내용을 가지고 엄밀히 말하면 네 종류의 밭의 비유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농부가 어깨에 씨앗을 담은 가방을 메고 밭으로 갔습니다. 요즘 같으면 밭을 갈고 이랑을 내고 구멍을 판 후 조심스럽게 씨를 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팔레스타인에서는 밭을 갈지 않고 씨앗을 흩뿌렸다고 합니다. 흩뿌리다 보면 씨앗은 다양한 곳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씨앗은 네 종류의 밭에 떨어졌습니다. 더러는 길 가에 떨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 흔적이 남고 백 명이 지나가면 오솔길이 되고 천 명이 지나가면 길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녔기 때문에 단단해 진 길 가에 떨어진 씨는 흙 속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데굴데굴 굴러다녔습니다. 결국 공중의 새에게 먹혀 버렸습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 '바위 위'란 겉은 부드러운 흙이 얇게 덮여 있으나 그 아래에 돌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이곳에 떨어진 씨는 흙에 있는 습기를 빨아들여 싹을 냈습니다. 그러나 바위 때문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햇볕이 내리쬐자 점점 시들어 말라버렸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졌습니다. 가시떨기는 황무지에서도 자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합니다. 주위에 물과 양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 빨아들입니다. 이런 가시떨기 속으로 떨어진 씨는 부드러운 흙 속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가시가 함께 자라면서 물과 양분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 제대로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깊이 내리고 물과 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았습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추수 때가 되자 백배의 결실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큰 소리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 비유를 듣기는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들을 귀 있는 자라니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9)”

들은 귀 있는 자는 다름 아니라 바로 이 비유의 뜻을 물은 제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잖아 우리가 이런 말씀 들으려고 여기까지 왔나’하며 투덜거리며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비유의 뜻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런 질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담긴 의미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말씀을 알고 싶은 열망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와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0)”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 할 때 비밀의 원어는 “뮈스테리온”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미스터리(mystery)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자연 세계에는 누구나 관찰할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현상들이 지금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나 다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그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소원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눈과 귀를 열어 주십니다. 하지만 이런 간절함이 없이, 아무런 소원도 없이 그저 흘려 듣기만 하는 사람은 영적인 세계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영적으로 무디어지고 마음이 굳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활짝 열리든지 굳게 닫히든지, 이 둘 중 하나는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피할 수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제자들에게 본격적으로 비유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11)”

이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씨가 떨어진 곳은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가리킵니다. 씨앗은 겉보기에는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엄청난 유전 정보와 놀라운 생명력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씨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려면 ‘어떤 마음 밭에 떨어졌는가’가 중요합니다.

첫째, 말씀의 씨가 길 가와 같은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2)”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처음에 말씀을 듣기는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대개 자기 생각이 강합니다. 마음이 딱딱하고 비판적입니다. 또한 말씀에 대한 기대나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럴 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마귀가 말씀을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빼앗아 갑니다. 그는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딴청을 피우다가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둘째, 말씀의 씨가 바위와 같은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13)”

바위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습니다. 할렐루야, 아멘을 연발하며 말씀을 영접합니다. 이런 양을 만난 목자는 오랜만에 좋은 양을 만났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아주 피상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말씀 공부를 하긴 하지만 생각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러다가 시련이 닥쳐올 때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하고 믿음의 길을 벗어나고 맙니다.

셋째, 말씀의 씨가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4)”

가시떨기 밭은 말씀이 어느 정도 뿌리 내려서 잘 자라는 밭입니다. 그런데 곧 그 한계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지내는 중에 숨겨져 있던 가시도 함께 자라서 기운이 막히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시가 있습니까? 첫번째 염려의 가시는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생깁니다. 염려가 시작되면 여기에 온 생각이 집중되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두번째 재물의 가시는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이런 욕심에 사로 잡히면 돈 벌 궁리만 하게 되고 돈이 안 되는 말씀 공부는 점점 소홀히 여기게 됩니다. 세번째는 술 취함과 음란을 비롯하여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종류의 향락의 가시입니다. 온갖 재미와 쾌락에 빠지면 빠질수록 말씀에 대한 소원은 바닥을 향해 내려가기 마련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데 세상과 무관하게 살 수 없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염려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 너무 집착하면 결국 말씀으로 향해야 할 삶의 에너지를 그것들이 다 빨아들이게 됩니다. 돈과 즐길 거리에 모든 관심이 쏠리니 말씀 공부는 형식적이 되고 말씀을 들어도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혼 없는 성경 공부를 하게 되고 영혼 없는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넷째, 말씀의 씨가 좋은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15)”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지킨다는 점입니다. `지킨다`는 말은 원어로 보며 '붙들다, 보존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시련이나 유혹, 장애물 앞에서도 말씀을 계속 붙잡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계속 붙잡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요즘 광고를 보면 단기 코스, 속성 과정 등이 유행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단기 코스도 속성 과정도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부터 열매를 맺기까지 말씀에 집중하고 깊이 묵상하며 내 마음 속 우상과 싸우고 죄를 회개하는 길고 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영광스럽고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임하게 됩니다.

본문 속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이번에 저는 씨에게 감정 이입을 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여기 한 알의 씨앗이 있습니다. 이 씨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다 자라서 백 배의 결실을 맺는 꿈, 풍성한 열매를 보고 기뻐하는 농부의 모습을 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드디어 밭으로 떨어질 때 씨앗은 이 밭에서 맺게 될 열매에 대한 기대로 얼마나 그 마음이 설레겠습니까? 그런데 밭에 떨어진 씨는 갖가지 수난을 당합니다. 어떤 씨는 밭이 자기를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무관심과 냉대를 경험합니다. 뭘 해보기도 전에 공중을 날던 새의 먹이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씨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점점 말라가다가 결국 타 죽고 맙니다. 어떤 씨는 옆에서 같이 자라는 가시의 강력한 기운에 목이 졸려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겨우 맺은 열매라고 해 봐야 너무 작고 초라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씨앗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맙니다. 씨앗의 일생은 좌절과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씨앗의 아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짠하지 않으십니까? 씨앗이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너무 부당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 씨앗처럼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도를 해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말씀에 무관심하고 적대적인가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즘 오은영 박사의 클리닉에서 진료 예약을 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씀 공부 초청에는 다들 시큰둥합니다. 말씀 공부를 하더라도 말씀 앞에서 내가 변화되길 원치 않습니다. 딱 선을 그어 놓고 나의 생각,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은 건드리지 못하고 합니다. 돈이 되는 일, 재미 있는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정작 말씀을 듣고 배우고 순종하는 일에는 투자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것 다 하고 남는 에너지가 있으면 그제서야 말씀도 한 번 들어보겠다는 식입니다. 이럴 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 비유하자면 씨 뿌리는 사람 역시 좌절과 수난을 함께 겪습니다. 이 귀한 말씀을 왜 안 받아들일까 참 답답합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사람이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무런 열매 없음으로 결론이 나면 너무 슬프고 허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대우를 받으면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경 선생에게는 피할 수 없는 비애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차라리 아예 씨를 뿌리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나쁜 밭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착하고 좋은 밭도 있습니다. 나쁜 밭에 떨어진 것에 낙심하여 더 이상 씨 뿌리는 일을 중단하면 좋은 밭에도 더 이상 씨가 뿌려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은 백배로 결실하기 때문에 99번 실패했다고 해도 씨 뿌린 일이 결코 헛되거나 손해일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다가 수많은 좌절과 고난을 겪을지라도 우리가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고 권면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열매 맺을 사람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광범위하게 증거되고 전파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밭을 가리지 말고 밭을 탓하지도 말고 넓게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을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가운데 순결한 꽃들이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을 함께 보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소망 가운데 우리가 계속 부지런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비유를 씨 또는 씨를 뿌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면, 이제 반대로 씨가 떨어진 밭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비유의 중요한 특징은 밭의 상태가 단계별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각 단계를 보면 씨가 흙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단계, 양분과 수분을 충분히 공급 받아 무럭무럭 자라는 단계, 마지막으로 풍성히 결실하는 단계입니다. 좋지 못한 밭이란 이 각각의 단계에서 넘어야 할 고비를 넘지 못하는 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좋은 밭이란 각 단계마다 그 시기에 이루어야 할 일을 이루어 가는 밭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씨가 자라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반짝 잘하는 것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한 고비를 넘겼다 하더라도 다음 고비를 또 잘 넘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내로 결실한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때문입니다. 우리 내면의 타락한 본성이 말씀을 거부하고, 말씀에 순종하기 싫어하고 자기 생각을 더 앞세우며, 수시로 붙어 닥치는 크고 작은 시련에 흔들리며, 세상의 유혹에 끌려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서 열매 맺을 때까지 전 과정은 마치 고지를 빼앗을 것이냐 빼앗길 것이냐를 놓고 싸우는 치열한 전투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일단 그 말씀을 마음을 활짝 열고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살고 죽는 것이 달려 있다는 각오로 단단히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뭔가 들은 것 같긴 한데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들은 말씀에 순종하고자 애써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으면 실제로 원수를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내 기존의 생각과 가치관과 반하는 말씀이라면 기꺼이 나를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맨날 들어도 변화는 없고 늘 고만고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수시로 찾아오는 염려와 물질에 대한 욕심과 세상 향락에 대한 갈망과 싸워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초기에 뿌리 뽑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뽑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한 번 뽑았다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뒤돌아보면 어느새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또 자라고 있습니다. 보이는 족족 지체하지 않고 뽑고 또 뽑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 대신 말씀이 잘 자라도록 물도 주고 비료도 주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내 삶의 에너지를 말씀을 생각하고 붙드는 일에 투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약속한 풍성한 삶의 열매들이 맺히지 않습니다. 이럴 때 말씀에 능력이 과연 있나 의심하기도 하지만 실제 문제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자라던 가시를 제거하지 않은 내가 문제입니다. 이 모든 싸움을 끝까지 싸우고 끈기 있게 기다렸을 때 마침내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나라가 내 맘 속으로 들어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결실은 백 배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동안의 모든 싸움과 수고를 단숨에 잊게 만들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잘 싸울 수 있도록 우리가 고비를 잘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또한 신앙 공동체 안에 함께 있는 목자님들이, 동역자들이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씨앗의 꿈이 이루어지는 좋은 밭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심령으로 붙들고 실천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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