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창무 2022. 5. 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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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8-1 강 / 이창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말씀 / 누가복음 6:17-26
요절 / 누가복음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난 달 있었던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대회 3,000 미터 계주 결승전 경기를 보셨습니까? 우리 나라는 마지막 바퀴까지 1, 2위와 크게 뒤쳐진 3위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코너에서 최민정 선수가 스퍼트를 내기 시작하더니 결승선에 가장 먼저 골인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순간 1, 2위로 달리던 선수들이 ‘이게 뭐지?’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장면이 카메라에 찍혀 가장 압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역전이 펼치지는 곳이 또 있으니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장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반전 드라마를 써 내려가시는 하나님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17)”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열둘을 사도로 부르신 후에 그들과 함께 내려오셨습니다. 그곳에는 제자의 많은 무리와 여러 곳에서 온 많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평지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서 평지 설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중에 누구를 주대상으로 평지 설교를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20a)”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직전 주목하신 대상은 제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지 설교는 전 인류의 보편적인 윤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입니까? 제자는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가죽 부대입니다. 제자는 옛 이스라엘인 유대 민족을 대신할 새 이스라엘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할 예수님의 대리자들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새 시대에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법도가 필요합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 산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야 할 법인 십계명을 산 아래로 가지고 내려왔듯이, 예수님은 산 아래 평지에 서셔서 새 이스라엘인 제자 공동체의 법을 선포하고자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 중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서론은 20절부터 23절까지 나오는 네 가지 복과 24절부터 26절까지 나오는 네 가지 화로 확연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가 서로 짝을 이루며 맞물려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과 저주를 선포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복과 저주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복과 화가 어떻게 짝지어져 있는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20b)”

예수님은 먼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처음부터 놀라운 반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가난을 찬양하시거나 제자들에게 가난할 것을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가난 그 자체가 복이 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은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둘 때 겪게 될 수 있는 가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마찬가지로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얼마든지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숱한 헐벗음과 배고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 목자님들 중에도 세상에서 잘 나가고 부유하게 살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들 역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들을 스스로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복이 있다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복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장차 너희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즉 이미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왜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가난한 자가 그만큼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을 간절히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구합니다.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부요한 자는 어떻습니까?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

부요한 자는 가난한 자와 달리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물질과 재정적인 안전이 있습니다. 이런 경제적인 풍요함이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 그 자체가 나쁘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재물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재물은 사람들은 자기 만족에 빠지게 하고, 재물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의 대조를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단순히 재산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가난한 나의 제자들이여!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너희들의 것이다” 지난 주 봄 스텝 수양회에서 특강을 하신 최영기 목사님이 서두에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쇠락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목사님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처음에 복음이 가난한 어려운 사람들에게 들어가면 복음이 꽃을 피웁니다. 그 결과 영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도 큰 축복을 받습니다. 잘 살게 되면서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이미 유럽이 그랬고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가 가난했을 때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의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가 갈급한 우리 심령에 충만하게 임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나의 구주 예수님 때문에 그저 행복했습니다. 라면 하나를 끓여 몇이 나누어 먹어도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집도 있고 차도 있고 계절 따라 여행을 갈만 한 여유도 생겼습니다. 물질적 소유에 비례해서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도 함께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는 열망 대신 더 윤택하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더 커진 것은 아닐까요? 만약 이렇게 쭉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가난한 심령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심령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지금 주리고 우는 자와 지금 배부르고 웃는 자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1)”

예수님은 지금 주리고 우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는 지금 배고픔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가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부주의했거나 자유분방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수 있지만 정말 이렇게 해서라도 허기를 채우려 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4장 11절에서 바로 이 시각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이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다 보면 눈물을 삼켜야 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불의한 세상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눈물이 납니다. 온 힘을 다해 양육했던 사람이 도중에 멀리 떠나 버리면 눈물이 납니다. 삶의 크고 작은 고난들로 인해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리고 우는 자가 겪는 상황을 “지금”이라는 말로 강조하십니다. 지금은 배고프고 지금은 눈물이 나지만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이 상황의 반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반전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은 주린 자가 곧 배부를 것이고 우는 자는 곧 웃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반전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까? 가난한 제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렇게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까?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 만족스러운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쉬지 않고 벌어지는 치열한 내적 싸움과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 밖에는 우리를 넘어트리려 하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있습니다. 눈물 나는 일이 있고, 한숨 나는 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놀라운 반전의 드라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가진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반전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배부름과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가 되시기에 우리는 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마라의 쓴 물을 통과한 후에는 엘림의 생수를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반면 지금 배부르고 웃는 자는 어떻습니까?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25)”

예수님은 지금 배부른 자와 웃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번에도 역시 예수님은 배부른 것과 웃는 것 자체를 반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배부르고 웃는 자는 안락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무관심한 사람을 묘사한 것입니다. 지금 배부른 자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맛보며 누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지금 배부른 자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지금 웃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더라도 피상적으로 듣고 맙니다. “아! 그런가?” 정도로 반응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웃을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즐거운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놓치기 싫은 것들, 지금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미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선택하기 부담스럽습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영원히 별 일 없이 이대로 쭉 갔으면 합니다.

고대 로마의 개선식에는 장군 곁에 붙어서 계속 이 말을 들려주는 전담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바로 “메멘토 모리” 곧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의미의 라틴어입니다. 개선장군이 아무리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해도 너는 신(神)이 아니라 한 인간일 뿐임을 잊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상황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물질을 다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고, 나에게 안정감을 주던 지위를 상실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웃는 자는 그날에 애통하며 울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다 사라진 후 “내가 왜 진작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흘리며 살았을까?” 후회해 보아야 소용이 없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가장 잘 만드시는 요리가 무엇이냐는 난센스 질문이 있습니다. 정답은 ‘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잘 뒤집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배고프고 울고 있다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 배부르고 웃고 있다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우리가 반전의 드라마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나의 만족과 기쁨의 원천으로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거절 당하는 자와 칭찬 받는 자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22)”

예수님은 제자들이 핍박을 만날 것을 예고하십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거부 당하는 모습을 네 개의 동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묘사하십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미워하며, 제자들을 멀리하고, 제자들을 욕하고, 제자들의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이런 일을 당합니까? 그 이유는 “인자로 말미암아” 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일을 당하는 이유는 한 가지,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더 나아가 이런 명령까지 하십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날이 도대체 언제일까요? 여기서 그 날은 장차 임하게 될 심판의 날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그 날은 바로 앞에 나오는 핍박을 받을 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중에 한참 후에 박해자들이 심판 받을 그 날에 기뻐하며 뛰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핍박을 받고 있는 지금, 미움을 받고 있는 바로 그 날에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 마냥 껑충껑충 뛰면서 온 맘으로 기뻐하라 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첫번째 이유는 하늘에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상을 받을 때보다 더 기쁜 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을 때 수상을 예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의 충성과 헌신을 아시고 장차 반드시 상을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기뻐 뛰놀 수 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선지자들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늘 그런 일은 반복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핍박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앞서 갔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명예로운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와 대조적으로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6)”

예수님은 모두에게 칭찬 받는 사람은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칭찬 받는 일이 나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칭찬과 인정을 받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모두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을 반드시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선호가 다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 한다면 각 사람의 입맛대로 기준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예는 구약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왕은 물론 일반 백성까지 두루두루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거짓으로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 분을 제외하고 모든 이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단 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의 칭찬과 모든 사람의 칭찬, 이 두 가지 중에 무엇이 더 중합니까? 칭찬을 얻기 위해 진리를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그러나 춤추는 고래는 정상적인 고래가 아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눌러주었습니다. 저는 좋아요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다음에는 더 공감 가는 글을 써서 칭찬을 받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춤추는 비정상적인 고래가 바로 ‘좋아요’ 숫자에 놀아나고 있는 나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목표로 삼는 사람은 결국 그 끝에서 비참한 결과를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으려 한다면 포기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일단 전도와 선교를 포기해야 합니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 신앙을 드러내는 일도 포기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두더지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입맛에 쏙 드는 말로 아첨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최고다. 당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이런 말들을 해주어야 합니다. 절대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당신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지옥에 갈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들 중에도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제자도에서 박해와 미움 받는 것을 제거하고 나면 뭐가 남습니까? 이렇게 복음에서 알맹이를 다 빼고 나면 뭐가 남습니까? 아무 영양가 없는 껍데기만 남을 것입니다. 포장만 그럴 듯한 거짓 제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싫어해도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대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에서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히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식은 땀이 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또한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라는 인증을 받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이 겪는 고난과 영광에 동참하는 복을 누리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복과 화에 대해서 짧은 이 세상의 삶이라는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입니다. 무엇인 진정 복이고 화인가는 영원이라는 잣대로 판단할 일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비추어 볼 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복이 복이 아니고 화가 화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이 세상의 짝퉁 보물에 현혹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 대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진짜 보물을 얻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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