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많은 죄 사함, 많은 사랑

이창무 2022. 5. 1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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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0 강 / 이창무

많은 죄 사함, 많은 사랑

말씀 / 누가복음 7:36-50  
요절 /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개혁주의 3대 신앙 고백서 중에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삼 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의 제목은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입니다. 2부의 제목은 “우리의 구속에 관하여” 입니다. 1부와 2부를 통해서 비참한 죄인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의 삶 전체를 다루고 있는 3부의 제목은 바로 “우리의 감사함에 관하여” 입니다. 이 제목 자체가 참 의미심장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삶의 모든 동기는 구원의 은혜, 죄 사함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있느냐가 바로 우리의 구속에 관하여,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가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 사함을 받았는 지 깨닫고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36)”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드로의 본명과 같은 시몬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웬일로 예수님을 초대했을까요? 지난 주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에 은혜를 받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요즘 뜨고 있는 분이라 한 번 알아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찌되었든 시몬은 함께 식사하기를 청했고 예수님은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37)”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한 여자가 거기 나타났습니다. 이것 자체가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당시에 이런 식사자리에 동네 사람들이 와서 초대된 손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여자가 죄를 지은 여자로 온 동네에 소문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죄였을까요? 남의 남편을 유혹해서 가정을 파탄내기라도 했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은 온 동네가 다 알고 있는 것을 볼 때 여자가 아마도 매춘부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정말 그런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여자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죄인이라 낙인 찍힌 여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여자가 바리새인의 집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파격인데, 그 다음 행동이 더 파격적입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38)”

당시 유대인들은 특별한 식사를 할 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먹었습니다. 낮은 식탁 앞에 옆으로 누워 머리는 식탁으로, 발은 뒤를 향하게 했습니다. 여자는 비스듬히 누워 계신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 발 곁에 섰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여자가 무엇을 하려 하나 숨죽여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간 여자는 갑자기 감정에 북받친 사람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훌쩍이며 눈물을 글썽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눈물샘이 터진 것처럼 도무지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여자가 흘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은 흥건히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자신의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여자가 공중 앞에서 머리를 풀어헤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이혼 사유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는 남자를 유혹하려는 행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저 여자가 우리 마을에 온 선지자를 벌건 대낮에 대놓고 유혹하려 하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릴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정성스럽게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하나하나 닦아 드린 후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미리 준비해 온 향유 옥합을 열었습니다. 당시 향유는 매우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여인들이 평소 한 두 방울 씩 모았다가 결혼할 때 팔아서 혼수를 장만하기도 했던 아주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귀한 향유를 아낌 없이 예수님의 발 위에 부어드렸습니다. 이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극도의 존경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을 드려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이 가장 귀한 분,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본문에서 그녀는 마치 벙어리가 된 것처럼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행동은 그 어떤 말보다 큰 울림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 보겠습니다. 여자는 오늘 식사 자리에 나타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오늘 처음 예수님을 만난 것일까요? 암만 생각해도 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오늘 여자이 보여주는 행동을 설명할 길이 마땅치 않습니다. 또한 이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 그렇게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이 여자와 예수님과 첫 만남은 어떠했을까요? 한 목자님이 이 여자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던 그 여자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과정은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를 공인된 죄인으로 낙인 찍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심지어 여자 스스로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일생 이 불행한 삶의 구렁텅이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그녀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인에게 구원의 메시지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까지도 용서하시다니! 정말 놀라운 사랑의 메시지였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긴 터널 끝에서 마치 한 줄기 빛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후 사람들의 냉대는 여전했지만 여인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힘입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자신이 사는 동네에 다시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모하던 예수님을 꼭 다시 뵙고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려 예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내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찾아 보니 향유 옥합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이것을 들고 즉시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예수님이 계신 곳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이때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고 갔겠습니까? 바리새인이 자신을 벌레 보듯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수군대며 손가락질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향한 이 여자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녀의 헌신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이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어떤 마음으로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았을까요? 다음 구절을 통해 적어도 우리는 바리새인 시몬의 마음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39)”

시몬은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인 줄 알았을 텐데...'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영문법 시간에 가정법 과거는 현재 사실의 반대라고 배웠습니다. 시몬의 말은 예수님이 선지자일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자인지 알았겠지. 그렇다면 저런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당장에 쫓아내었을 텐데 가만히 두고 보다니? 이 사람은 절대 선지자일리가 없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여자의 과거를 다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시몬의 마음까지도 모두 다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짧은 비유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딱 열 배의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둘 다 갚을 돈이 없게 되자 돈 빌려준 사람이 두 사람의 빚을 전부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둘 중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 당시 아람어에는 ‘감사하다’ 라는 뜻의 단어가 없어 대신 ‘사랑하다’ 라는 동사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의 질문은 둘 중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 라는 질문으로 읽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시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43)”

시몬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각 대답을 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입니다. 은혜를 많이 입었으면 더 많이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예수님은 시몬의 대답이 옳다 하시며 방금 말씀하신 비유를 현재 상황에 적용하십니다. 44절부터 46절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면에서 시몬과 여자를 비교하십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때 입맞추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시몬이 굉장히 큰 무례를 범한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당시에 발 씻을 물을 주고 입을 맞추고 머리에 감람유를 붓는 것은 아주 특별한 손님에게만 행하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시몬이 딱히 무례했다고 볼 순 없고, 예수님을 전혀 특별한 분으로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반면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을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닦아드렸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람유가 아닌 값비싼 향유를, 그것도 한 두 방울이 아니라 한 병을 통째로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감히 초대한 주인조차 베풀 엄두를 내지 못할 지극한 섬김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왜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직접 그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핏 들으면 여자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많은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용된 “이는”이라는 접속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를 나타냅니다. 이 여자가 하는 사랑의 행동은 죄 사함의 근거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면 용서 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시몬은 빚을 진 적도 별로 없고 당연히 탕감 받을 일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감사할 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시몬은 내가 예수님을 집에 초대했으니 예수님이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바리새인들과 달리 이만한 호의를 베풀었으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웬 발 씻을 물에 감람유 타령이냐며 황당해 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한 여자와 바리새인 시몬처럼 교회 안에도 대조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많이 사함을 받은 사람이 있고 적게 사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둘은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차이로 나타나게 됩니다.

적게 사함을 받은 사람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함 받은 것이 적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부담되지 않는 정도로 사랑합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데 방해되지 않는 정도로만 합니다. 인생에서 신앙은 옵션이며 내 자신의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주위에 향유 부은 여인처럼 온 맘을 다해 헌신하는 사람을 보면 왜 저렇게까지 하는 지 이해를 못합니다. 동시에 자기는 쥐꼬리만한 헌신을 해 놓고도 대단히 큰 헌신을 했다고 착각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감사도 사랑도 별로 없는데 쥐어 짜내서 아주 힘들게 헌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큰 헌신을 했는데도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주님이 축복해 주시지도 않는다면서 늘 불만과 불평이 많습니다.

반면 많이 사함을 받은 사람은 내가 얼마나 큰 사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지, 이 추한 죄를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압니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의 희생이, 그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생 갚아도 다 못 갚을 죄의 빚을 탕감 받았는데 무엇을 아까워하겠습니까? 죽었던 나를 살리신 그분께 어떻게 향유를 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이렇게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얻은 것 자체가 기쁠 따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대단한 헌신을 했다. 위대한 희생을 했다.”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비하면 나의 헌신은 너무나 볼 것 없고 초라하다고 생각합니다. 겨우 이렇게 밖에는 감사와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헌신을 보면 정말 눈물 겹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외적 고난만이 아니라 여러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고 실족한 양들을 향한 애타는 심정 때문에 날마다 마음이 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살았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지독한 교만에 사로 잡혀 하나님의 원수로 행했던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그의 일생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미국 미시시피 지역 대부호의 딸로 얼마든지 공주처럼 살 수 있었던 사라 베리 선교사님은 왜 광주의 단칸방에서 연탄불을 갈면서 한국 대학생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셨을까요? 왜 우리 모임의 수많은 선교사님들은 언어도 문화도 잘 모르는 낯 선 타국에 맨몸으로 나가 그 숱한 고생을 사서 하셨을까요? 왜 수많은 목자님들이 더 편안하고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들을 스스로 포기하고 한 영혼을 구원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이토록 헌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캠퍼스 선교 단체의 많은 간사님들이 최저 임금도 안 되는 사례비로 근근이 버티며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캠퍼스를 누비며 섬기고 있습니다. 저와 친분이 있는 한 목사님은 밤에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가출 청소년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에서 아예 가출 청소년과 함께 먹고 자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들을 말릴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입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죄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한 때는 바리새인 시몬과 같은 사람들로부터 미친 거 아니냐? 바보 아니냐? 하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내 삶의 가장 귀한 것, 향유 옥합을 깨서 주님께 드릴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야기 속에서 누구와 닮아 있습니까? 향유를 부은 여자입니까? 아니면 바리새인 시몬입니까?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고 감사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으로 용서받게 된 우리는 과연 큰 죄를 용서받은 만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은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어느새 의인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있을 자리는 바리새인 시몬이 앉아 있는 잔치의 상석, 의인의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있을 자리는 예수님 발 아래 용서 받은 죄인의 자리입니다. 주님이 주신 죄 사함의 은혜에 감격해 눈물 흘리는 그 자리,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나의 향유 옥합을 열어 주님의 발에 부어 드리는 그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이제 우리가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적게 사함 받은 사람의 자리를 그만 정리하고 많이 사함 받은 사람의 자리로 내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발 아래서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더욱 넘치게 경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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