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이창무 2022. 4. 2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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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7 강 / 이창무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6:12-16
요절 /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점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또는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찰스 스윈돌 목사는 이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숫자가 수천 명이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제자는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이 최소한의 숫자였을 것입니다.

수천의 무리와 수백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열 두 명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 칭하십니다.

  • 과연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부르셨을까요?
  • 예수님은 그들을 왜 부르셨을까요?
  • 예수님을 누구를 부르셨을까요?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을 재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부르셨는가?

만약 내가 예수님의 자리에 있었다면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 명의 후보들이 있는 가운데 몇 명을 어떻게 불러내시겠습니까?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일단 후보자 명단부터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프로필을 조사할 것입니다. 학력과 경력은 어떻게 되는지, 전과는 없는지, 가정 형편과 재정 상태도 점검이 필요할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정말 중요한 가문과 지파에 대한 조사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런 사람은 정말 제자로 부르지 말자”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의 목록, 소위 말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불 같이 화를 잘 내는 사람, 항상 부정적인 사람, 의심이 많은 사람, 서로 높아지려고 싸우는 사람,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이해를 못 하는 사람, 너무 이기적인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낙마 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보자를 압축한 다음 면접을 봐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나를 따를 수 있습니까?”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보다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습니까?” 등의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얼마나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정과 충성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회사에서 채용 업무를 담당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절차로 사람을 뽑았습니다. 새 정부의 장관 후보자를 선정할 때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사도를 부르셨을까요?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12)”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왜 하필 산이었을까요? 수많은 무리들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 장소가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한적한 장소에 종종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기 위해 가장 먼저 아버지의 뜻을 간절히 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까?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늘 꾸준하게 기도하시던 예수님에게도 잠을 한 숨도 자지 않고 밤새 기도하시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와 비견될 수 있는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을 예수님은 거의 십자가에 준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처음부터 밤을 샐 작정을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음 속에 떠올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다 보니 어느새 밤을 홀딱 새시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어떻게 이 일을 이룰 것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합니다. 실패하지 않을 방법이 무엇인지, 가장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필요한 자원은 어디서 조달을 할 것인지 등등을 놓고 씨름합니다. 때로는 너무 고민이 되어서 잠이 안 올 때도 있습니다. 자문을 받으려고 선배, 친구, 부모님 등등 주위 사람들에게 카톡도 보내고 전화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고 있는 중대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언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이 말이 계획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계획은 할 수 있고 또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하셨습니다. 그 구체적인 표현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에 앞서 밤이 새도록 기도를 하셨습니다. 후보자들의 이력서 검토하느라 밤을 새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밤을 새셨습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이 모든 일을 이루는 핵심적인 열쇠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암1부에서 너무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목자님들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계승자를 세워야 할 곳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기도, 간절한 기도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씨름 없이 사람의 생각을 따라 가다 공동체 전체가 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세워질 수 있도록 우리가 정말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들을 왜 부르셨을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왜 부르셨는가에 대한 부분을 분명하게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무엇이라 칭하셨는지에 그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13)”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란 쉽게 말해서 대리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대리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후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배척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시는 것으로 구원 역사가 끝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일을 예수님을 대신하여 섬길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열둘을 사도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예수님은 신약 교회의 열두 기둥들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열둘이었을까요? 다다익선이라고 이왕이면 한 백 명쯤 세우면 안 될까요? 일단 이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통해서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뜻을 저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을 대신할 새 이스라엘로 열두 명의 사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제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또한 열둘을 택하신 것은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양육하고 훈련할 수 있는 적절한 숫자가 열두 명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대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리할 사람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어떤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다 알아야 합니다.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릴 정도가 되어야 제대로 된 대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깊이 알려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합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함께 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수박 겉 핥기처럼 안다면, 어떻게 대리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숫자만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면 백 명, 천 명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적은 수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꾸준히 배운 사람,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으로부터 감화를 받은 사람, 예수님과 관계 속에서 수많은 스토리가 겹겹이 쌓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섬기느라 바쁘신 와중에도 항상 열두 제자를 키우는 일에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이렇게 양육을 받았을 때 사도행전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악한 영을 내어 쫓는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대신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양육을 받은 후 세상으로 파송을 받아 그곳에서 예수님의 대리자로 살아 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여서 열심히 예수님을 배우고 흩어져서 열심히 예수님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한 때 저는 사명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좀 지겹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기승전사명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숨이 막히고 답답하니까 사명 말고 다른 이야기 좀 하자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명을 너무 등한시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정반대의 위기의식이 있습니다. 분명히 사명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명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사도 베드로에게 하셨던 마지막 유언과도 명령은 바로 “내 양을 먹이라” 였습니다. 그저 천국 가는 티켓을 얻었다는 사실을 좋아하다가 하늘 나라 가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교양 있는 종교적인 생활로 삶을 윤택하게 유지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사명, 양을 먹이는 양육의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간절한 기도 가운데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에게 이 고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런 우리가 만나서 무엇을 할까요? 사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명을 놓고 고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합격과 승진과 건강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해야 하지만, 영혼 구원을 위해서, 세계 선교를 위해서, 제자도와 영적 성장을 위해서 기도해야 마땅한 일 아닐까요? 

이럴 때 나에겐 양이 없다고 할 말이 없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다 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자녀들이 다 우리들의 양입니다. 대학생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을 양육하는 것만이 사명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구속 역사를 계승할 예수님의 대리자로 세우고 양육하고 파송하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진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전도는 수평적인 전도와 수직적인 전도가 있습니다. 수직적인 전도가 수평적인 전도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지난 번 테레사 안 선교사님의 자녀 교육 특강을 들으면서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중에서 제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이 된 것이 요셉 안, 테레사 안 선교사님에게 자녀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세우고 양육하겠다는 뚜렷한 목표 의식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두 분은 그 목표 의식 가운데 성장의 기회를 주고 끊임없이 도전하셨습니다. 두 자녀가 중학교 때부터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고등학교 때 이미 메시지를 전하도록 했습니다. 어리게만 보지 않고 쉽게 편한 길만 가게 하지 않고 조금 힘들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부모가 얼마나 많은 마음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테레사 안 선교사님이 부모가 죽어야 자녀가 살고 부모가 살려고 하면 자녀가 죽는다는 말까지 하셨겠습니까? 듣고 보니 자녀를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려 하면서 부모가 예수님의 마음과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리자로 부르심 받는 것!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 영광을 나도 누리고 또한 사랑하는 자녀들도 함께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음 세대를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의 사도로 키우는 일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셨을까?

산에 올라온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열두 사도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14-16)”

먼저는 베드로입니다.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소망 가운데 이름을 베드로라 지어 주셨습니다. 복음서의 베드로를 보면 A+를 받았다가 잠시 후에 F를 받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특징은 중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그는 일생 베드로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이었지만 사실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온 장본인이 바로 안드레입니다. 그 다음 등장하는 두 인물은 역시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함께 핵심 제자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인생이 서로 엇갈립니다. 야고보는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는 친구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빌립이 데려온 나다나엘이 바로 바돌로매입니다. 그 다음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했던 마태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는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던 세리 출신입니다.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질문 덕분에 기록하게 된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 다음 등장하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아버지가 알패오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음 셀롯이라고 부르는 시몬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셀롯은 열심당원이라는 뜻입니다. 열심당은 반로마 테러 단체였습니다. 마태와는 정반대 극단에 서 있던 인물인데 예수님 때문에 한 지붕 아래에서 한 솥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명의 유다가 있습니다. 먼저 나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다른 복음서에서 다대오라고 소개됩니다. 열두 사도 명단에서 항상 끝에 나오는 사람은 갸롯 유다입니다. 갸룟은 유다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지명입니다. 누가는 그를 예수를 팔게 될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두 제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뽑힐 만한 사람들이라고 보십니까? 먼저 이들 중 아무도 종교 지도자 출신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제사장 출신은 전혀 없습니다. 당시 어부와 세리는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그리 가방 끈이 긴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잘 하는 것을 보고 학문이 없는 평범한 인물 인줄 알았다가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들이 믿음이 출중했습니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게다가 영적으로 깨닫는 것도 무척 둔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죽하시면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내가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탄식하셨겠습니까?

또한 그들은 종종 누가 더 크냐고 놓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누구도 스승의 발을 씻기지 않을 뿐더러 자기들끼리 자존심 싸움 하느라 서로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하는 행동을 보면 다 큰 어른이 왜 이런 초등학생 같은 짓을 계속 벌이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 천명의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과 120명이 넘는 제자들 중에 이들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없었을까요? 더 성격인 온순한 사람, 더 가정 교육을 잘 받아 인간 기초가 훌륭한 사람, 배운 것이 많은 사람, 믿음이 더 큰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니고데모 같은 사람을 부르셨으면 제자의 급이 확 업그레이드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 이보다 더 큰 믿음이 없다고 칭찬하셨던 백부장을 부르셨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열둘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위대하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런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은혜인 것을 압니다. 주님의 은혜는 어떤 인간적인 기질이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모래성처럼 잘 부서지던 시몬이 든든한 반석 베드로가 된 것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의 은헤는 내면에 부패와 죄성을 이기게 해 줍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에 눈 멀었던 세리 마태가 긍휼의 목자, 성 마태가 된 것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부르셨던 사도들은 만 가지가 부족했지만 단 한 가지 예수님이 나를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미련하고 믿음이 연약하고 이해가 더딘 자들이었지만 그 은혜를 알았기에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처지를 압니다. 우리는 너무 믿음이 적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몹시 느립니다. 성격도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급하고 화를 쉽게 냅니다. 부정적이고 의심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야심은 많아서 인정 받지 못하면 못 참는 성격입니다. 심지어 맨날 문제만 일으키는 것 같아서 내가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이런 것을 모르고 부르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속속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부르셨습니다. 아시면서 왜 부르셨습니까?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쓰시는 주님의 은혜, 나 같은 사람도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은혜, 나 같은 사람도 소망 두시는 주님의 은혜를 나타내라고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저는 너무 부족해서 못 해요. 안 돼요” 라는 말은 그만해야 합니다. 부족하니까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향한 부르심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은혜로 부르신 주님을 사랑하기에 힘쓰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도들은 우리처럼 연약하고 부족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놓더라도 사명만은 지켜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잊지 맙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지 나타내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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