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창무 2022. 3. 27.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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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4 강 / 이창무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 / 누가복음 5:1-11
요절 / 누가복음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부모와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선생님과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자녀와의 만남 등등 우리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교양관 앞 벤치에서 목자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제 인생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정말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인생 자체가 바뀝니다. 그 모든 만남 중에 제일 중요한 만남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로 예수님의 만남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만남은 그 어떤 만남도 줄 수 없는 위대하고 풍성한 삶으로의 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 산 증인이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시몬 베드로입니다.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묵상하면서 우리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1,2)”

이곳은 게네사렛 호수가입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것을 보니 때는 이른 아침입니다. 서서히 물안개가 걷히고 호수 표면에 반사된 햇살에 눈이 부실 때입니다. 평소 같으면 가끔씩 들리던 물새의 울음소리만이 고요함을 깨트릴 시간대입니다. 그러나 이 날만은 북적이는 사람들이 내는 크고 작은 소음으로 호숫가는 요란합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밤새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의 말씀에 듣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몰려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서 자기 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시몬을 비롯한 어부들입니다. 그들은 밤샘 조업을 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만사를 제쳐 놓고 당장 집에 가서 발 뻗고 자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몬은 다음 조업을 위해 열심히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볼 때 시몬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매우 성실한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할 일은 끝마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주위 사람들에 의해 쉽게 휩쓸리지 않고 묵묵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 덕분일까요? 시몬은 지금까지 나름 자기 삶을 잘 꾸려왔습니다. 자기 배를 가진 선주입니다. 을이 아니라 갑입니다. 게다가 앞의 장에 시몬의 장모가 나온 것으로 봐서 그는 결혼도 하고 자기 집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몬은 이미 인생의 절반쯤은 성공한 사람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제 시몬은 속으로 이렇게 결심했을지 모릅니다. "앞으로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살자. 열심히 살다 보면 모든 것이 다 잘 될거야" 

우리 주위에는 본문의 시몬처럼 성실하고 의지력이 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느라고 너무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인간 기초가 훌륭하고 특별한 문제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기의 판단과 결정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 스스로의 힘으로 그럭저럭 잘 꾸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보통 예수님께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남들이 다 믿어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예수님이 없어도 자기 노력과 성실로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을까요?

5절에서 시몬은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날 밤 시몬은 열심히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물고기가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다 뒤졌습니다. 단 5분도 쉬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처절하고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이럴 바엔 그냥 쉬는 편이 더 나았습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을 때 실망한 표정으로 맞이할 아내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합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구나. 노력과 열심과 성실로도 안 된다면 다른 해결책이 무엇일까?” 이날 아침 시몬은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뾰족한 답이 없었습니다. 답이 없어도 어쩌겠습니까? 시몬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별 수 없이 오늘 밤에 또 나와서 그물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인생도 뻔합니다. 날마다 호수에 나가 똑같은 물고기 잡는 일을 반복할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이번 달이나 다음 달이나 달라질 것이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물고기가 조금 더 많이 잡혀서 웃고 어떤 날은 조금 덜 잡혀서 웃고, 대부분의 날들은 웃을 일도 울 일도 없이 그냥 그렇게 지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한 평생을 살다가 죽어 무덤에 묻혀 게네사렛 호수의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시몬이 아는 인생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딱히 남은 것이 없었다' 이 날 호숫가에서 시몬은 이렇게 앞으로 펼쳐질 인생의 축소판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열심과 성실과 노력으로 웬만한 것들은 다 해결해 나가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과 성실과 노력이 유일한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실히 노력하고 열심히 했는데도 안 되는 일은 안 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이럴 때 지금까지 자기 의지와 성실을 믿고 살아온 사람은 너무 괴롭고 힘이 듭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고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꼭 나쁘게만 볼 일일까요? 알고 보면 이 순간이 내 인생에 찾아온 새로운 기회일 수 있습니다. 도무지 빈틈을 찾을 수 없었던 자기 세계라는 단단한 껍질에 금이 가고 균열이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갈라진 틈 사이로 예수님의 은혜의 빛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3)”

아니나 다를까 시몬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구체적으로 배를 좀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십니다. 착한 시민 시몬 베드로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옆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다 듣게 됩니다. 암만 봐도 시몬이 예수님의 낚시에 걸려든 것 같습니다.

대개 우리 목자들은 시몬 같은 스타일의 사람에게 소원을 크게 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아서 잘 살 사람인데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을 의지하고 싶어할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 중에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을 시키기에 좋은 사람이라 그럴까요? 그보다는 우리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속도보다는 방향이다”라는 말이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빨리 가면 뭐하겠습니까?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인생 방향 설정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소망을 두고 지켜 보다 보면 기회가 옵니다.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분명 실패하고 절망과 좌절에 자기가 무너져 내릴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섬길 목자가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가 이 시대 수많은 시몬들을 섬길 그런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다시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배를 빌려주어서 고맙네."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 보라 하십니다. 참 뜬금없는 말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명령보다는 시몬의 얕은 세계를 떠나 깊은 세계를 직접 경험해 보라 하시는 초청의 음성에 더 가깝습니다. 시몬이 알고 있는 세계는 상식과 이성과 경험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익숙하고 안전하긴 하지만 일생 그 세계 속에 갇혀서 맴맴 도는 듯한 한계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얕은 바다만 아는 시몬을 예수님은 깊은 바다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깊은 바다는 상식과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는 놀라운 세계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 위대하고 존귀하신 예수님의 세계, 늘 새로운 위로와 힘을 주시는 성령님의 세계입니다.

얼마 전 이어령 교수가 소천하였습니다. 이분은 수십 년간 대한민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인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끼고 사랑하던 딸이 중한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날카로운 지성이 딸에게 아무런 힘도 도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됩니다. 딸을 지탱해 주는 힘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영적인 세계에 마음을 열고, 믿음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써낸 책이 바로 '지성에서 영성으로'입니다. 만약 시몬 베드로가 책을 쓴다면 “얕은 바다에서 깊은 바다로” 라고 썼을 것 같습니다.

책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국민일보에서 기독교계를 취재하던 이태형 기자가 쓴 책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더 있다”입니다. 책의 내용도 좋지만 짧은 제목이 더 오랫동안 제 마음에 울림이 주었습니다. 내가 알고 경험한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무언가 더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십 대 때 제 생각과 판단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십 대가 되어 뒤돌아보니 몇 줌이 되지 않은 얕은 인생 경험에 기초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목소리를 높이고 고집을 부렸던 걸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이후로 이런 일은 반복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제가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많을까요? 그 세계는 얼마나 깊을까요?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예수님은 이렇게 시몬에게 하셨던 것처럼 더 깊은 세계 속으로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더 있으니 더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 아침에는 깊은 곳에 물고기가 없다는 것이 이 동네의 상식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밤샘 작업을 통해 현재 호수에 고기가 없다는 사실이 경험적으로 입증된 상태입니다. 지칠 대로 지친 시몬 베드로의 몸과 마음의 상태도 다시 고기잡이를 시작할 상태가 아닙니다. 목수 출신인 예수님이 베테랑 어부 시몬에게 어업에 대해 방향을 주시는 것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거절할 이유는 이 외에도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5)”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시몬은 장모의 열병을 꾸짖음으로 낫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권세를 이미 가까이서 체험한 바 있습니다. 자신의 배 위에서 선포되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서서히 그 마음에 서서히 믿음이 자라났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믿음이 생겼고 믿음이 생기니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시몬이 이렇게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순종한 결과가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6,7)”

고기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입니다. 다른 배에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두 배를 가득 채우고도 넘쳐서 배가 물에 잠길 지경입니다. 시몬과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까지 모든 사람이 다 놀랍니다(9,10a). 어업인 시몬의 인생에 이렇게 많이 잡아 본 적이 있을까요?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시몬의 경험과 지혜로 꽤 많이 잡을 수는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배가 잠길 정도로 잡는 것은 클래스가 다릅니다. 이 사건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세계는 이 정도로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그 세계를 경험해 보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세계가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진다고 토로합니다. 성경에서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영적인 세계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없으니 이해가 안 되고 멀게만 느껴지고 남의 이야기처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순종이 해답입니다. 아직 이해가 안 되도 말씀에 의지하여 일단 순종해 보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면 놀랍고 풍성한 영적인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새롭게 열립니다. 그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그제서야 왜 성경이 진리의 말씀인지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e, ut intelligas)”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이 잡은 물고기를 보고 시몬은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합니까? 만약 제가 시몬이라면 예수님에게 동업을 하자고 제안할 것 같습니다. 수익은 50 대 50으로 나누기로 하고, 함께 JS(Jesus & Simon) 수산 주식회사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군 탐지를 하고 시몬이 물고기를 잡으면 됩니다. 갈릴리 수산업계를 평정하고 재벌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고백이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8)”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호칭부터 앞에서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가 됩니다. 그런데 왜 떠나 주시기를 구했을까요? 시몬 베드로가 방금 전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신성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는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입니다. 야곱도 선지자 이사야도 경험했던 바입니다. 왜 두려울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감히 설 자격조차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크심과 나의 작음이 동시에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을 독일의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제(Numinose)”라고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시몬 베드로가 자신의 죄인됨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착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 자타가 공인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베드로는 진실되고 진지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변두리에 밀어 놓은 채 자기의 꿈을 쫓아 자기 의지와 성실만을 의지하면 살아왔던 그 삶 자체가 죄에 물든 삶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실질적인 무신론자처럼 살아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방향 설정의 기초가 무엇일까요?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쌓은 인생의 탑은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항상 주위 사람들과 비교 속에서 자신을 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보다는 더 낫다. 너보다 착하고 너보다 똑바로 산다”는 생각 속에 진짜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거룩하신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그분의 영광과 임재 앞에서 비로서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경배 드리는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 지점은 어디일까요?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10b)”

예수님은 이제까지 물고기를 취하던 인생을 살던 시몬을 사람을 취하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 있으면 살고 물 밖으로 나오면 죽습니다. 말하자면 시몬 베드로는 이제까지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업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반면에 사람은 물 속에 있으면 죽고 물 밖으로 나와야 삽니다. 사람을 취하라는 것은 죄의 바다, 죽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건져 올려 그의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 일은 본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그 일을 이제 나와 같이 하자고 하십니다. 시몬이 동업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시몬에게 동업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 중에 소방관이 있습니다. 소방관이 불 속에서 질식하여 죽어가던 사람을 구해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찬사를 보냅니다. 정말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치가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불 가운데 건짐을 받은 사람이 죽어 영원토록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 받게 된다면 이 땅에서 잠시 건져 냄을 받은 가치가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가 영원히 지속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시몬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일에 부르고 계십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나와 함께 하자고 제안하고 계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 문장의 시제는 미래형이고 형태는 명령문입니다. 곧 사람을 취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의미도 있고, 사람을 취하는 인생이 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되게 하실 분은 예수님이고, 그 뜻에 순종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11)”

이렇게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시몬 베드로는 그 이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약속대로 사람을 취하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단 한 번 설교로 삼천 명이 일시에 회심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가 잠길 정도로 물고기를 잡은 일이 바로 이 사건을 암시하는 예고편이 아니었을까요? 부르심을 쫓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때는 대가가 너무 크고 희생이 많다고 여겼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자기가 무엇을 버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복과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집도 사야 하고 자녀 교육도 잘 시켜야 하고 승진도 해야 하고 노후 대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마치 배와 그물을 붙잡고 물고기만 잡다 죽을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에 예수님과 동역할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것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살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필요한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잠시 이 땅의 현실이 너무 크게 보여 예수님의 부르심을 외면한다면 분명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풍성한 인생, 허무하지 않을 인생, 후회하지 않을 인생,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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