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말씀대로 살아나신 예수님

이창무 2017. 8. 2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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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3

 

말씀대로 살아나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24:1-53

요절 / 누가복음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룬 전기를 읽어보면 대개 시작은 탄생에서부터 마지막은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만약 누가복음이 여느 위대한 사람의 전기였다면 죽음을 다룬 23장으로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한 장이 더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저 여느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무덤에 찾아가 헌화하며 추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때는 안식 후 첫날 새벽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른 시각부터 무덤을 찾아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장례를 너무 급하게 치르느라 미처 시체에 향품을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들의 진심과 사랑이 참 대단합니다. 제자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착해 보니 무덤 입구를 봉인했던 돌이 이미 굴려 옮겨져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십자가도 모자라서 그분의 시신까지 이런 수모를 겪으시다니 깊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바로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무덤에 찬란한 옷이라니 등장부터 드레스 코드가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여자들에게 전하러 온 천사들이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천사들은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들이 묻혀 있는 무덤 사이에서 찾고 있느냐? 똑똑히 보아라. 무덤이 비어있지 않느냐? 예수님은 살아나셨다!" 어떤 사람은 빈 무덤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될 수 있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빈 무덤은 누군가 시체를 훔쳐갔다는 증거로도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전부터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뿐이었습니다. 빈 무덤을 해석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던 이유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무덤은 비어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먼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예수님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야겠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다시 살아났고 야이로의 딸도 다시 살아났고 나사로도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난 후에 또 다시 죽었습니다. 지금 유대 땅 어딘가에는 나사로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죽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영원히 비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신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음 자체를 극복하실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다 청산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죽음 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정말로 나의 죄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용서를 받았는지 확신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보증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신 것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다시 사심도 우리를 대표해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추수할 때 첫 열매의 수확에 비유했습니다. 논에 심은 어느 한 벼에서 이삭이 열린 것을 보면 곧 그 논에 있는 모든 벼에서도 이삭이 열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을 예고하고 보증하는 첫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건강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요즘 살충제 파동의 여파로 달걀 소비가 급감하고 달걀이 많이 들어가는 빵의 소비도 크게 줄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리 몸에 신경을 써도 언젠가는 다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누구나 그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는 같습니다. 바로 무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눕게 될 무덤은 빈 무덤이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날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무덤에서 잠자던 자들이 다 일어나서 예수님처럼 다시는 죽지 않을 영생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장의사는 전부 다 직업을 잃게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해마다 여의도 면적의 1.2배 되는 국토가 묘지로 변하고 있어 큰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되면 다 쓸데없는 걱정이 될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죽음 때문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허탈해 하고 눈물 흘리던 일들은 모두 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 될 것입니다. 꿈같은 이야기입니까? 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현실이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앞으로 일어날 우리의 부활 사건 사이의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겉으로 보면 죽음이 여전히 왕노릇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활의 능력, 부활의 생명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예배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죽음이 쏘는 독화살에 맞아 두려워하고 허무에 빠지기도 합니다. 절망과 슬픔에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두 천사가 우리에게 해 준 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사람들은 영웅들의 무덤을 크게 만들어 놓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합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아예 시체를 약품처리해서 유리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레닌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시체를 약품처리해서 보관하든, 동상을 만들던 그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아니, 무덤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찾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예배합니다. 절망과 슬픔, 두려움과 허무, 죽음의 세력을 이길 힘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누리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현재 우리 삶 속에서 나의 부활, 우리의 부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제자들이 과연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은 천사의 말대로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예고하셨던 대로 부활 사건이 일어났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루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야겠다 싶어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빈 무덤과 두 천사로부터 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제자들은 여자들의 증언을 정신 나간 소리, 헛소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여자들 중에 과거 일곱 귀신 들린 적이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덟 번째 귀신이 들어간 것 같다며 혀를 찼습니다. 천사가 그렇게 중요한 소식을 제자들이 아닌 여자들에게 먼저 전해 주었을 리가 없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이유야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겨우 베드로 한 사람만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왔을 뿐이었습니다. 빈 무덤이라는 객관적인 증거와 여러 명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부활을 믿기 힘든 이유는 부활이 우리의 보편적인 경험에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으심까지는 받아들이는데 부활만큼은 곤혹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지 못하니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합니다. 배추밭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무덤에 구경을 많이 온 바람에 근처에 심어 놓았던 배추 싹들이 마구 밟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동산지기가 화가 나서 예수님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가설입니다. 이 외에도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무덤 오인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깨어나셨다는 기절설, 예수님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어서 돌아가신 후 예수님 행세를 했다는 쌍둥이 형제설 등등 갖가지 설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가설들을 받아들이려면 부활 자체를 믿는 것만큼이나 큰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가설들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은 그만큼 부활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영접하기 위해서는 빈 무덤과 여자들의 증언으로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요?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짐을 챙겨 예루살렘 센터를 빠져 나온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슬픔과 절망과 낙심 속에 엠마오로 낙향하던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길을 걸으며 최근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까? 빈 무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런 주제를 가지고 열 띤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토론을 해 봐도 결론은 없고 제자리만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두 제자 곁으로 다가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제자가 자기 스승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이 변장이라고 했을까요? 말씀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에 의해 가리어졌을까요? 바로 제자의 불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 지금 자기 곁에 계실 리가 없다는 불신의 눈으로 보니까 예수님을 코앞에 두고도 못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야 나! 예수란 말이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어떻게 나를 몰라보느냐?" 하시며 꿀밤을 한 대씩 먹이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치미를 뚝 떼시고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넌지시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은 대답을 말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글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낯선 여행객으로만 알고 있는 예수님 앞에 자신들의 속내를 술술 털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 상 정말 오래 만에 나타나신 말씀과 사역 모든 면에서 탁월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속량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바벨론 포로기 이후 600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 가슴 속에 맺힌 독립의 한을 풀어 줄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들려온 빈 무덤 소식은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휘몰아치듯이 사건들은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사건들 속에 담긴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 잃은 고아요, 눈 뜬 장님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 예수님은 일단 책망으로 제자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 다음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메시아관을 바로 잡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졌던 메시아관은 무엇일까요? 영광에서 시작해서 영광으로 끝나는 영광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서 딱 걸려 멈추어 버린 제자들은 다음 주제인 그리스도의 부활로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비뚤어진 메시아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경 공부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물론 구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모든 구약 성경을 자기에 관한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시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시면서 그들이 말씀에 눈을 뜨도록 도와주셨습니다. 32절에 보면 이때 제자들의 마음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님께서 제자들 마음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Hot한 성경 공부를 하며 길을 걷다 보니 일행은 어느새 목적했던 엠마오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을을 지나쳐 더 가실 것처럼 페인트 동작을 취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날이 저물었다는 핑계를 대고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과의 성경 공부를 통해 이제 겨우 불이 붙었는데 여기서 끄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30)" 이 장면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합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실 때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누가복음 22장 19절이 기억났습니다.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비로소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깨달아졌습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나니 왜 예수님이 부활하셔야만 하는지도 납득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가려졌던 눈이 떠졌습니다. 마침내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거기에 고난 받으시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과연 주님은 성경대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성경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목적지는 그들이 방금 떠나왔던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까? 부활의 목격자이자 산 증인으로서 부활의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까지 두 제자는 슬픔과 절망과 혼돈 속에서 사명도 공동체도 다 버리고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 제자는 기쁨과 희망과 확신 속에서 사명과 공동체를 회복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인생 가운데 일으키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입니다.


플라톤의 국가 제7권에 보면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나옵니다. 동굴 안에서만 살던 종족 중에서 한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동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동굴 밖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빛이 있고, 색깔이 있고, 다양한 생명 현상들이 가득했습니다. 동굴 안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굴 안의 동족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고, 동굴 세계는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곰팡이가 피고, 박쥐만 날아다니고, 어둠침침한 동굴 안의 세계를 전부인줄 알고 살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는 동굴 밖의 세상과 같습니다. 빛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부활 생명을 체험하지 못할 때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가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슬픔과 절망에 짓눌려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동굴 속에 오래 살면 시력을 점점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인 시력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부활 생명의 세계가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아예 없다고 간주해 버리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까?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비례해서 영적인 눈도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만찬을 나누신 것도 역시 성경공부입니다. 칼빈은 설교는 선포된 말씀이고, 세례 성찬 같은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성경 공부가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추격하여 길 위에서 성경공부를 하셨겠습니까? 우리도 성경공부를 하거나 말씀에 기초해서 소감을 쓰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배아래 단전 부위에 난로 하나가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불꽃이 팍 튀듯이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영적인 시야가 열리게 됩니다. 내 삶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말씀의 빛에 의해 조명되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가 확 들어옵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이 경험되어집니다. 비록 짧은 순간일지라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눈앞에 계신 듯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처럼 말씀을 통해 보고 경험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으로 뚫고 들어온 부활 생명의 빛을 경험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제대로 성경을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냉랭했던 마음에 불이 붙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공부를 통해 지금 살아계셔서 내 곁에 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불신에서 믿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소수에 불과했던 부활의 증인들이 점점 확산되어 가는 과정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몇몇 사람들에게 친히 자신을 나타내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이 모인 곳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혹시 유령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문이 닫힌 방 한 가운데 갑자기 나타셨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령이 아니라 육체로 부활하셨음을 여러모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먼저는 내 손과 발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필 손과 발일까요? 그 손과 발에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상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생선 먹는 유령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특별히 자신이 육체로 부활하셨음을 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육체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장으로 암송하는 고린도전서 15장도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부정했던 자들이 초대교회 당시 가장 골치 아픈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영혼만이 선하며 육체는 그 자체로 더럽고 악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육체를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다만 현재는 죄에 오염되어 타락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되면 본래의 선하고 강하고 거룩한 육체를 회복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부활의 육체를 가리켜 신령한 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현재 입고 있는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 이것이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소망입니다.


44절부터 4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입니다. 이번에도 또 다시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경공부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47절과 48절을 보십시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이제 죄 사함의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이 일을 누가 하게 됩니까?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힘만으로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에 너무 벅찹니다. 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한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은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모든 지상에서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먼저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앞으로 제자들의 삶 속에 은혜가 넘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까지 제자들은 이 땅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 곧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후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누가복음 첫 장은 예수님의 탄생 때 마리아와 사가랴의 찬송시로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은 예수님의 승천 때 제자들의 찬송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도 초대 교회 당시 널리 불렸던 찬송시로 2017년 누가복음을 맺고자 합니다. 바로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까지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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