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예수님

이창무 2022. 3. 20. 22:07
반응형

2022년 누가복음 제 3 강 / 이창무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4:16-30
요절 / 누가복음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열흘 전 선거를 통해 윤석열 후보가 차기 대통령 당선인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선인이 대통령으로서 본격적인 직무를 시작하는 날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발표하는 것입니다. 이 취임사 속에는 재임 시에 어떤 일들을 하겠다는 선언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 2절 말씀을 기초로 메시아 취임사를 발표하십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며,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 삶에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16)”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 동네로 가셨습니다. 때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예배를 드리러 가셨습니다. 마침 이 날 예수님은 회당 예배의 낭독자와 설교자로 요청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쭉 펼치신 후 한 본문을 찾아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구절이었을까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18)"

바로 이사야서 61장 1,2절이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씀은 먼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그 머리 위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신 가운데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사역의 뚜렷한 특징은 성령의 임재였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왕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앞으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익숙한 소식이 무엇입니까? 집주인이 전세 값을 올리겠다는 소식, 채권자로부터 빚 갚으라고 독촉장이 왔다는 소식,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소식 등등 가난한 자는 슬픈 소식, 마음이 무거운 소식들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가난한 자는 자녀가 너무 공부를 잘 하거나 예체능에 뛰어난 소질이 보여도 어떻게 뒷바라지할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다른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오직 하나님 밖에 기댈 것이 없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떤 기쁜 소식입니까? 43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전하실 기쁜 소식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오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임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이며, 해됨도 상함도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기 시작했다는 소식만큼 기쁜 소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코로나 기간 동안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컸습니다. 참살이길에도 공실이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심령이 가난해진 곳이 바로 캠퍼스 선교 단체입니다. 일단 학교에 학생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후배들을 만날 기회를 얻기 어려웠고, 새로운 리더를 세울 수 없습니다. 일년 중 가장 큰 행사인 여름 수련회도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처럼 몰리면서 더욱 강해진 반기독교 정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참 난감했습니다. 그래도 고기연은 기독인 교수님의 노력으로 채플을 끈질기게 이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채플에 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오직 교수님들과 몇몇 간사들만 보였습니다. 좋은 소식이라 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학기 심령이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진 선교단체들이 힘을 모아 오프라인 채플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첫 순서로 지난 화요일 우리 예배 장소인 이 마크홀에서 개강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30여명 참석을 예상했는데 두 배인 6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교제 가운데 주님께서 큰 기쁨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지막 순서에 학생 대표들이 예수 믿는 고대에 대한 포부를 나눌 때 저는 고려대 캠퍼스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임할 비전을 보았습니다. 감격하신 교수님들이 끝나도 갈 생각을 안 하시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기연 개강 예배를 통해서 가난한 우리 심령에 위로와 소망을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캠퍼스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새 날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포로된 자,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포로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적군에게 사로잡힌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포로된 자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포로된 자, 헛된 우상에게 사로잡힌 자들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간음이 죄요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죄가 주는 달콤한 쾌락을 도저히 끊을 수 없었습니다. 상습적으로 죄를 짓다가 결국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죄를 지를 자유는 있지만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자유는 없습니다. 요즘에는 죄에 포로 된 모습을 중독이라는 단어로 많이들 표현합니다. 게임 중독, 쇼핑 중독, 성 중독, 일 중독, 코인 중독 등등 수많은 중독이 있습니다.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건 아닌데,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렇게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미움이 쌓여 갑니다. 무거운 죄책감, 정죄 의식에 눌려서 영혼이 신음합니다.

이렇게 죄의 포로가 된 사람들, 죄책감에 눌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의 사슬을 풀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러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정죄함로부터 자유,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선물로 주십니다. 얽매인 사람, 눌린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출구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출구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출구가 되십니다. 누구든 예수님 안에서 죄의 중독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바디매오를 비롯하여 많은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눈먼 자 중에는 육체적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뿐 아니라 영적인 맹인들도 있습니다. 육체적인 눈은 멀쩡하지만 영적인 눈이 멀어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불릴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던 영적으로 눈 먼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또 한 명의 대표적인 영적 맹인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교회를 박멸하고자 했던 무지와 열심으로 똘똘 뭉친 자였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 막 나가던 바울을 아무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바울을 예수님께서 직접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제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바울은 땅 끝까지 예수님을 전하는 빛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저도 영적인 세계를 전혀 볼 수 없었던 눈먼 자였습니다. 한때 목자님을 변화시켜 무신론자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이상한 헛소리나 하고 다니던 자였습니다. 볼 수 없으니 이리저리 오래 방황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매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눈 먼 저를 다시 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를 보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누군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전도한 양들이 차가운 반응을 보인다면 마음이 차가워서가 아닙니다. 이유는 그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속으로 방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기만 하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며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여 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이 전파된다는 것은 어떤 결론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19)"

여기서 은혜의 해란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칠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끝나고 그 다음해인 50년째마다 한 번씩 돌아옵니다. 희년이 되면 땅이 원래의 주인에게 다 돌아갑니다. 채무자들의 모든 빚이 탕감을 받습니다. 가난 때문에 노예가 되었던 종들이 풀려나서 자유민이 됩니다. 희년은 빚진 자가 탕감 받고, 포로된 자들이 자유를 누리고,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고, 억눌린 자들이 해방되는 날입니다.

이 희년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희년을 '주의 은혜의 해'라고 표현하십니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받으실 만하다”는 뜻입니다. 희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만물의 상태가 다 제자리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다시 받으실 만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포로 되고 눈이 멀고 눌린 상태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상태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도 우리가 제자리를 벗어났다. 탈선했다. 망가졌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누구나 본래의 행복하고 자유롭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낙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결코 이 세상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인과 촌장이란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풍경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아주 단순한 가사가 반복됩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노래의 가사처럼 누구에게나 처음 지음 받은 그 제 자리,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누가 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이 희년 제도가 안타깝게도 구약시대 실제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전무합니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 때문에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희년법은 실현되지 못한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면 희년은 언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셔서 새 날을 여실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 이사야의 희망이었고 이스라엘과 온 인류의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책을 덮자 회당에 있는 자들이 주목하였습니다(20). 청중들은 예수님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가 주목하는 그 순간 전혀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21)”

이는 곧 희년에 관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정녕 듣는 이들이 경악할 만한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고 계신 예수님이 희년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였습니다. 

지난 2년여 동안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여러 면에서 제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신앙 공동체 안에서 동역자들 간에 교제가 현저히 약해졌습니다. 매주 하던 요회 식사 모임을 한 지가 언제였나 잘 기억이 나지도 않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동역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심지어 온라인 상의 교제마저 끊어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캠퍼스 전도도 멈춤 상태였습니다. 학기 초 새내기 전도, 매주 하던 런치 미팅, 동아리 박람회 참석, 바이블 카페, 전국 학생 수양회 등이 모두 다 멈추어 섰습니다. 마크홀에서 들리던 뜨거운 합심 기도의 소리, 우렁찬 찬송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도 이런 상황을 원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온라인 비대면이라도 말씀과 기도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에서 아무리 애를 써봐도 어쩔 수 없이 종이 되거나 땅을 팔아야 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희년이란 제도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다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희년을 만드시고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희년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무너지고 망가졌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니, 이미 회복의 역사는 시작했습니다. 캠퍼스 전도가 이미 시작되었고, 5월 초에는 바이블 까페를 진짜 카페에서 열 계획입니다. 다음 주부터 부활절까지 서서히 대면 예배 인원을 늘려가고자 합니다. 우리 안에 회복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회복되고 제자를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희년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은혜의 혜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은혜의 해가 임하더라도 은혜를 체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

여기에는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은혜로운 말씀임을 알고 놀라는 반응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예수님이 무슨 대단한 사람일 수 있겠냐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조건을 떠올리며 마음이 열리는 듯 하다가 이내 닫히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를 다 아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속으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하는 당시의 속담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이 속담의 의미는 만약 정말 의사라면 자기 병부터 고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다른 동네에서만 기적을 행하지 말고 고향에서 더 큰 기적을 한번 행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호기심이 있었을 뿐이지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았고 영접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 아닙니다. 본래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엘리야와 엘리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기근이 심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기근으로 고통 받는 과부들이 많았지만 엘리야는 시돈 땅 사렙다 과부 한 사람에게 갔습니다. 엘리사 시대 이스라엘에도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치유를 받은 사람은 수리아 장군이었던 나아만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현재 나사렛 사람들이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악하다는 점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래서 은혜가 고향 밖 사람들에게 흘러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고향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크게 화를 냈습니다. 화를 낸 것을 보면 그들은 은유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자신의 완악함을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려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그냥 지나서 가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 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때가 아직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주의 은혜의 해가 임했지만 그들 스스로 그 은혜를 걷어차 버렸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은혜의 해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마음이 겸손하고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말씀으로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고 주일 메시지를 들어도 각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는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은혜를 충만히 덧입고 얼굴이 환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오히려 얼굴이 더 딱딱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생깁니까? 좋은 프로그램이 없고 내게 딱 맞는 콘텐츠가 없어서 은혜를 못 받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은혜의 통로는 내 주위에 항상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단 한 방울이라도 땅에 흘려버리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누구에게든지 겸손하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 갈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자신의 현실 문제 해결에만 급급하고 주님이 주실 영적인 복과 은혜에는 무관심할 때 은혜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누구 손해입니까? 결국 은혜를 못 받은 자기 손해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시려했던 은혜를 내가 튕겨버렸기 때문에 결국 그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주의 은혜의 해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의 은혜의 해를 체험하고 회복의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0) 2022.04.03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0) 2022.03.27
말씀대로 살아나신 예수님  (0) 2017.08.26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0) 2017.08.20
심문 받으신 예수님  (0) 2017.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