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창무 2017. 8. 2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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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2 강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말씀 / 누가복음 23:26-56

요절 /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첨탑 꼭대기에는 십자가 세워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다닐 정도로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원래 십자가는 흉악한 죄인들을 죽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수대나 전기의자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의 상징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와 수치, 패배와 고통이 아닌 용서와 화해,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도 AD와 BC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다면, 구원의 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닫혀져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만나는가 만나지 못하는가에 따라 이 땅에서 우리의 삶도, 영원을 향한 우리의 운명도 결정됩니다.

이 시간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으로 나아가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처형장까지 이동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미 120대의 매질을 당하신 예수님의 온 몸은 찢기고 피투성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곧 비틀거리다 쓰러지셨습니다.

그때마다 로마 군병이 휘두르는 채찍 세례가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가까스로 일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이내 또 쓰러지셨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예수님은 한 발자국도 더 이상 내디딜 수 없으셨습니다.

군병들은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 대신 십자가를 메고 가도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내시며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등 뒤를 따라오는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과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잠시 후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니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위해 울어줘서 고맙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은 우는 여인들을 통해 위로를 받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인 유대민족에게 임할 미래의 심판을 내다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여인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는 것은 행복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날에 고통 받는 자식을 보는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므로 오히려 아이 없는 자가 더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재앙의 고통이 너무 극심해 사람들은 산 밑에 그냥 깔려 죽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탄식으로 말씀을 맺으셨습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

푸른 나무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마른 나무는 영적으로 메말라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민족을 가리킵니다.

무죄하신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데, 하물며 이 악한 유대민족이 받을 형벌이 어떠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장군 디도에 의해 완전히 짓밟히고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을 봉쇄했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지자 극심한 굶주림으로 견디다 못해 어린아이를 삶아먹는 끔찍한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대민족에 대한 심판은 장차 예수님을 거부하는 온 인류가 받을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인들이 흘려야 할 눈물은 예수님을 향한 동정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무거운 죄 때문에 흘리는 참회의 눈물이어야 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그림, 조각, 문학, 연극과 영화의 소재가 되어 왔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멜 깁슨이 연출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속에서 두 명의 건장한 로마 병사가 예수님을 기둥에 묶어 넣고 채찍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무 끔찍해서 많은 그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안타까워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한과 슬픔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동정의 눈물이 아닌 참회의 눈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회의 눈물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시대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죄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기를 꺼려합니다.

간음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죄라고 말하는 대신에 결함, 상처, 부적절함이라는 말을 더 선호합니다.

이런 말을 사용하여 도덕적 책임을 피려하고 합니다.

얼마 전 일어났던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별 이유 없이 잔혹하게 아이를 죽인 범인이 십대 여학생이었다는 사실에 모든 이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범인 김 양은 재판 과정 중에서 자신이 아스퍼거 증후군, 조현병, 다중인격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장애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라고 강변했습니다.

하지만 검사 결과 이 모든 주장은 다 거짓말임이 드러났습니다.

다만 처벌을 피하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이었습니다.

피해자는 많은데 가해자는 없습니다.

가해자도 피해자인척 코스프레를 합니다.

하지만 죄를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해도 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똑똑히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분으로서 사람의 내면의 은밀한 죄까지 다 보십니다.

그리고 그 죄를 보실 때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죄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원래부터 있었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옥은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지옥은 실제로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겁주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경고하려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회개를 촉구하려는 것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종종 교통사고 현장을 찍은 사진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와 바닥을 적신 핏자국을 보면 너무 끔찍해서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 사진들처럼 참혹한 십자가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판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받을 무서운 형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죽은 양심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당장 우리의 죄악들을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눈물로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2, 33절을 보십시오.

십자가형을 언도 받은 다른 두 범죄자도 예수님과 함께 끌려갔습니다.

십자가형은 살인, 반란, 강도 등 흉악 범죄자들에게만 내려졌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범죄자 무리의 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마침내 군병들은 해골이라는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이 해골이라는 말이 아람어로 골고다, 라틴어로 갈보리입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눕히고 못 박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손목과 발등에 굵은 대못을 박기 시작했습니다.

"쾅, 쾅, 쾅"

손목뼈가 부서지며 발등이 으스러졌습니다.

핏줄과 신경이 터지며 피가 솟구쳤습니다.

곧이어 십자가가 수직으로 일으켜져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굵은 대못은 예수님의 체중을 받아 온 몸을 다시 한 번 찢어 놓았습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예수님도 이 때 만큼은 온 몸을 부르르 떠셨습니다.

중동의 태양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몸에서 물과 피가 빠져나가자, 탈수로 입천장은 갈라지고 목구멍은 바싹바싹 타 들어갔습니다.

이때의 고통을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십자가형은 인류가 고안한 형벌 중 가장 수치스럽고 잔인한 형벌이라 불립니다.

죄수의 옷을 다 벗기고 광장이나 언덕에 매어 달아 온갖 수치를 받게 합니다.

그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2-3일에 걸쳐서 고통을 느낄 기력이 있는 한 모든 고통을 다 받아냅니다.

천 번 이상 신실을 반복하다가 결국 갈증과 탈진으로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에게 베풀어질 수 있는 유일한 자비는 다리를 꺾어 빨리 죽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에서 모두 일곱 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가상칠언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 예수님의 첫 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만약 제가 이 상황에 처해있다면 악에 받쳐서 고래 고래를 소리를 질렀을 것 같습니다.

사형수들에게 형 집행 전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지 묻는다고 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 사형수들이 저주와 악담을 쏟아낸다고 합니다.

흉악한 죄를 저지른 자들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아무 죄 없이 이런 형벌을 당할 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3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조작된 증거로 고발한 자들, 함부로 모욕하고 조롱한 자들, 채찍질하고 못 박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고 참혹하게 죽어 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위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 이 순간 예수님의 입에서 이런 기도가 나올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할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용서를 빌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얼마나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마저도 안타깝게 여기시고 그들 대신 기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다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하실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하시려고 마른 침을 집어삼키시며 신음 섞인 간구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 모진 고통을 묵묵히 참으셨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용서입니다.

스페인을 배경으로 헤밍웨이가 쓴 "세속의 신전"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 한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집 나간 아들을 찾기 위해 그는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빠꼬야, 화요일 정오에 몬따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빠꼬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 아버지가 약속한 장소에 나갔습니다.

거기에는 빠꼬라는 이름을 가진 800여명의 젊은 남자가 저마다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들에게는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헤밍웨이 자신이 먼저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자살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버리고 자살한 남편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인 헤밍웨이마저도 미워했습니다.

헤밍웨이도 이런 어머니를 미워했습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어느 생일날 어머니로부터 두 가지 생일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케이크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자살할 때 사용한 권총이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세상에 용서의 은혜가 없다는 것을 어머니로부터 배웠습니다.

헤밍웨이는 결국 아버지가 남겨준 그 권총으로 자살하였습니다.

헤밍웨이는 소설가로 성공하여 부와 명성을 모두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평생 목말라 했던 것은 용서였습니다.

용서가 이처럼 절실한 까닭은 오직 용서만이 파괴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파괴된 관계입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 때문에 파괴된 관계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하시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는 영원히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끌어안고 가셔서 그 어깨에 짊어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심으로 우리 대신 그 형벌과 저주를 감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이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죄와 죽음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자유와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불화가 사라지고 이제부터 화해와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 용서를 받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십자가를 만나면 내게 상처 준 사람들에게 겨누었던 복수의 칼을 내려놓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조건 없이 받았기에 나도 그들을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용서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그 가운데 참된 화해와 회복의 역사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복수를 위해 불끈 쥐었던 주먹을 펴서 뜨겁게 손을 맞잡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죄의 방벽을 허물고 용서의 기초를 만든 위대한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기꺼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이때에도 사람들은 이 용서의 손길을 외면하며 서서 구경하고 관원들은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군병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으며 그 옷을 가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며 희롱을 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행악자마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자기들의 경제 문제를, 민족 문제를 해결해 줄 힘있는 메시야였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왕이였습니다.

그런 기대를 했던 예수님께서 오히려 로마군병들에게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들은 실망 가운데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남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구원하시지 않으신다는 십자가의 비밀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한 행악자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비방하는 다른 행악자를 꾸짖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쳤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무죄도 깨닫고 옳음을 시인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염치없게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아무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가 흉악한 죄를 짓고 어떻게 죽기 직전에 이런 믿음의 간구를 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는 그가 십자가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는 그의 완악한 심령을 때렸습니다.

자기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로 자기 같은 흉악한 죄인도 이미 용서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용서의 사랑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43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이라는 말씀은 회개하고 믿는 그 순간부터 구원을 얻게 됨을 말해 줍니다. 

또한 예수님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낙원으로 인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만 믿기만 했는데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결코 우리의 행위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을 보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본문의 행악자와 같이 염치없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어떤 의미에서 정말 염치없는 믿음입니다.

세례 문답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이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은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육체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1993년에 한국 불교에서 큰 스님으로 불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성철 스님이 입적하셨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구나.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려있도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인간은 아무리 도를 닦고 수행을 거듭해도 결코 그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존 뉴턴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놀랄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전혀 못 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이 온 것을 보고 놀라고, 반드시 천국에 있으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마지막으로 나 같은 죄인이 하늘나라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44절을 보십시오.

때가 제 6시쯤 되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하늘도 슬퍼하고 땅도 슬퍼했습니다.

예수님은 제 3시에 못 박혀 9시까지 6시간 동안 고통 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 영혼의 생명을 구원하신 예수님은 이제 운명하실 시간이 되셨습니다.

그 후에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온 땅을 뒤덮고 사탄의 권세가 승리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커튼입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장벽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죄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이로써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골고다 언덕의 사형 집행 책임자로 이 모든 일을 지켜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방인인데다가 군인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무리들도 자신들이 한 일을 회개하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습니다.

후에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회심한 삼천 명 중에 이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공회의원 중에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구하였습니다.

이 일은 자칫 예수님의 동조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처음부터 지켜보았던 요셉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담력이 생겼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서 자기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내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죽으시고 완전히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원래 십자가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의 상징이 아닙니다.

더 이상 저주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에게 낙원과 영생을 약속하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완악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녹여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와 구원과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한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멸망의 십자가, 심판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했습니다.

원자로 안에서는 한번 핵분열 반응이 시작되면 누구도 그 불을 끌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믿는 자의 삶에 원자로와 같습니다.

십자가로부터 끊임없이 용서와 구원과 능력의 에너지가 공급됩니다.

그 열기가 오늘도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녹이고 하나님의 불타오르는 사랑의 품 안에 안기게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힘,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는 힘도 십자가로부터 나옵니다.

사탄 마귀가 아무리 이 불을 끄려고 해도 끌 수 없습니다.

이 십자가 안에 담긴 측량할 수 없는 영광과 지혜와 사랑을 날마다 더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일생 십자가 은혜에 잠겨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십자가의 증인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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