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창무 2022. 4. 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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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5 강 / 이창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 / 누가복음 5:17-26
요절 / 누가복음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카톨릭에는 고해 성사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전기를 읽어 보면 고해 성사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나옵니다. 루터는 한번 고해 성사를 하면 짧게는 4 시간 길게는 6 시간 동안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고해소에 들어오면 신부들이 다 못 들어주겠다며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결국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주교가 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루터는 혹시라도 내가 빠트리고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어 사함을 받지 못할까 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후에 그가 로마서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발견하고 나서 이런 사람 잡는 고해 성사를 멈출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그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을까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갈릴리의 각 마을 뿐만 아니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왔을까요? 예수님께 은혜 받으러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요즘 부쩍 주가가 오르고 있는 예수님을 감시하고 검증하러 온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약점을 캐내려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감시자들 앞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떨리고 긴장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이럴 때는 위축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은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위축되기는커녕 예수님의 능력과 위엄이 드러나는 돌발 사건이 일어납니다.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왔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소자라고 부른 것을 볼 때 이 병자는 젊은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침상에 뉘인 채 온 것을 보면 전신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사지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주위의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얼마나 안타깝고 애가 탔겠습니까? 이때 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중한 병에 걸린 사람이든 다 고쳐 주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가 누워있던 침상 채 둘러 메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도착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습니다.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19)”

이미 너무 많은 무리가 현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도무지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보통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오늘만 날인가? 다음에 와야지.”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사람들은 전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들은 침상을 들고 건물 옆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유대의 집은 오늘날 슬레이트 지붕과 유사하게 널찍한 기와로 덮여 있습니다. 그들은 이 기와를 뜯어 내더니 그 사이로 침상 채 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천장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더 놀랄 일은 그 빛 사이로 침대 하나가 서서히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한 동안 적막이 흐르다가 여기저기 웅성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때 신세대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이게 머! 선! 일이고!” “이거 새치기인데. 아, 킹 받네!”

그들의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암만 봐도 집 주인에게 미리 허락을 받은 것 같지 않습니다. 너무 무례하고 저돌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무단 가택 침입죄에 재물 손괴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사람들이 본래 무례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중풍병자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자가 지나 온 세월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때 얼마나 건강하고 활력이 넘쳤던 사람이었는지, 중풍병에 결린 이후 얼마나 고통받고 지금도 힘들어 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괜찮아. 아무려면 어때! 다음 기회가 있지 않아!” 이런 한가한 소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중풍병자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비난을 감수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 뒤에는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0a)”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눈에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은 추상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라 볼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믿음을 볼 수 있습니까? 믿음은 볼 수 없을지라도 믿음이 불러 일으키고 믿음이 만들어 낸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믿음의 행위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서는 지붕을 뜯고 침상을 내리는 행위로 그들의 믿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얼마든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 예수님은 결코 중풍병자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획기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와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감시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에 부정적인 일이 생기면 곧바로 신문과 티브이에 나오고 SNS에 도배가 됩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대규모 확진 사태의 진원지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는 분들 중에는 월요일에 출근해서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지 여부를 체크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맥락에 상관없이 맘에 안 드는 이슈만 터지면 다 교회 탓, 교인 탓을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이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이건 너무 무례한 행동으로 보이지 않을까? 이러다가 괜한 오해와 비난을 자초하게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에 몰두하면 보면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하더라도 분위기 좋을 때 하자.” 도대체 언제 분위기가 좋아질까요? 세월호 사건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결과 어떤 참사가 일어났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분위기가 안 좋아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행위들이 위축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특히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전도와 선교가 위축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전도와 선교를 이루려 하다 보면 오해를 받고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일정 부분 우리가 이런 부분을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으로 믿음으로 하면 결국 오해는 풀리고 비난은 수그러들게 마련입니다. 나중에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비난을 받았다는 말은 오늘 본문에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 주위를 돌아봅시다. 본문의 중풍병자처럼 생각만 해도 너무 안타까운 사람, 정말 예수님의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 한 사람 씩 다 있지 않습니까? 장애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사랑과 믿음으로 그를 메고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네게 이르노리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이 말씀을 하기는 하셨지만 그 전에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20b)”

예수님은 왜 치유를 베푸시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측면과 중풍병자 개인의 측면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사역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로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 지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건 앞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처럼 치유하시는 사역을 행하셨을까요? 모든 질병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죄 문제가 나옵니다. 에덴 동산에는 질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범한 후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부터 질병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사람은 병 들고 그러다가 죽습니다. 질병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기에 앞서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치유보다도 죄 사함이 더 근본적이고 시급한 문제임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중풍병자 개인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신 이유는 질병보다 죄의 짐이 더 무겁게 중풍병자의 삶과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젊은 나이에 전신 마비가 된 것이 그의 실수나 잘못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죄에 빠져 살다 보면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하게 되고 그 결과 마비가 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젊은 날의 객기를 부리다가 사고를 당해 그렇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 9장에서 보듯이 당시 사회는 인과응보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한 사회였습니다. 뚜렷한 원인을 잘 몰라도 중풍병자는 큰 죄를 지어서 이런 중풍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워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을까요? 나는 저주받은 죄인이라는 죄의식에 짓눌려 신음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그가 단지 중풍병이 낫는 것만으로 온전히 치유를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그의 영혼은 여전히 죄의 감옥에서 꽁꽁 묶여 옴짝달싹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죄의 짐을 벗고 청년 답게 나비처럼 훨훨 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중풍병자에게는 일어나 걷는 것이 답이 아닐까요? 이보다 더 앞서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사건에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먼저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설령 당장 일어나지 못해도 이 사람이 죄 사함을 받은 이상 마지막 부활의 때에 다시 일어나 걷게 될 것은 확실합니다. 지난 번 갈라디아 말씀을 종강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던 것이 다시 생각이 납니다.

“실패에는 성공이 답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지는 것이 답이고, 내려간 사람은 올라가는 것이 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성공하고 소유하고 높아져도 결국 제 자리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내면의 얽매임과 깨어진 관계와 망가진 삶은 그대로인 것을 보았습니다. 답이 아닌 것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런 것들이 답이 아니고 복음이 답이라는 것을 확실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뿌리부터 변화시키고 망가진 것들을 회복시키는 능력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은 곧 죄사함의 복음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의인처럼 서는 것만큼 우리 삶에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프다가 건강하게 되고, 가난하다 부자가 되고, 실패했다 성공해도 그것이 온전한 회복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서지 않으면 비록 사지가 멀쩡함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처럼 누워만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은 병이 아니라 결국 죄입니다. 죄는 삶의 에너지를 빨아들입니다. 죄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죄를 무력화합니다. 믿음은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시도하게 합니다. 믿음은 앞이 막히면 위로 올라가 지붕을 뚫어 보자는 창조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 시대 나이는 아직 젊지만 죄 때문에 마치 중풍병에 걸린 사람처럼 무기력한 인생을 살고 있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이 죄 사함의 복음으로 새롭게 되어 힘찬 인생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 침상을 메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죄 사함의 음성을 듣고 깜짝 놀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신성 모독하는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 외에 죄를 사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틀린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의 근본 문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22)”

그들은 현장의 은혜로운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이런 생각을 속으로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과 생각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자신이 어떤 분인지 나타내 보이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23,24)”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말만 하면 되니까 쉬울 것 같지만 감히 할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은 할 수는 있지만 증거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결국 정답은 둘 다 어렵다 입니다. 둘 다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둘 중 어느 하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나머지 하나도 할 자격이 된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표현이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죄인이 하늘로부터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제사를 지내려면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첫째로 죄를 짊어질 희생제물이 있어야 했고, 둘째로 화해를 중재할 제사장이 있어야 했고, 셋째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 보아도 양이나 염소 같은 희생 제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제사장은 고사하고 레위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였습니다. 그러니 죄 사함이 어떻게 선포될 수 있느냐고 그들이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제물과 제사장과 성전이 정말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희생 제물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제사장도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2장 21절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도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필수적인 모든 것이 다 예수님 안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새 시대는 오직 믿음으로만 죄 사함을 받는 시대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 본 말이라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만약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그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우리 죄를 대신해 죽지 않으셨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죄 사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서 이스라엘 행 비행기 티켓부터 끊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시세로 왕복 최소한 90만원 이상이 들고 직항이 없어서 반드시 한 곳 이상을 경유해야 합니다. 도착한 뒤에는 소나 양을 사야 하고 도축은 반드시 자기 손으로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어렵게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성전이 2천년 전에 무너져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와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죄를 범하고 허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습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죄가 쌓여만 가고 있습니다. 그 무게가 서서히 어깨를 짓누르고 목을 조여오게 됩니다. 죄 사함을 받을 길이 막혀 있다면 우리 영혼은 점점 시들고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으로 단 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매일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 죄 사함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풍병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25,26)”

중풍병자는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갔습니다. 목격자들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누가 봐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분명히 나갈 때는 침상에 누워서 실려 나갔는데, 들어올 때는 침상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어둡고 표정이 없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생기가 충만했습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회복된 중풍병자를 보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축하하고 그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이 모습을 상상에 그리며 우리 안암1부가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죄로 망가진 사람들이 이곳에 왔다가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치유되고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워서 왔다가 걸어서 나가는 곳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미 우리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믿지만, 앞으로 더 많이 일어나고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사랑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 복음 중심의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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