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창무 2022. 4. 10.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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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6 강 / 이창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 / 누가복음 5:27-39
요절 /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죄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죄인들 모두를 부르고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죄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개했지만 다른 죄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요?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27,28)”

먼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세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당시 세리는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갈 수 없었고 법정의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항상 세리 레위를 경멸과 분노, 비난의 눈길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길은 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동정심 어린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제까지 오직 돈 하나만 바라보고 따르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그를 초대하셨습니다. 이에 레위는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두말없이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세리로서 누렸던 모든 권력과 혜택을 말끔하게 포기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나와 같은 죄인을 부르신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29)”

그리고 레위는 자신을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다른 세리와 죄인들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도 따뜻하게 영접하시고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30)”

두 번째로 등장한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남들과 비교해 자신들은 어느 정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더러운 죄인들과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따져 묻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저들의 죄에 너희도 물들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저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냐?”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영적 의사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사람, 죄인을 찾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기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한 죄인은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매국노,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모두가 그를 손가락질하고 상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불쌍히 바라보시며 부르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했습니다. 또 다른 죄인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무리였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고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하면 자신은 그렇게까지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긴 그들에게 영적인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 없었습니다. 한 죄인은 죄인임을 인정했고, 또 다른 죄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 쪽은 겸손했고, 다른 한 쪽은 교만했습니다. 한 쪽은 심령이 가난했고 다른 한 쪽은 심령이 부요했습니다. 한 쪽은 회개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지만, 다른 한 쪽은 회개를 거부하고 자기 길을 고집했습니다.

사람끼리 비교에서는 누가 더 죄인인가 누가 더 의인인가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풍성한 긍휼과 넘치는 자비로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회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겸손히 그 부르심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교만하게 자기 의를 내세울 것인지 이 둘 중 하나입니다. 겸손하게 회개하는 사람은 죄가 아무리 많고 심각하다 해도 허다한 사랑이 그 죄를 덮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우편에 함께 못 박혔던 강도도 예수님의 자비를 맛보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를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던 바울도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았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고 가난한 민중의 가죽을 벗겨 먹던 세리도 자비를 맛보았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그들 모두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반면 교만한 자는 스스로 죄가 별로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용서를 맛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거절한다면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질문을 하나 던져 보겠습니다. 지금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혹시 본문의 레위치럼 예수님이 아니라 돈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꼭 돈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등지고 나의 만족과 유익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살 생각은 아니었는데 살려고 몸부림치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하나님과 많이 멀어져 있는 것 같을지 모릅니다. 목자님들을 만나면 왜 이렇게 소원이 없느냐? 왜 영적인 투쟁을 하지 않느냐? 고 한 마디 씩 할 것 같아 피하고 싶습니다. 나의 괴로움, 나의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 이런저런 요구만 하는 것 같은 주위 사람들을 피해 혼자만의 공간으로 숨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여전히 바라보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 힐난하는 눈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어디에 있든 나를 자비의 눈으로 추적하고 계십니다. C.S. 루이스는 이 예수님의 눈을 가리켜 천국의 사냥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분은 내가 천국으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멀어져 방항하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해 부르고 계십니다. “그 삶에서 돌이켜 지금 나를 따르라” 이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레위처럼 벌떡 일어나 좁은 세관을 나와 예수님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인 되었을 때에, 죄로 내면이 병들고 망가져 몹쓸 상태였을 때, 예수님은 다만 은혜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감싸주시고 만져 주시고 고쳐 주셔서 서서히 내면이 건강해지고 있습니다. 내가 보인 것은 허물 뿐이고, 오직 주님의 자비와 긍휼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마치 지금 내가 의인이라서 건강한 사람이라서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그래도 내가 너보다 더 낫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길입니다. 그 길은 우리가 갈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때 세리였으나 이제는 제자가 된 레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만난 긍휼의 목자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마땅한 삶입니다. 아무 자격 없는 죄인인 우리를 다만 은혜로 부르시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를 향한 그분의 부르심의 은혜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잔치로 시작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은 새로운 주제로 뻗어갑니다. 이번에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33)”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금식 규례로 예수님께 문제 제기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은커녕 왜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고 따집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34)”

예수님은 제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묘사해 주는 비유를 들어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가 열렸는데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이 금식을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남몰래 신부를 짝사랑해 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혼인집 신랑은 예수님, 혼인집 손님들은 제자들입니다. 모든 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때는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아니라 잔치를 벌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금식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35)”

머지않아 상황이 변할 것입니다. 상황이 변하면 그에 대한 반응도 달라져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빼앗기게 되는 날이 옵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게 되는 때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 때는 금식이 합당합니다.

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시점에서 예수님께 금식에 관한 문제 제기를 했을까요? 예수님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으면 죄인과 더불어 금식을 해야지 먹고 마시기만 하면 어쩌자는 것이요?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니요?” 이 말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회개하면 연관 검색어처럼 따라오는 것이 금식입니다. 왜냐하면 회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함과 슬픔을 느끼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 죄 용서를 구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식만이 회개의 표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자연스럽게 기쁨이 뒤따라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기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기쁨, 다시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회개를 통해 흘리는 눈물은 통회의 눈물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감사의 눈물, 기쁨의 눈물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표지는 금식이면서 동시에 잔치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엽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늘 나라에서는 기쁨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 레위를 비롯한 수많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회개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금식할 때입니까? 잔치할 때입니까? 이 질문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인집 신랑 되신 예수님이 이미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동시에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에 따라 금식을 해야 할 필요도 있고 잔치를 벌여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모임의 영성은 금식보다는 잔치의 영성으로 확실히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서 금식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 때문에 성탄 연합 예배를 할 장소를 대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아무리 음식물 취식이 안 된다고 해도 기어코 양들을 먹이려는 목자를 도저히 말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누군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된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죄 사함 받는 기쁨,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충만함으로 잔치의 영성이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캠퍼스 학생들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굳어지고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양들이 눈물로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는 일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솔직히 세상과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우리 마음 중심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신랑을 빼앗긴 혼인집 손님과 같은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때야말로 금식의 영성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볼 시점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은 애통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간절한 소원을 눈물로 주님께 아뢰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금식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특별히 다음 한 주는 부활절을 앞둔 고난 주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또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 금식을 하지 않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든 잔치를 하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6절부터 예수님은 세 가지 예를 통해 금식에 대한 논쟁을 총정리해 주십니다.

첫 번째 예는 옷에 대한 비유입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36)”

낡은 옷을 수선하기 위해 새 옷에서부터 한 조각을 떼어내어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에 어울리지도 않고 새 옷만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예는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에 대한 비유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37,38)”

포도주를 보관할 때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포도주는 발효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는 것입니다. 만약 새 포도주를 탄력이 떨어지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포도주는 다 쏟아져 버리고 낡은 가죽 부대는 더 이상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신축성이 좋은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두 가지 사례는 모두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옛 것에 담을 수 없다. 서로 어울리지도 않고 둘 다 망하게 된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틀과 형식이 필요하다.” 입니다. 여기서 새 것은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가리킵니다. 반면 엣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옛 시대를 가리킵니다. 옛 시대에는 죄인은 무조건 멀리 하고 열심히 금식하는 것이 국룰입니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새 시대에는 죄인을 찾아가 부르고 열심히 잔치를 벌이는 것이 국룰입니다. 새 시대에는 새 것이 어울립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억지로 섞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둘 다 망치게 됩니다. 새로운 것을 옛 것의 틀 속에 담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세 번째 예로 말씀하십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39)”

사람들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익숙하고 편한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저 괜찮은 정도에 만족하면서 단지 그것이 새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뛰어난 것을 거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인 반응이 바로 이런 거부 반응입니다.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포도주는 오랜 기간 동안 숙성이 되면 될수록 맛이 더 좋아진다고 합니다. 오래 된 것이 세월의 검증을 거치고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는 충분히 존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는 박자도 리듬도 화성도 다 매우 올드합니다. 하지만 가사 하나 하나를 음미해 보면 마음을 움직이는 가사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인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는 무려 12세기에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에 의해 쓰여진 찬송가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부를 때마다 항상 뭉클합니다. 비록 어떤 것은 시대에 좀 뒤쳐진 것처럼 보여도 인생의 스토리가 거기에 녹아져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 목자님들에게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오래된 것의 가치를 재발견하면서 빈티지 패션, 빈티지 음악 등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묵은 포도주가 좋기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해 무조건 거부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요즘 일본 경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 때 전세계를 호령하던 일본이 이제는 한국에 추월을 당할 지 모른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일인당 실질 국민소득은 이미 우리 나라가 일본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이 과거의 영광과 성공에 취해 정보 통신 기술의 혁신을 받아들이는 데 너무 늦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대부분 일본 회사에서는 아직도 도장으로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 거의 신용 카드를 쓰지 않고 아직도 80% 이상 현금 거래를 한다고 합니다. 묵은 것이 좋다 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외면한 결과 점점 추락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현재 방식에 만족합니다. 익숙함에 길들여지면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 때로는 불편함이 있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그냥 잊고 살아갑니다. 변화를 선택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우리가 이대로 안주하면 만족한다면 우리는 늘 그 모습 그대로 일 것입니다. “묵은 것이 더 좋더라. 그때 그 시절이 좋았지” 하면서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과 변화를 위한 수고는 비록 익숙하지 않을 지라도, 때로 두려움과 염려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주 안에서 살아 있음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그 새로움 속에서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안암 1부는 앞으로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변화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안락한 소파가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 변화가 꼭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형제는 무조건 왼쪽, 자매는 오른쪽에 앉는 것부터 바꾸는 것과 같은 작은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변화를 위한 작은 노력들이 모이고 모여서 우리가 새 포도주와 같은 복음을 담을 수 있는 새 가죽 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안주하다가 도태되지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에 열린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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