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이창무 2022. 6. 12. 15:38
반응형

2022년 누가복음 제 14 강 / 이창무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9:10-17
요절 / 누가복음 9:16,17a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기적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만큼 이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오늘은 제자도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오늘 말씀이 성만찬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게 하는 말씀이 되길 기도합니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10)"

이 구절에서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부르고 있는 것이 먼저 주목을 끕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후에 제자들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멋지게 감당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양육을 받고 있던 제자들을 벌써부터 사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도 여행을 통해서 사도라는 호칭에 걸맞은 일을 행하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 나라 역사를 앞다투어 증언했습니다. "아 글쎄, 제가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하니까 정말 귀신이 꼼짝 없이 나가더라니까요" "저는 배운 대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더니 그 동네 사람들이 전부 다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지 뭡니까?" 예수님도 제자들의 보고를 받고 매우 만족하시고 기쁘셨습니다.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 엠티를 가기로 했습니다. 장소는 갈릴리 해안에 있는 벳새다라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고기와 조개를 구워 먹고 마피아 게임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11)"

무리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님 일행을 추적해 왔습니다. 좀 한적한 곳에 쉬려고 했는데 거기까지 따라온 무리들을 본 제자들은 화가 나고 짜증이 났습니다. ‘참,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예수님도 짜증이 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영접하셨습니다. 그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에 이때 예수님이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리들이 얼마나 갈급했으면 얼마나 목자가 주는 영혼의 양식을 사모했으면 이렇게까지 하는지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돌봐 줄 목자 없이 방황해온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엠티는 취소되고 대신 수양회가 열렸습니다. 개회 예배, 주제 1 강, 주제 2 강, 특강 전부다 강사는 예수님 한 분이었습니다. 무리들은 꼼짝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많은 시간이 흘러 갈릴리 바다 서쪽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저녁 식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 일행이라면 어떻게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있는 저 수많은 무리들은 너무나도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내놓은 방안이 무엇입니까?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12)"

제자들의 제안은 무리들로 하여금 마을과 촌으로 내려가 각자 저녁 식사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제안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조금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들의 제안은 문제 해결보다는 책임 회피에 더 가깝습니다. 당시는 오늘처럼 동네마다 24시간 편의점이 있어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빈 들에서부터 마을과 촌까지 가다 보면 곧 밤이 될 텐데 어디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굶어도 할 수 없으니 무리들을 흩어지도록 해서 그들을 필요를 채워야 하는 이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것이 제자들의 속마음이었습니다. 12절에서도 제자들을 사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된다는 것은 병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는 신나는 일, 유명해지고 칭찬도 받는 근사한 일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피곤하고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일,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스러운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부담스러운 일은 벗고 신나는 일, 할 만한 일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제안에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13a)"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단호합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제자들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집어 내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너희'라는 말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희가 먹을 주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의도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위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전도 여행 중에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그 능력과 권위를 체험했습니다. 이제는 그 능력과 권위에 걸맞은 책임감도 배워야 할 때였습니다. 영화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있지 않습니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제자들이 양무리들을 책임질 목자임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단호한 말씀을 듣는 순간 열두 명의 제자들, 아니 열두 명의 사도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도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기도 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인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명이요, 자신들의 한계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예수님의 터무니없는 요구사항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는 이렇게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13b,14a)"

현재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남자만 해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자 단위로 쪼개서 한 사람 당 탄수화물 다섯 분자와 단백질 두 분자 씩 나누어 주어야 합니까? 먹을 것을 사오는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제자들에겐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돈이 있어도 빈 들인데 어디서 살 수 있겠습니까? 설령 가게가 있다 해도 갑자기 한꺼번에 어떻게 오천인 분의 식사를 만듭니까? 아무리 계산해 봐도 답이 없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사도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들의 대답은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사옵나이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13절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목자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본래 목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름을 우리도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그에 따르는 사명이 있습니다. 곧 이 세상에 참된 쉼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양들을 찾아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 그 양을 품에 품고 말씀을 먹이고 기도해 주는 양육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고자 때 우리는 참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단순하게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 양이 그 복음을 믿고 영접해서 그 영혼이 구원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때의 감격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또 내가 섬긴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 다른 어떤 일에도 느껴본 적이 없는 특별한 감동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내가 목자가 되길 정말 잘 했다. 내가 다시 태어나도 반드시 목자를 하겠다.”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목자라는 이름에는 영광과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무거운 책임이 함께 따라옵니다. 나의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목자에게는 신실하게 양을 먹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여유가 있고 컨디션이 좋을 때만 양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잠을 설치더라도 배고픈 아기에게 젖을 주는 사람이 엄마이듯이 내가 아무리 바쁘고 피곤할지라도 양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 목자입니다. 이런 책임을 다 벗어 버리고 모든 부담감을 훨훨 떨쳐 버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양의 문제는 양 자신이 해결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나와 내 가족 감당하기도 벅찬데 결국 각자도생 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말하고 싶어 집니다. 한때는 양 없는 목자인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양 없는 목자가 상팔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혹시 13절의 제자들처럼 “할 수 없사옵나이다”라고 항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너무 하십니다. 제 상황과 현실이 눈에 안 보십니까? 제가 누굴 먹일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닙니다. 시간도 없고 그만한 역량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럴 만한 에너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먹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명령 앞에 두 손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바라보며 “할 수 없습니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뼈아픈 현실이 아닐까요?

사도의 사명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며 주저앉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14b)”

예수님은 많은 말보다 곧바로 행동에 들어가셨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한 데 뒤섞여 있을 때에는 그 규모가 쉽게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약 50명 씩 자리를 잡고 앉게 하니까 비로서 대략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봄날 푸르른 들판 위로 최소한 백 개가 넘는 분반이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16,17a)”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지금 누구의 손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무리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떡과 물고기를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받은 떡과 물고기를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오천이 넘는 무리들이 모두 다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예수님과 무리들 사이를 오락가락 했겠습니까? 우리는 제자들을 원조 “배달의 민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역할과 제자들 곧 사도들의 역할이 확실하게 구분됩니다. 음식을 주시는 분, 양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은혜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여 많은 음식을 만드는 것은 제자들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제자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주신 음식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아서 그것을 양들에게 열심히 나누어 주는 역할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와 떡을 나누어 주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16절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몇 개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들입니다.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첫째로 ‘가지사’ 둘째로 ‘축사하시고’ 셋째로 ‘떼어’ 넷째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네 가지 동사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지 않으십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탁을 나누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시던 그날 밤 먼저 떡을 ‘가지시고’ 두번째로 ‘축사하시고’ 세번째로 ‘떼어’ 마지막 네번째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기념하라” 또한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성만찬의 식탁에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역할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자신의 살과 흘리신 피로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의 양식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예수님으로부터 떡과 잔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들은 사도로서 그 충만한 은혜를 온 세상에 전달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수많은 영혼이 영생을 얻게 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의 손에는 큰 무리를 먹일 음식이 전혀 없었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영적인 풍성함이 전혀 없었지만, 그들 곁에는 모든 것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원천,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이 그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떼어 나누어 주시니 제자들은 무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의 원천 되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들 곁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손에 풍성한 떡과 물고기가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어진 책임과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나에게 능력도 없고 지혜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는 사랑도 부족하고 다른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할 만한 역량이 없다며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 손이 텅 비어 있을지라도, 아니 우리의 손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양손을 내밀어 예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께서 떼어 주시는 떡과 나누어 주시는 물고기와 부어 주시는 잔을 받아 가정과 사회와 캠퍼스에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끝맺음 하고 있습니까?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17b)”

남은 조각을 거둔 것이 왜 하필 열두 바구니였을까요? 열두 제자가 각각 한 바구니 씩 가져가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떡과 물고기를 열심히 배달했던 제자들의 바구니도 가득 넘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풍성 곧 충만한 은혜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는 받아 누리는 사람에게도 충만한 만족을 주지만, 그 선물을 나누어 주기 위해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일꾼들에게도 차고 넘치는 축복이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에게 매주 주님께 말씀을 받아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 이 책임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이것만 없으면 목자 생활도 할 만 할 것 같은데 매주 진통 끝에 아기를 낳는 산모가 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무대의 막이 내린 후 연극 배우는 공허감을 엄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한 후 저에게는 공허함이 전혀 없습니다. 제 바구니에 어느새 풍성한 은혜와 말씀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일대일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주고 나면 어느새 내 심령이 채워져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을 풍성하는 동시에 내 자신을 풍성하게 채우는 길,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에 담긴 신비입니다. 주님께서 이 기적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 경험되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단순하게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 주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오병이어의 역사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