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염려하지 말라

이창무 2022. 8. 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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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2 강 / 이창무

염려하지 말라

말씀 / 누가복음 12:22-34
요절 / 누가복음 12: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명저 “소유냐 존재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프롬은 언어를 보면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이 소유 중심의 사고를 하느냐 아니면 존재 중심의 사고를 하느냐가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서는 ‘나는 두통이 있다’ 라고 하는데 영어에서는 ‘I have a headache’라고 합니다. ‘나는 두통을 가지고 있다’라고 직역하면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프롬은 현대 영어일수록 have의 사용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삶의 방식이 점점 존재 지향에서 소유 지향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삶이 점점 소유 지향으로 변해갈수록 뒤따라오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염려의 문제입니다. 소유 지향의 사회일수록 온갖 종류의 신경증의 발생 빈도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 염려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이 무엇일까요?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뒤집으면 현재 제자들에게 염려가 많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염려는 많은 곡식을 쌓을 곳이 없어서 염려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염려와는 다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의식주와 관련된 염려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삶의 안전을 보장 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염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전감을 느끼길 원합니다. 삶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미래의 안전을 보장 받을 정도로 쌓아 놓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내일 일을 모른 채 마치 오늘 하루만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멱살 잡힌 채 끌려가지 않을까 늘 걱정되고 불안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자들이 이렇게 염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고 있는 염려가 왜 특별히 제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23)”

음식과 의복에 대한 염려가 음식이나 의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우리 생명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라는 말은 마음이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염려에 시달리면 마음이 갈라지고 생각이 산만하게 됩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불안하니까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일이 잘 안 되니까 염려는 더 커집니다. 이렇게 염려의 악순환에 빠지다 보면 잠도 못 자고 몸에 무리가 옵니다. 정신적으로도 쇠약해 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염려는 우리의 심장을 갉아 먹는 생쥐와 같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염려는 우리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요소로 이생의 염려를 꼽으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계속 염려한다면 어떻게 말씀이 자라서 열매 맺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온갖 염려로 가득 찬 사람의 영혼이 비실비실하다가 점점 시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덜 중요한 일에 대한 염려로 정작 더 중요한 생명에 해를 끼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염려할 만 한 대상이 아닌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염려하라는 명령의 말씀도 여럿 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화해하지 않은 일이 있어 고발을 당할까 염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5).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로 눌리고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고후11:28). 또 디모데에게는 마귀의 시험과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딤전3:7). 심지어 하나님도 염려하십니다. 신명기 8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릴까 염려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 가운데 공통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어그러지고 무너지는 것을 염려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데 아무 염려가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심각한 것 아닙니까? 양이나 동역자가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다면 걱정이 안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일들은 마땅히 염려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는 염려할 대상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기르시고 입히시기 때문입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24)”

까마귀는 독수리처럼 시체를 먹습니다. 심지도 거두지도 않습니다. 골방도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음식을 쌓아 둘 창고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까마귀를 먹이시고 기르십니다. 특히 까마귀는 의식적으로 부정한 새입니다. ‘까악’하는 울음 소리까지 기분이 나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물으십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짐승인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기르신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당연히 먹이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제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귀하게 여기시고 섬세하게 먹이시고 돌보시겠습니까?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27)”

백합화는 어떻습니까? 백합화는 실도 만들지 않고 천을 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들에 핀 백합화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백합화의 꽃말은 순결입니다. 정말 백합화를 보면 순수함, 깨끗함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솔로몬이 입은 모든 영광도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 주신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였던 앙드레 김, 본명 김봉남 선생님이 만든 어떤 드레스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제가 꽃 사진을 찍다 보면 들에 핀 꽃들이 참 쓸데 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식물 입장에서는 이건 좀 낭비가 아닌 싶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꽃을 통해서 들려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있어서 이토록 아름답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

들판의 백합꽃은 대개 하루 피었다가 금새 시들어 버렸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나무가 귀하여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마른 풀과 야생화를 썼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이런 들풀도 하나님께서 입히십니다. 하물며 제자들을 입히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 의식주 문제, 장래 문제로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제자들이 염려에 시달리는 것은 먹은 양식이 없고 입을 옷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적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넉넉히 쌓아 둔 사람이라고 해서 염려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부유한 사람이 염려는 더 많이 합니다. 가진 것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이 부족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 염려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나님이 친히 보살펴 주실 것이니 우리는 놀고 먹어도 된다는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까마귀도 아니고 백합화도 아닙니다. 우리는 심고 거두고 신을 만들도 옷감을 짜는 등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포인트는 내가 계획하고 준비하고 노력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 나의 공급자가 하나님이라는 신뢰를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돈과 재물, 먹을 것과 입을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나에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만 있다면 의식주에 대한 염려와 걱정과 근심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많이 소유한 부자가 되려 하기 보다 믿음이 많은 믿음 부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염려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25,26)”

개역개정판과 달리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25절이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어로는 둘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26절에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한다고 표현된 것으로 볼 때 표준새번역의 해석이 좀 더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키를 한 자 곧 40 센티 정도 더 크게 하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누가 염려를 통해서 수명을 한 시간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답은 당연히 늘릴 수 없다 입니다. 오히려 염려를 하면 할수록 수명이 늘어나기는 커녕 단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염려는 아무리 많이 해도 그저 염려로 끝날 뿐입니다. 염려는 어떠한 생산적인 결과도 낳지 못합니다. 염려가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런 쓸데 없는 염려를 계속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염려 대신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먹을 것, 입을 것을 두고 염려하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먹을 때, 입을 때,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할 때마다 내 삶에 필요한 의식주를 공급해 주신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염려할 에너지가 있으면 그 에너지를 기도에 쏟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그리면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29,30a)”

예수님은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위하여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의식주를 구하며 근심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백성들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입니다. 세상 백성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 보이는 물질에 매여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세상 백성들의 관심은 오직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에 있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 그래서 호의호식 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삶을 추구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 걱정할 이유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30b)”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만수르인데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아버지가 빌 게이츠인데 물질적인 필요가 공급되지 않을까봐 불안해 하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만수르보다 빌 게이츠보다 더 큰 부자인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은 만물의 창조자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더 이상 걱정하고 불안해 하고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세상 백성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구하며 염려하는 대신에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

하나님의 자녀가 구할 것, 제자의 마음에 중심을 차지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복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여기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뤄지도록 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입니까?

사회 초년병 시절 드라마 ‘우영우’에 나오는 정명석 변호사와 비슷한 스타일의 50대 부장님에게 소원이 뭐냐고 여쭈어 본 적이 있습니다. 돈 걱정하지 않고 한번만 원 없이 써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인생인가 싶어 너무 슬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먹고 사는 문제에 매여 일생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인생을 살라고 인간을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이콘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모든 만물 위에 사람을 가장 뛰어나고 고상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힘들게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은 한 줌의 자원을 먼저 차지하지 위해 아웅다웅 다투며 뺏고 빼앗기는 정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그 정글 속에서 맨날 돈 걱정, 장래 걱정만 하다가 일생을 허무하게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정말 사람 답게 사는 삶, 가장 고상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을 대표하고 대리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빚어가고 계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이방인들이 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더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 받은 사람은 일터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직장생활을 합니다. 똑같이 직장 생활하더라도 이점에서 다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런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유능하고 진실되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승진도 되고 먹고 사는 문제도 저절로 해결됩니다. 창세기 요셉도 그랬고 선지자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가정 생활, 학교 생활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다 보면 주님께서 먹는 것, 입는 것까지 덤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제자들은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백성들은 언제나 적은 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질을. 추구하며 살려고 하는데 나 혼자 이를 역행하며 사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고 손해 보는 삶이라 여겨질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치 연약한 양무리를 진정시키는 목자처럼 제자들에게 그런 삶을 사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멋진 자동차, 명품 가방, 근사한 집은 결국 다 썩어지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제자의 숫자가 적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33)”

스페인의 속담에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주머니가 달린 수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속담이 말하고 있듯이 저 세상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들면 됩니다. 도둑도 없고 좀 먹을 일도 없는, 그 가치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보물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를 만들면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푼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주십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에 대한 칭찬과 상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기꺼이 나누고 자비를 베풀고자 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나누고 베푼 것이 어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차곡차곡 쌓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미래의 안정을 위해서 많이 쌓아 놓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친히 공급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구제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제할 수 없고, 구제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물질을 꽉 움켜 쥐고 있으려고만 하면 이것 때문에 갖은 염려, 근심, 두려움을 생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물질을 손에서 내려 놓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면 그 물질을 통해 우리는 좀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영원한 하늘의 상급을 쌓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34)”

대부분 이 구절을 우리가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는가를 보면 우리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함께 볼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만약 자기를 즐겁게 하는 일에만 돈을 쓴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있고 다른 것에 관심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 구제하고 섬기는 일에 물질을 쓴다면 그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반대의 방향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물질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내 마음도 함께 그곳을 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의 한 작은 나라의 결식 아동을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이 분은 그 나라에 대해 계속 검색해 보고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큰 금액도 아니었지만 물질이 가자 마음과 관심이 함께 따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럽습니까? 얼마나 모든 관심이 자기를 향하고 이 땅만 생각하기 쉽습니까? 이럴 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내가 가진 물질을 이웃을 섬기는 일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확장하는 일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도 이웃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확실하고 빠른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많은 길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염려 부재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쌓아 두는 대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저 친구는 무슨 든든한 빽이 있길래 저런 삶을 살까 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빽은 무슨 빽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 빽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빽을 믿고 염려하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답게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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