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갈라디아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

이창무 2022. 2. 1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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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갈라디아서 제 6 강 / 이창무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라디아서 5:16-6:5
요절 /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종 노릇하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으로 동의하고 그렇게 살아가겠다 생각하더라도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자기 중심적인 우리가 남을 위해 사랑으로 종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모태로부터 가지고 태어난 우리 본성은 끊임없이 자기를 중심 자리에 두고,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신이 경쟁에서 무조건 남들보다 앞서길 원합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종 노릇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길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고 참된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 길이 무엇일까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두 가지 속성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과 육체입니다. 육체란 죄를 갈망하는 우리 안에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육체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면 누구나 그 사람 안에 새로 태어난 영적인 자아가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것을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내 안에 두 종류의 사람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사람이든 새사람이든 둘 다 살아있기 때문에 저마다 각자의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는 무엇을 갈망할까요? 육체는 죄가 주는 쾌락을 갈망합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고 내가 왕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추구합니다. 반면에 성령은 무엇을 갈망하게 할까요? 성령은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합니다. 성령은 의와 거룩을 사모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갈망이 정반대로 서로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다툽니다. 성령께서 소원을 주셔서 소감을 깊이 쓰려고 노트북을 펼칩니다. 육체가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을 끈질기게 훼방합니다. 어느새 우리는 처음 계획과 달리 유튜브의 바다를 헤매고 있습니다. 반면 오늘만은 그 동안 쌓인 것을 풀려고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마음껏 놀려고 마음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양심의 가책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 편하게 죄를 즐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따를 것인가? 육체를 따를 것인가? 이것이 하루에도 수도 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진정 바라는 바는 무엇입니까? 두 말할 나위 없이 우리는 성령의 갈망이 육체의 소욕을 이기기를 원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선 육체의 승리를 바라는 목소리도 들려오지만 그것은 거짓 자아, 우리의 옛 사람이 내는 목소리입니다. 우리의 참 자아는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이기고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극적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면 됩니다. 모든 일에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소원에 불을 붙이고 그것이 타오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이라는 불보다 더 크고 활활 타오르는 성령의 맞불을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육체의 불길이 점점 잦아듭니다. 결국 성령의 새 사람이 육체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18)”

만약 우리가 이렇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결코 율법이 이루고자 하는 의와 거룩과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늘 안전운전하는 습관이 몸에 배인 사람은 교통 경찰을 별로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과 흡사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사는 사람은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의와 거룩을 추구하는 마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어떻게 될까요?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a)”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육체를 따라 살고 있는지 척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열거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은 다 성적인 부도덕과 관련된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비정상적이고 무절제한 성적 쾌락에 탐닉하게 됩니다. 그 다음 우상 숭배와 주술은 종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미신과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나오는 여덟 가지 중에서 앞에 나오는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뒤에 나오는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는 이런 태도의 결과를 가리킵니다. 육체의 일 중에 관계성의 파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약물 남용을 가리키는 술 취함과 방탕함이 나옵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1b)”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여기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이따금 실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습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지속적으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 수도 없고 결코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 육체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성령께서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령을 따라 행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 23)”

바울은 육체를 따른 결과는 일이라고 하였고, 성령을 따른 결과는 열매라고 표현부터 달리 하고 있습니다. 모두 아홉 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을 알 때 생기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내가 아닌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사랑은 오직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희락은 하나님 그분 자체를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화평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으로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 가지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먼저 오래 참음은 복수하지 않고 믿어주고 기다려 주는 능력입니다. 자비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함을 따뜻한 시선으로 품어주고 감당해 주는 것입니다. 양선은 다른 사람을 한결같은 진실함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가지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충성은 성실하고 충직하여 믿음직한 성품입니다. 온유는 곧 자신을 낮추는 겸손입니다. 절제는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 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에게서 열매 맺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열매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매인 듯 보이지만 열매가 아닌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도가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능력입니다. 이런 은사는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얼마든지 필요에 따라 주어질 수 있습니다. 사울 왕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적이 있고 미성숙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다양한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사모할 것은 성품과 인격의 변화라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열매라는 은유가 암시하듯이 이것은 조금씩 성장하여 성숙에 이르는 길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열매가 아홉 가지나 되는데, 단수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가 비록 아홉 가지로 구분할 수는 있지만 전체로 하나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점에서 성령의 열매는 기질과 구분됩니다. 요즘 MBTI로 성격 검사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MBTI가 다 다르듯이 성령의 역사와 무관한 기질이나 성격은 그 사람이 유전이나 자라온 환경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입니다. 기질적으로 절제를 잘 하는 사람은 자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성격이 온유하나 충성스럽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하나가 자라면 다른 하나도 같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맺으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인격, 통합된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만약 어떤 성품이 성격과 기질로부터 온 것인지, 성령의 열매인지는 이것을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4,25)”

열매 맺으려면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살면서 성령으로 따라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못 박아야 할 것은 어떤 행동이나 증상이 아닙니다. 그런 행동과 증상이 나오게 만든 우리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갈망,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해체해 버려야 합니다. 그 갈망을 해체하지 않으면 우리가 행위를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육체의 갈망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과 의로움과 구원을 하나님 아닌 엉뚱한 것에서 찾고 있도록 합니다. 인간의 사랑과 인정에서, 성공과 성취에서, 물질적 풍요에서 구원을 얻고 선한 것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삶이 바로 성령으로 사는 삶, 성령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뉴욕 데이빗 백 선교사님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성령과 보조를 맞추며 춤을 추는 삶입니다. 그 옛날 초대 교회 때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비유하여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 손을 잡고 보조를 맞추어 추는 춤으로 묘사했습니다. 강강수월래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이것을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춤은 BTS보다 더 합이 잘 맞는 완벽한 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춤에 너희도 끼어서 같이 추자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스텝이 꼬여서 춤추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고집을 꺾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과 보조를 제대로 맞추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통하게 되고 다음에 어디를 밟아야 할 지 보이게 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삶은 삼위 하나님과 멋진 춤을 추는 삶입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요?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6)”

헛된 영광이란 남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런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면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게 됩니다. 노엽게 하는 것은 우월감에 가득 찬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보다 못 나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깔보고 무시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분노를 자극합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어그로”를 끄는 것입니다. 투기하는 것은 열등감에 빠진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보면 그가 가진 것이 너무 부러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도 잃어버리고 쫄딱 망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더 이상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월감에도 열등감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자아상을 형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월감에 빠질 근거를 제거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복음은 열등감에 빠질 이유를 없애 버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받고 존중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상대적인 비교 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이처럼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고, 당당하면서도 겸손합니다. 이 얼마나 건강하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입니까? 복음은 우리를 그런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모습을 먼저 언급한 다음, 지금부터 긍정적인 모습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타인의 허물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6:1)”

다른 사람이 범죄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우월감에 빠진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상대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할 것입니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상대방이 싫어할까 봐도 못본 척하고 아무 말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려 합니다. 못본 체 넘기지 않습니다. 책임감을 느끼고 바로잡으려 합니다. 여기서 바로잡는다는 말은 원어로 탈골한 뼈를 맞춘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하지만 그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고통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때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합니다. 우월감을 가지고 거칠게 지적만 하면 반발을 살 뿐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온유한 심령을 품을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부터 돌아볼 때 가능합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허물이 많고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합니다. 자신을 바로잡을 때 겪는 그 고통을 알기에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해줄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와 자세는 복음 안에 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입니다.

둘째, 서로 짐을 집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면 서로 짐을 져야 합니다. 서로 짐을 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사랑으로써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과 실제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짐은 지는 것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 힘든 사람, 시련 중에 있는 사람을 못 본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혼자 두지 않고 바짝 옆에 붙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짐을 함께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나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셨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나도 남의 짐을 지는 것, “나 혼자 산다”가 아니라 누군가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길입니다.

셋째, 각자 자기의 짐을 집니다. 3,4절의 개역개정판 번역이 좀 어렵게 되어 있어서 공동번역판을 보겠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살펴봅시다.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이지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못 됩니다.”

한 마디로 남들과 비교하면서 우쭐대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이미 완성의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으스대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남들보다 잘 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자랑하는 일에 써먹는 것은 복음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합당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5)”

남들과 비교하기 보다는 내게 주어진 자기의 짐을 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짐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믿음에서 진보를 이루어야 할 의무, 내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야 할 의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 책무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어제까지 잘 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한 것은 한 것이고, 오늘 내게 주어진 책임이 또 있습니다.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몫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자랑을 다 해버리면 그날에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우리가 굳이 비교를 하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성장하고 성숙해졌는지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을 따라 행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자기 열매를 자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깔보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 났던 못 났건 더 이상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합니다. 자신이 맺은 열매로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사용합니다. 연약한 지체를 돌보며 감당하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결국 성령의 내적인 열매가 공동체 안에서 섬김과 사랑이라는 외적인 열매로 나타납니다.

반면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육체의 일들이 결과로 나타납니다. 육체의 일은 개인적인 타락과 방종 뿐만 아니라 특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아주 현저하게 드러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소모적인 인간 갈등으로 삶의 에너지를 빨아들입니다. 비난과 정죄가 습관이 되고, 남의 짐을 져주는 사람이 아니라 남에게 짐이 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두 말할 나위 없이 후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시작점은 오늘 이 순간, 성령을 따를 것인가? 육체를 따를 것인가? 그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이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인지 모르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선택이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열매가 좋은 열매인지 나쁜 열매인지는 결국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다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바른 선택은 명백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부지런히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있다. 여기에 열매 맺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여기에 건강한 관계 속에서 꽃 피는 참된 기쁨과 행복의 길이 있다.” 우리가 언제나 이 음성을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며,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공동체를 세우고 살리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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