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갈라디아서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창무 2022. 1. 1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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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갈라디아서 제 2 강 / 이창무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

말씀 / 갈라디아서 2:1-21
요절 /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를 이천 년 전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현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왜 우리가 이 현장에 주목해야 할까요? 사실 이 현장에서 벌어졌던 일이 이후 이천 년 교회의 역사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2)”

때는 사도 바울이 처음 예루살렘에 갔던 때로부터 14년이 지난 후입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선교 동역자인 바나바,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방문 목적은 ‘바울이 이방 가운데 전파하고 있는 복음에 대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확실한 인증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왜 이제 와서 굳이 인증을 받아야 했을까요?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칫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온 자신의 사역이 다 헛된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위기 상황인지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원어에는 두려워 떤다는 표현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도대체 당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길래 천하의 바울이 두려워 떨기까지 했을까요?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4)”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거짓 형제들이란 앞선 1장에서 유대로부터 갈라디아 교회들에 와서 다른 복음을 가르쳤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인정하지 않은 복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서서히 갈라디아 성도들 사이로 스며들더니, 이제는 바울의 선교 사역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는 정도로 위협적인 세력으로 커져 있었습니다.

이들을 물리치려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확실하게 바울의 손을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거짓 교사들은 발붙일 곳을 잃어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사도들이 거짓 교사들의 손을 들어주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는 틀림없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로 분열될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는 유대인 교회가 정말 그리스도를 믿는 지 의심할 것입니다. 유대인 교회는 이방인 교회들에 구원이 있는지 의심할 것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할례파와 비할례파로 나뉘어서 끊임없이 반목하고 갈등할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는 할례와 음식법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복음 안에서 누리던 자유를 빼앗기고 다시 율법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자유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헬라인 디도를 앞에 세워놓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여기 있소. 자, 이제 어떻게 하겠소?” 하면서 정면승부를 시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요? 같은 유대인이고 친분이 있는 거짓 교사들일까요? 아직은 좀 낯 설은 바울일까요? 놀랍게도 사도들은 인간적인 친소 관계가 아닌 성령의 인도를 따라 확실하게 바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때 역사를 가른 사도들의 결정이 무엇일까요?

첫째, 어떠한 의무도 더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6b)”

거짓 교사들은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주려고 했지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디도에게 할례를 비롯한 어떤 추가적인 의무도 전혀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에게 유대인처럼 될 것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 누구든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 같은 율법적인 종교는 문화적 일체성을 매우 중시합니다. 같은 옷을 입어야 하고 같은 습관을 지켜야 합니다. 자꾸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분리하려고 합니다. 또한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는 구체적인 규율이 참 많습니다. 날이 갈수록 의무에 의무가 더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문화적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한 배척과 불관용의 태도를 조장합니다. 우리 문화는 우월하고 너희 문화는 열등하다는 편견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특정한 문화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줍니다. 무슨 옷을 입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일이 일상 생활을 간섭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문화를 접했을 때 복음은 이를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동기와 관점, 가치관과 같은 내면의 영역에 집중하지, 밖으로 보이는 차이에 크게 얽매이지 않습니다.

둘째,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9)”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사도 바울이 친교의 악수를 나누고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속에서 같음, 같음 속에서 다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사역의 대상은 이렇게 다르지만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모두 동일한 복음입니다. 각자가 가진 소명은 서로 다르지만 부르신 이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큰 은혜를 내려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큰 은혜를 주사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서로의 문화도 다르고 서로의 사역이 달라도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고 은혜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복음 안에서 체험한 은혜가 커지면 커질수록, 차이는 점점 더 작아집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참된 복음과 은혜를 공통 분모로 삼아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셋째, 연합하여 구제 사역에 힘을 썼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10)”

서로 받은 바 구체적인 소명이 다르다 할지라도 때로는 연합해서 사역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제 사역입니다. 그래서 우리 UBF도 한국 교회와 함께 몇몇 구제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안암1부는 고려대 기독교 연합회를 통해서 복음과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 여러 캠퍼스 선교단체들과 연합 사역을 열심히 펼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한 교회 울타리 안에 있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찬양 문화 한 가지만 봐도 그렇습니다. 기성 세대에게는 찬송가와 7080 복음성가가 친숙합니다. 반면 젊은 세대는 동시대 대중음악의 형식을 빌린 CCM 문화에 익숙합니다. 젊은 세대는 음역대가 높고 6/8박자, 3/2박자 등이 많은 찬송가를 부르기 힘들어 합니다. 반면 기성세대는 16비트에 싱코페이션(당김음)이 난무하는 CCM을 따라 부르기 힘들어 합니다. 미국 교회에서는 이 둘 사이에 갈등이 아주 심각해 “예배 전쟁”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입니다. 왜 전쟁이라는 표현이 들어갔겠습니까?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대해 사정없이 공격하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찬양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문화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힘을 합쳐 동역할 수 없게 되고 서로 교제가 불가능하게 되고, 결국 갈등을 견디다 못해 분열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름만 볼 것이 아니라 같음을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대가 다르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복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만 은혜 받지 않았습니다. 나와 코드가 다른 저 사람도 주님께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과 믿음과 은혜라는 공통 분모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세대 차이, 문화 차이를 뛰어넘어서 함께 손을 잡아 교제하고 동역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오래된 경구를 우리가 항상 기억했으면 합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다음으로 역사의 현장을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가 보겠습니다.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11)”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게바 곧 베드로 와 바울 두 명의 사도가 만났는데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낯 뜨거운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베드로가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함께 맛있게 만찬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그 현장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을 본 베드로는 갑자기 식사를 멈추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는 예전에 “잡아 먹으라” 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이미 정결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로부터 받을 비난을 두려워 위선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에 그 자리에 엉거주춤한 상태로 함께 있던 바나바도 따라서 나가버렸습니다. 덩그러니 남겨진 이방인 출신 신자들은 깊은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목격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14)”

외견상으로는 베드로가 무례를 범한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삶이 그 진리를 따라오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진리보다는 사회적 통념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에게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려 하려느냐”로 책망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런 말로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꼭 말을 해야만 압력이 아닙니다. 무언의 압력이라는 표현도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자리를 피하는 행동이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유대인이 되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정상적인 교제를 할 수 없고 영원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압력을 행사한 베드로 자신은 정작 철저한 유대인으로 산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입니다. 나는 자유롭게 살겠지만 너희들의 자유 때문에 나까지 불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중적인 태도가 바울을 더욱 격노하게 했을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이 되고 그 다음에 예수님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 오늘날 우리의 습관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환영합니다. 그러나 우리 방식대로 정착해 주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데, 들어와서는 우리가 믿는 방식 대로 믿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바꾸면 안 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모두 다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새로 들어온 사람이 먼저 자리잡은 사람들처럼 되어야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그런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모든 족속과 열방과 민족이 각각 자기 모양과 형태 그대로 오직 한 분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한 몸이 되어 서로 깊이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재산이 많든 적든, 보수를 지지하든 진보를 지지하든, 교회 안에 들어오면 예수님 때문에 하나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무언의 압력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율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 힘은 오직 복음에서만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

사람이 자신의 노력,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 진리입니다. 이 복음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 진리를 얼마나 내면화 했느냐가 우리의 인간관계, 식사, 대화 같은 일생 생활의 영역까지 폭넓은 영향을 미칩니다. 율법주의에 매여 있을수록 사람이 엄격하고 예민하고 까다롭습니다. 사람을 너무 가리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과 교제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복음을 내면화 하면 태도가 바뀝니다.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까다롭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환대합니다. 복음 안에서 누구와도 편안하게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하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복음에 의해 형성되었느냐 율법에 의해 형성되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시대에 “복음주의자” 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됩니까? 완고하고 딱딱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너그럽고 열린 사람입니까? 안타깝게도 전자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대해 반대만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주의자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관대하고 열린 사람,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진정한 복음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증언하다 보면 단골로 나오는 반론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7,18)”

반론의 내용은 이런 뜻입니다. “자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만 강조하다가 큰 일 난다. 자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 줄 아느냐? 자유 좋아하다가 개판이 되기 십상이다. 구원은 복음으로 받는 것 인정!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율법으로 신앙 생활 하는 거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입니다. 복음 안에 거하는 사람이 죄와 싸우지 않고 죄악된 생활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음의 자유를 내세워 죄 지을 구실을 만드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헐었던 율법을 다시 세우면, 결국 율법 아래에서 법을 어긴 자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구원받고 나서 왜 자꾸만 율법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율법에도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벌과 정죄에 대한 두려움, 남들보다 앞서 나가 우월감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 모든 것을 내가 성취해서 내가 영광 받고 싶은 마음이 얼마든지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세계입니다. 반면 복음의 길은 낯설게 보입니다. 복음 안에서 산다는 말이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어쩐지 율법보다 나약하고 힘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복음보다 율법이 더 강력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

율법이 복음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복음은 율법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복음에는 죄를 이길 능력, 하나님께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부터 나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여기에는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 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기 전 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았습니다. 오직 나 밖에 몰랐습니다. 그것이 전부이고 또 당연한 것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영접하고 나면 나의 자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옛날처럼 더 이상 자기를 기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자기가 깨어지고 예수님이 주인 되셔서 나의 삶을 다스려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에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몸 그대로 이 땅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죄에 익숙한 습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의지에 저항하며 이제껏 살아온 대로 관성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성도를 힘들게 만드는 제일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한 사람 안에는 육체의 원리만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원리는 육체의 원리를 능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우리는 그분이 살 한 조각, 피 한 방울까지 다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분이 베푸신 한량없는 은혜를 누리며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을 살고자 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주는 두려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동기가 되어 나의 삶 전체를 다 바쳐 예수님을 즐거이 섬기게 합니다.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핵심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신자라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얼마나 내면화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복음이 내면화되지 못하면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다른 문화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번번히 육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정죄 의식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서 유연하고 관대하고 열린 태도를 형성시켜 줍니다. 복음은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만들어 갑니다. 복음은 죄와 싸워 승리할 힘을 주고, 때로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힘을 줍니다. 억지로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켜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여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복음을 안 것 같아도 아직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행복의 열쇠는 바로 복음을 알고 그 복음을 누리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말과 행동 모든 면에 복음의 DNA가 새겨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로만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삶으로 열매 맺는 복음주의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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