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갈라디아서

아들인가 종인가

이창무 2022. 1. 3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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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갈라디아서 제 4 강 / 이창무

아들인가 종인가

말씀 / 갈라디아서 3:26-4:20

요절 / 갈라디아서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강력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새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율법과 세상 초등학문에 종 노릇하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일까 오늘 말씀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복음 진리가 우리에게 부여해준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3:26)"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된 사람들입니다.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니! 너무나 파격적인 신분 상승입니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

어제까지 양복을 입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사람이 군복을 입고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달라집니다. 갑자기 느릿느릿 움직이고, 죽어라 말을 안 듣고,
뭐든지 불평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입은 옷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입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죄인이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의인의
날개를 달게 됩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옷 입은 의인처럼, 아들로서 대우해
주십니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차별과 장벽이 존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꼽고 있습니다.

첫째는 민족적 인종적 장벽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중국, 일본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지만 서로 물고 뜯고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백인과 흑인 사이에 해묵은 갈등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복음 안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과 백성들이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함께 교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신분적 계급적 장벽입니다. 당시는 노예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종과
자유인 사이에 엄격한 분리가 있었습니다. 이후 노예 제도가 철폐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가진 자, 못 가진 자 사이에 장벽이 존재합니다. 부자는
부자끼리,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끼리 어울립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하다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반감을 품지
않습니다. 복음은 빈부 격차와 양극화로 형성된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셋째는 성별의 장벽입니다. 바울 당시는 철저한 남성 우위의 사회였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습니다. 지금도 이런 현상은 여전히 남아 있고,
이제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더 큰 문제라고도 합니다. 이대남(이십대
남자)과 이대녀(이십대 여자) 사이의 젠더 갈등은 대선의 핫 이슈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여자도 남자도 모두 다 평등합니다.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이런 하나됨을 가져올 수 있습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복음은 모든 인간적인 자부심을 다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출신,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자부심의 원천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가문과 혈통을 자랑하기도 하고 자신이 하이 클래스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어떤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 주지
못합니다. 또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너 못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하는 자격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둘째로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알기
전에는 내가 어느 민족인가,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가, 어떤 성별을
지녔는가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고 난 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다는 것이 나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외에 나머지 것들은 중요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작은 차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안암1부 안에서도 차이를 나누기 시작하면 고향이 어디냐, 586 세대냐
MZ 세대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현재 연 수입이 얼마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느냐, 과거에 몇 부 출신이냐, 등등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차별을 낳고 차별이 장벽이 되는 것이 세상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차이가 꼭 장벽이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특별히
교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다 하나가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군가 중에 "팔도 사나이"라는
군가가 있습니다. 이 군가에 이런 반복되는 구절이 나옵니다. "얼싸 좋다
김일병 신나는 어깨춤 우리는 한 가족 팔도 사나이"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팔도에서 왔지만 이제는 같은 군복을 입은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서로 다르지만 이제는 모두 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신나는 어깨춤을 함께 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새로운 정체성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주목합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4:1,2)"

바울은 먼저 당시 후견인 제도에 대해 언급합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상속자인
아들이 만 14세가 될 때까지는 후견인에게, 25세가 될 때까지는 청지기에게
모든 관리를 맡겼다고 합니다. 자기 몫의 재산에 대한 독립적인 권한은 그
나이가 지나야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일거수일투족을 통제
받아야 했기에 바울은 그 상태를 종과 다름이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정의선
현대 자동차 그룹 회장이 저와 같은 과 일년 후배입니다. 같은 수업에서 저와
팀플을 한 적도 있습니다. 부러움을 받는 재벌 3세였지만 제가 옆에서 보니
그 삶에 자유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상속자이지만 종과 다름이 없다는
표현이 실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런 사례를 언급하는
것일까요?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3)"

우리가 어렸을 때, 즉 복음을 몰랐을 때 바로 이와 같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종 노릇을 하였고, 이방인들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 하였습니다. 삶의 구석구석에 의무 조항, 금기 조항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고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내면에 자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4)"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셔서 아들로 하여금 율법의 저주를 우리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요구를 아들로 하여금 우리 대신
성취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5)"

첫째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신 것입니다. "속량"이란 값을 대신
치르고 풀려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노예 주인에게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몸값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대신 치러 주셨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의무와 금기 조항으로 가득 찬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명분을 얻는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입양되었다는 뜻입니다. 노예였던 사람을 대신 몸값을
내주고 해방시켜 준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 이상입니다. 해방된 그 노예를 아예 아들로, 자신의 상속자로
삼아 버리신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일이
복음 안에서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당당히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 받을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양자 된 것이 현재와 미래의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될까요?

첫째,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

아빠와 아버지는 같은 대상을 가리키지만 참 어감이 다릅니다. 아버지는
존경심과 더불어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반면 아빠라는 호칭에서는
친근함이 묻어 납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입양된
아들입니다. 그래서 신분 상으로는 아들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는 기도가 참 고역입니다.
부장님에게 결재 받으러 가는 느낌도 들고 청와대에 청원을 넣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어느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친밀함 가운데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부터 기도는
고역의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겁고 귀한 시간이 됩니다. 기도 시간에 어떻게
하나님과 이토록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참 놀랍고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7)"

요즘에는 건물주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 인생 승리자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건물주의 아들이면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건물을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도 상속받을 권리가 있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상각이 되어 그 가치가 하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려 받게 될 하나님
나라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인생의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복음의 절정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현재와 미래가 이 사실 하나로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 앞에서 아들로 살고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아들로
유업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되었다고 모두가 다 자동적으로 양자됨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8,9)"

갈라디아 성도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을 숭배하며 그것들에 매여
종 노릇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우스, 포세이돈, 아프로디테 등을 섬기던
헬라의 종교를 바울은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표현합니다. 우상들은
아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약합니다. 그들의 종교는 주고받는 거래 관계에
기초해 있고 미신적이기 때문에 천박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수준 낮고
유치한 종교에 얽매여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방 종교, 율법주의 종교를 지배하는 정서는
두려움입니다. 신이 자기 인생을 해코지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온갖 금기를 만들어 내서 지킵니다. 한국 사람들이 손 없는 날을 골라서
이사하려는 것이 다 이런 심리입니다. 또한 그 신에게 자기가 이렇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려고 합니다. 복채를 두둑하게 내서 잘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어찌하든 복을 타내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왜 특별히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우리를
잘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두 쪽이
나도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돈이든, 사랑이든, 명예이든, 권력이든
다른 우상들을 찾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다시 우상의
노예가 되려 하겠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이미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뜻한 바가 있어 아들 하나를
입양했습니다. 그것도 첫째보다 나이 많은 형을 입양했습니다. 이 아이는 한
번 입양이 되었다가 파양(입양을 취소하는 것)되어 고아원으로 되돌아온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입양 다음날 아침에 양부모가 아이가 잘
잤는지 보러 방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어느새 아이가 방
청소를 다하고 침구를 정리한 다음에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일어나기 전에 가려고 일찍 그 방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때 양부모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고 합니다. 그 아이 속에서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 파양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두 분이 계속해서 아이에게 "우리는 절대 너를 버리지 않는다. 너는 내
배에서 나온 네 동생과 똑 같은 내 아들이다."라고 반복해서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이가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양부모의 일관된 말과
행동을 보고 마침내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이제는 늦잠 자고
청소도 잘 안 하고 그 방이 개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두분은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흐뭇하고 기뻤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들입니까? 종입니까? 물론 답은 아들입니다. 하지만 혹시 종 같은
아들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만약 종 같은 아들로 살고 있다면
우리를 양자로 입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구원하여 자녀로 삼으신 사람을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입양했다가 중간에 맘에 안 든다고 파양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저의
뇌피셜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장에도 나오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좀 늦게 일어났다고, 이불 좀 안 갰다고 집에서
쫓아내지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정신을 차리도록 징계도
하시지만,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미 형성된 부자 관계를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하지 않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얻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과 관심을 누리고 있기에 만족감이
있습니다. 누가 날 사랑해주나, 누가 날 인정해주거나 누가 날 밀어주나 이런
고민을 하면 만족시켜 줄 대상을 찾아 여기저기 방황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 거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목자로서 갈라디아 성도들을 어떻게 섬겼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복음적인 사역의 원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복음 사역은 서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1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할 때 모든 것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최대한 맞추어 주고자 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처럼 옷을 입고 갈라디아
사람처럼 음식을 먹고 그들의 약점과 허물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갈라디아 사람들도 바울의 약점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아마 당시 바울에게 고약한 질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영접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서로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복음 사역이 꽃피게 됩니다.

둘째, 복음 사역은 진리를 말합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

바울은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갈라디아 성도들과 일시적은 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적인 사역을 하려면 사랑하는 사람의 분노를 살
줄 알면서도 잘못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상대방에게 최선이라면
말입니다.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만이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소통입니다.

셋째, 복음 사역은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열심히 사람들을 칭찬하고 띄워 주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 보답으로 자신을 칭찬하고 띄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정서적 의존 관계를 만들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목적은 전혀 달랐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

바울의 목표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고자 합니다. 임신하면 엄마는 아기를
뱃속에 넣고 다니며 외부로부터 보호해 주고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많은 수고를 하지만 기한이 차면 아기는 엄마 몸 밖으로
나오게 되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계속 자기 몸 안에 둘 수 없습니다. 이처럼
복음적인 사역자는 양들이 보호받고 성장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수고를 감당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양이 목자의 품을 벗어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우뚝 서도록 도와줍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복음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방식 그 자체가 복음을 보여주는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복음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 자신이 먼저 복음
안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복음 안에서 자기 발견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 약점까지도 양들 앞에 투명하게 열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누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들을 낳고 종은 종을 낳습니다. 나는 아들일까요?
종일까요? 우리가 먼저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온 최대의 선물인 양자됨의
은혜와 영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들을 낳는 해산의 수고를 감당함으로 복음적인 열매를 맺는
안암 1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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