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갈라디아서

율법과 복음

이창무 2022. 1. 2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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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갈라디아서 제 3 강 / 이창무

율법과 복음

말씀 / 갈라디아서 3:1-25
요절 /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성경에서 율법만큼 우리를 알쏭달쏭하게 하는 단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율법에 대해 성경은 어떤 때는 매우 긍정적으로 기술하다가 어떤 때는 또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합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니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정확한 자리가 어디인가에 대해 정리가 안 되고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 복음과의 관계 속에서 율법의 제 자리가 어디인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 앞에 밝히 보이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이 문자 그대로 갈라디아 성도들이 십자가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는 뜻일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갈라디아로부터 1500 킬로미터 떨어진 예루살렘에서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밝히 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고 그 말씀으로부터 감동을 받아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내 눈 앞에 계신 것 같은 생생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저도 대학교 2학년 여름 수양회 때 십자가 메시지를 듣고 처음으로 마치 내가 이천 년 전 그 십자가 현장에 가 있는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가까이 느끼는 것은 저만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 모두의 공통된 경험일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밝히 보게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

십자가를 밝히 보는 일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셔야 그때 비로서 십자가를 밝히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율법의 행위로 된 일입니까? 달리 표현하면 열심히 도를 닦았더니 어느 날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가능하다면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가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밝히 볼 수 있게 된 것은 자기를 갈고 닦아서가 아니라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들었고 그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고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금방 새사람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기대에 비해 변화가 너무 더디었습니다. 늘 이 모양 이 꼴인 자신의 모습에 낙심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복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장하고 거룩해지려면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이 들려왔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처음에는 “그럴 듯한 말인데”로 시작하더니 어느새 “이 말이 참 지혜로운 말이네”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바울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용두사미라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와 육체를 병렬에 놓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율법의 행위와 육체는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 같습니다. 율법이 있어야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뼈와 근육으로 구성된 우리 몸(body)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자기중심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결코 이 자기중심성을 깨트리지 못합니다. 도리어 율법의 행위는 자기 의를 쌓음으로 자기중심성을 더 강화합니다. 자신의 삶을 자기 스스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멈출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육체를 이기기 위해서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육체에 봉사하고 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장하고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해답은 명백합니다. 첫 단계는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십자가를 밝히 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를 진실되게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못 박히신 주님 앞에서 나의 우상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안에 독초처럼 자라고 있던 육체의 뿌리가 시들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것이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뿌리가 뽑힐 때까지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 성령님이 우리 곁에서 도우십니다. 우리가 너무 조급할 때가 많습니다. 당장 내면이 그리스도의 성품처럼 확 달라지길 바랍니다. 하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나 자신에게 절망하고 낙심하곤 합니다. 이럴 때 복음을 버리고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속으면 안 됩니다. 율법의 행위는 실패를 전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든 답은 처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밝히 본 십자가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았듯이 구원 이후의 삶의 해답도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만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성령의 능력으로 풍성한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합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의를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왜 하필 아브라함일까요? 아브라함은 율법주의자들도 존경하고 인정하는 유대민족의 시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습니까? 성경에서 자아 완성의 길을 걸었던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인정하셨습니다. 이 말이 아브라함이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아브라함의 상태는 죄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의인으로 간주하시고 그렇게 대하셨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한 사람이 죄인인 동시에 의인일 수 있는가?” 이는 오직 복음 안에서만 현실이 되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9,1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에 속한 사람과 율법에 속한 사람입니다.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믿음에 속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아무도 율법은 기록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저주는 예고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심리적 주관적인 저주까지 포괄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늘 불안과 초조가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기준에 나 자신이 충분히 부합한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사람처럼 눌리고 쉼이 없습니다. 또한 율법에 속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시기하거나 기가 팍 죽습니다. 나보다 못하는 사람을 보면 우월감을 느끼고 무시합니다. 남들에게 무시 받고 정죄 받지 않으려 하다가 결국 위선자가 되기 십상입니다. 아니면 내 진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자꾸 숨으려고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원래 우리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3,14)”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는 예수님이 가져가시고 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이 죄인처럼 취급을 받으셨기 때문에 죄 많은 우리가 의인처럼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저주에서 해방되어 의인의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복 역시 예고된 운명이자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믿음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내면에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를 하나님께서 이미 용납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여유가 있습니다.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인정하고 칭찬해 주고, 나보다 못하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격려해 주고자 합니다. 언제나 투명하고 억지로 자신을 포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에게 이런 행복한 인생, 건강한 인생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지금 우리는 믿음에 속한 사람입니까? 율법에 속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믿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속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을 다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나 죄사함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은혜로 되지만 이 땅에서 복 받는 것은 예쁜 짓을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안 그러면 하나님이 내 인생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실 것 같아 전전긍긍합니다. 이것은 복을 향해 가다가 유턴해서 율법 아래 저주받은 삶을 향해 역주행하는 것입니다. 행위나 자격을 갖추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타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에 따르는 자유와 해방, 평안과 기쁨 등등 온갖 놀라운 복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복을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복을 잘 누리는 것입니다. 이미 복을 주셨건만 저주 받은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주신 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을 누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누리는 것이 그 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입니다. 그 복이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가를 탐구하는 것만으로 한 평생이 부족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믿음의 복을 누리고 더욱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믿음과 율법을 대비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의 모든 것이 다 부정적인 것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이제는 아예 율법 자체를 버리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긴 하지만 또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율법의 한계와 역할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15)”

사람이 맺은 언약은 구속력이 있습니다. 함부로 무효로 하기 어렵습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맺은 언약은 후에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집을 팔아 삼 개월 후에 넘겨주기로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집값이 올랐다고 해서 마음대로 안 팔겠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사례를 언급하는 것일까요?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6,1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에게 약속하신 복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장차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언약이 폐기될 수 없다면 하물며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은 어떻겠습니까? 언약을 맺은 후 430년이 지난 후 주어진 모세의 율법이 언약을 폐기할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을 약속하셨는데 중간에 마음을 바꿔 다 취소하고 율법을 통해 행위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말도 안 됩니다. 처음부터 율법은 구원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복을 받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율법을 주셨을까요?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

드디어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정하신 취지가 밝혀집니다. 율법은 범법하므로 더해진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죄는 법이 있든 없든 죄입니다. 하지만 법이 있어야 사람들은 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과속운전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속 80키로만 넘어도 과속이라고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시속 200키로로 달려도 과속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시속 110키로를 넘으면 과속이다 라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를 범법으로 규정함으로서 모든 사람이 죄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율법은 죄에 대해서, 처벌에 대해서 말해주려 온 것입니다. 율법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다만 온 세상이 죄 아래 있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의롭지 못함을 알려 주는 능력은 있지만 우리를 의롭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이로써 언약과 율법 중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주인공은 언약이요 율법은 조연이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과 율법을 주신 방식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는 직접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서 주셨습니다. 왕이 직접 말한 것과 신하를 통해서 대신 읽은 것 사이에 분명한 급 차이가 있듯이 당연히 언약이 율법보다 앞서고 중요합니다.

그러면 조연인 율법은 어떤 구체적인 역할을 부여 받았을까요?

첫째, 율법은 간수 역할을 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23)”

“매인 바 되고 갇혔느니라”라는 표현은 감옥을 연상하게 합니다. 감옥에는 죄수를 지키는 간수가 있습니다. 간수는 24시간 365일 죄수를 감시합니다. 그러다가 죄수가 문제를 일으키면 즉시 곤봉을 들어 진압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범죄자들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릅니다. 율법의 역할이 간수의 역할과 흡사합니다. 죄로 인해 내면이 타락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억울한 피해자들이 속출하며 공동체가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그 순간 이런 말을 해 줄 율법이 필요합니다. “제발 그만 해. 이러다 다 죽어!” 그래도 말을 듣지 않고 난리를 치면 결국 자유를 박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율법이 구원을 줄 수는 없지만, 타락한 인간이 마구 폭주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제공해 줄 수는 있습니다.

둘째,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 역할을 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

여기서 초등교사라고 해서 오늘날 인자하고 친절한 초등학교 선생님을 떠올리면 안 됩니다. 본문의 초등교사는 바울 시대의 가정교사를 가리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노예들 중에서 똑똑한 사람을 골라 어린 자녀들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가정교사는 매사에 엄격하게 아이를 훈육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예의범절과 사회적 규범을 몸에 익히도록 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아이에게 체벌을 가할 권한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이와 가정교사와의 관계는 친밀하거나 인격적이지 못했습니다. 가정교사는 아이에게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면 더 이상 가정교사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어른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왜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고 이런 행동은 꼭 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교사의 그립에 꽉 잡혀 있다면, 정서적으로 병든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가정 교사와 비슷합니다. 율법은 자유를 박탈합니다. 율법과 우리의 관계는 친밀하거나 인격적이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당근과 채찍에 기초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미성숙한 어린아이로 취급합니다. 율법 뿐만 아니라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종교는 다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을 예속하고 신과의 관계가 비인격적입니다. 종교 생활의 주된 동기는 상 받으려는 마음과 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이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은 불가피할 수 있습니다. 미성숙을 거쳐야 성숙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성숙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준비 과정일 뿐입니다. 본편이 극장개봉을 했으면 예고편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율법은 복음에게, 행위는 믿음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율법에 매인 삶을 벗어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비인격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 안에 있게 되면 더 이상 율법은 거들떠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초등학교 때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려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는 베스트셀러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앙 생활의 기초적인 상항들을 율법을 통해 배웁니다. 복음 안에서 그것들을 잊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지키려는 동기가 달라집니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율법적으로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이 복음 안에서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처럼 복음과 율법은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주연과 조연처럼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한계를 모르는 율법주의도 안 되지만, 율법의 역할을 부정하는 율법폐기론도 옳지 않습니다. 교양과 문화와 규범 밑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와서 체면과 교양과 문화 밑에 감추어진 우리의 본성을 들춰 냅니다. 죄를 알게 도와줍니다. 하나님 목전에서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삶 전부가 송두리째 죄라는 사실을 율법이 와서 눈을 열어 보여줍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복음이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진리가 선포될 때 그 진리를 전심으로 받아들이고 환영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나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임을 믿게 됩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게 되고, 믿음에 속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을 마음껏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뜻대로 율법을 잘 사용하여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초보적인 신앙을 벗어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더욱 더 그분께 순종하는 성숙한 신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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