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갈라디아서

다른 복음은 없다

이창무 2022. 1. 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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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갈라디아서 제 1 강 / 이창무

다른 복음은 없다

말씀 / 갈라디아서 1:1-24
요절 /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부터 갈라디아서 말씀을 시작합니다.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누구에게 필요할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불신자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복음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신자들에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구원을 주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태도와 습관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 죄로부터 자유를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의 능력을 얼마나 경험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우리가 이번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 복음의 능력, 복음 안에 있는 자유를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A.D. 50년 무렵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과 같은 갈라디아 남부의 여러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이 교회들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개척된 곳이고 구성원의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

바울은 사도입니다. 사도란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세상에 전달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 가운데 이렇게 주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사도가 된 사람은 열 두 사도와 사도 바울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다소 거칠고 단정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계시로 받은 참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4)”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지러 오셨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하면 “우리는 물에 빠져 있다”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전혀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가만 내버려 두면 빠져 죽을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이런 상태에 놓인 사람을 앞에 두고 수영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불교, 유교, 이슬람교와 같은 주요 종교의 창시자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교사들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봐야 본을 보여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져낼 구원자이지 지혜와 도를 가르쳐 줄 교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대속이란 본래 우리가 치러야만 하는 대가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치르셨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혁명적인 이유는 바로 대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구원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에게 “네가 실패한 이유는 노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방법은 다 알려주지 않았니? 좀 더 노오력을 해 봐라. 죽기 살기로 한 번 더 될 때까지 더 열심히 해 봐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묵묵히 우리를 대신해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 모든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신 상 받으러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대신 죄 받으러 나갈 이는 그리스도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셋째,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결과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 모릅니다. 자기가 얼마나 건짐이 절실히 필요한 줄 모르고 하나님께 구원자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작정하시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구원을 얻는 일에 우리가 기여한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복음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송영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5)”

당연히 모든 영광은 오롯이 하나님의 몫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다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기여한 바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랑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하셨기 때문에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Good News, 기쁜 소식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죽어 가던 사람에게 구조대가 도착했다는 소식!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거액의 채무를 지고 마지막 남은 희망은 오징어 게임에서 1 등 하는 것 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 너의 빚을 대신 갚아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식! 이런 사건에 비유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아니, 영벌에서 영생으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더 이상 비교할 것이 없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한편 복음은 우리에게 유쾌하지 않은 소식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비참함, 우리가 처한 절망적인 상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우리에게 돌아갈 영광도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내고, 우리 안에 내재된 교만을 뿌리부터 흔드는 일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 안에는 복음에 저항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복음에서 이탈하라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그래도 이만큼은 내가 했다 라는 것을 덧붙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제대로 알려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또 내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려면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무능함,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나의 실존을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만큼 복음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6,7)”

안타깝게도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온전한 복음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유대로부터 온 거짓 선생들이 가르친 변질된 복음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짓 선생들이 예수님이 구원자시라는 것을 부인하거나 복음에 반대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들은 복음에 무언가를 첨가시키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당장 삼겹살을 끊고 음식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2% 부족한 복음이었고, 자기들이 전한 복음이 더 나은 복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흔히들 기존에 있던 것에 새로운 것을 더 하면 전보다 더 좋아지리라 기대합니다. 조금 있으면 삼성 갤럭시 S22가 출시된다고 합니다. 유튜브에 보면 S22에 어떤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을까? 얼마나 더 편리해졌을까? 많은 기대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도 새로운 것이 더해지면 더 좋은 복음이 되는 것일까요? 작년 2월에 롯데월드 지하에서 미국의 그라피티 작가 존원이 그린 감정가 5억원의 벽화가 전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남녀가 낙서인 줄 알고 여기에 녹색 페인트로 붓 자국 세 개를 그리고 사라졌다가 결국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이 한 몇 번의 덧 칠이 작품의 전체 가치를 송두리째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작가와 기획자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다른 복음은 없다”라고 선포합니다. 복음에 무언가를 더 첨가하면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계시하신 복음은 그 자체로 완결된 복음, 완전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율법을 살짝 가미한 다른 복음은 결국 복음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너뜨립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를 다시 율법의 정죄 안에 가두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몹시 화가 나 있습니다. 온전한 복음에서 속히 떠나 변질된 복음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도 화가 났고, 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한 거짓 교사들에게는 연거푸 저주를 선포합니다(8,9).

교회사를 보면 거듭 다른 복음이 나타났습니다. 초대 교회 뿐 아니라 중세 카톨릭의 공로주의, 행위구원론, 신인협동설 등등 다른 시대에도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이단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닙니다. 명백한 이단은 누구나 다 알기 때문에 조심합니다. 또한 복음에 샤머니즘이 덧붙여진 한국의 기복 신앙, 복음에 아메리칸 드림이 덧붙여진 미국의 번영 신학은 분명히 이 시대 교회에 깊숙이 침투한 다른 복음입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제자도를 오래전부터 강조해 온 덕분에 우리는 이런 변질된 복음에 대해 비판 의식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헌신의 수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는 암묵적인 또는 명시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는 우리를 포함해서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당신의 삶을 드리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옳은 말이고 지극히 성경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자칫 이 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의 원리를 몰아내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께 삶을 전폭적으로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어떻게 하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만 구원을 잃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나의 헌신이 충분하지 못한 것 같아 계속 불안합니다. 열심히 영적 투쟁한 사람의 소감을 들으면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좌절감을 느낍니다. 그러다가도 나보다 덜 헌신하는 소위 날라리 같은 신자들이 주변에 늘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보면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얻습니다.

여기서 생겨나는 대표적인 부작용 중 하나가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 가운데도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 사이에 등급이 생겨났던 것처럼, 헌신의 정도에 따라 신자들 사이에 등급이 나뉘는 것입니다. 상위 그룹에 속한 사람은 우월감을 느끼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하위 그룹에 속한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고 낙심합니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해지면 성도 간에 틈이 벌어지고 공동체의 하나됨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예기치 않은 또 다른 부작용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 만능주의를 빠지는 것입니다. 헌신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을 계속 받다 보면 지칩니다. 마침내 탈진하고 맙니다. 이럴 때 정반대의 극단에 이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혜만 있으면 된다. 어떤 헌신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영적 투쟁도 무용지물이다.” 이런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도 성장도 없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에 결국 은혜 만능주의에 대한 확신은 더 커집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의 선후 관계가 뒤바뀌어 버렸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헌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요건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 무엇 하나라도 더한다면 복음의 순서를 완전히 뒤집어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만을 강조하며 헌신을 폐기 처분하는 것은 복음의 연결 고리를 중간에 아예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헌신의 수준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크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나를 감동시키고 변화시켜 마침내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헌신한 것이 있다면 내가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 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헌신 또한 은혜입니다. 결코 나의 의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은혜가 바울의 삶 가운데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11절부터 24절까지는 사도 바울의 인생 소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인생 소감을 나누게 된 이유는 막연히 감동을 주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은혜의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공격을 받고 있었을까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2)”

여기서 바울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전부 다 당시 공격을 받고 있던 포인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은 그의 천재적인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은 다른 사도들로부터 배워서 습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공격 중에 바울은 먼저 첫번째 바울의 복음 자가 기원설에 대해 반박합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3,14)”

바울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체포하고 옥에 가두는 일에 사명감을 느끼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와 율법에 얼마나 충성심이 강하고 열심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랬던 그가 스스로 생각을 180도 바꾸어 복음을 지지하기로 결론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복음 전파자가 되기로 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오늘부터 윤석열 후보가 스스로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고 선거 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하거나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두번째 바울의 복음 사도 기원설에 대해 반박합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17-19)”

바울은 회심 직 후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서 삼 년 동안 홀로 구약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을 방문했지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만을 만났을 뿐 다른 사도들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줌이 없어서 비대면으로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다른 사도들로부터 배워서 형성된 것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바울의 복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5,16)”

바울을 태 중에서부터 택하신 하나님께서 때가 되자 일방적인 은혜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이방에 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의 복음을 바울 안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12절에 나온 대로 바울의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바울의 일방적인 주장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2-24)”

유대의 교회들은 열두 사도로부터 복음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듣고 배웠습니다. 만약 이 둘의 내용이 서로 사뭇 달랐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당장 바울을 이단의 괴수로 탄핵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고 부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열두 사도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은 정확하게 모든 면에서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떻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둘이 전하는 메시지가 같을 수 있습니까?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둘 다 같은 소스로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의 복음도 자기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바울의 복음 역시 자기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참된 복음일까요? 혹시 왜곡되거나 비뚤어진 복음은 아닐까요? 이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과 일치하는 지 그렇지 않은 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은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검증의 기준이며 진리 판단의 시금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나의 경험, 소신, 감정으로 복음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사이에 제 5 복음서가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 복음서의 이름은 “내가 복음”이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 때 정말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르시온은 신약 성경 중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부분만 짜깁기를 해서 “마르시온 성경”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정죄했지만 상당히 많은 추종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저마다 각자의 복음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각자 자신의 경험, 소신, 감정과 스타일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학구적인 사람은 온갖 철학과 사상의 렌즈로 재구성한 복음을 선호합니다. 감성적인 사람은 감성을 터치하는 위로의 메시지에 집중하고 다른 말씀은 잘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행동파인 사람은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구호로 삼기에 좋은 말씀만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다가 자신들에게 친숙한 율법의 옷을 입히면 베스트의 복음이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절대시하면 언제든 다른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치우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치우쳐서 온전한 복음에서 멀어질 위험이 상존합니다. 이것을 예방하려면 나의 경험, 감정, 소신으로 성경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복음으로 나의 경험, 감정, 소신을 판단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계시된 참된 복음은 무엇입니까? 참된 복음은 무엇보다 은혜의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은 연합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참된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원수, 교회의 원수 노릇하던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켰습니다. 복음은 우상에게 종 노릇하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복음은 운명에 슬피 울던 한국의 대학생들의 심령에서 삶의 의미와 만족과 기쁨이 터져 나오게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복음의 능력에 대한 증언할 차례입니다. 할 말이 없고 멀게만 느껴진다면, 그것은 복음에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복음을 붙들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2022년이 우리 안암 1부가 참된 복음을 발견하고 각자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1년 후 2022년 요절 심포지움을 쓰면서 “내가 이전에 이러이러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능력이 나를 새롭게 하여 이런 사람이 되게 했다”라고 바울처럼 간증할 수 있게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가 서로를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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