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갈라디아서

복음 안에서 자유

이창무 2022. 2. 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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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갈라디아서 제 5  / 이창무

복음 안에서 자유

말씀 / 갈라디아서 4:21-5:15

요절 /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지난 설에 온 가족이 “나이브스 아웃”이라는 영화를 함께 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영화에 엄청난 반전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큰 재산을 상속 받게 되고 전혀 그렇게 안 보였던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 집니다. 오늘 말씀 안에도 두 가지 반전이 있습니다.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가,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가에 관련되어 이 세상의 보편적인 작동 방식을 뒤집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4:21)”

 

사도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을 향해 율법이 말하는 바를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구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까?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2,23)”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여종 하갈을 통해서 낳은 아들입니다. 반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사라를 통해 얻은 아들입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언급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4-26)”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성격을 설명해 주는 우화로 활용합니다. 하갈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는 거짓 교사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의 자신의 행위와 능력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고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바라고 기대합니다. 이들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천국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각각 규정하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로 종 노릇과 자유자라는 표현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율법이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종 노릇 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잘 지킬 때나 지키지 못할 때나 종 노릇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잘 지킬 때는 잘난 체하고 오만해 집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과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불안해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고 있는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의 비판에 민감하며,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 합니다. 반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는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자존감이 매우 낮고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자학하는 말을 하고, 자꾸만 공동체 안에서 겉돌게 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거짓 우상이 만들어 내는 두려움과 이기심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모습 이대로 용납하셨고 앞으로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기에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순종합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럽습니다. 그들의 형편과 고뇌, 연약함에 깊이 공감하고 긍휼히 여깁니다.

 

종 노릇하는 사람과 자유로운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답은 물론 자유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누가 종이 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율법에 매여 종 노릇 해온 사람들입니다. 저절로 다 자유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율법을 벗어나 복음 안으로 들어와야만 합니다. 그러면 복음 안에서 자유는 어떤 사람에게 임하게 됩니까?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27)”

 

이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바벨론 포로기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무력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던 때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는 사라처럼 잉태하지 못한 자, 산고를 모르는 자와 같았습니다. 이럴 때는 슬퍼하며 통곡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도리어 즐거워하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무력한 그들 가운데 장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함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 그들이 맺을 열매가 강한 자들이 자신을 의지한 결과보다 더 크고 풍성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합니다. 나이 많아 태가 죽은 것 같았던 사라를 통해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에서 귀환할 수 있었고 400년이 지난 후 온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은 잉태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것이다. 복음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 부족한 사람의 것이다.”

 

복음은 나는 유능하고 뛰어나서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복음을 거부합니다. 복음보다 자아 실현과 자기 완성이라는 율법의 길을 더 좋아합니다. 오늘날 직업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사람의 인정에서 자존감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성취와 업적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그것들에 의해 지배당하게 됩니다. 돈과 힘, 인정에 노예처럼 끌려 다닙니다. 성공해야 한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에 시달리며 불안해합니다. 설사 바라던 바를 이루어도 이내 별 것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다 이마저 잃게 되면 존재 의미를 잃고 비참해 집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한때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안 그럴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 날 새벽에 베드로의 자신감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자기에게 두었던 기대와 신뢰는 다 부셔져서 가루가 되었습니다. 무능하고 비겁하고 형편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아프고 비참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베드로에게 복음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깨어진 틈 사이로 은혜의 빛, 복음의 빛이 그의 내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고 오직 주님만이 나를 아신다는 고백이 심령에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예수님의 꿈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를 잡았던 것처럼 베드로는 죽어가던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혹시 실패 때문에 낙심이 되십니까? 나의 무능함 때문에 우울하십니까? 남들 앞에 보란 듯이 내놓을 것이 없어 부끄럽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실패한 적이 없고 모든 일에 유능하고 다 잘한 일 뿐이라면 나는 과연 복음을 알게 되었을까요? 사라가 하갈처럼 젊고 아들을 쑥쑥 잘 낳는 여인이었다면 하나님만 바라는 여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처절한 실패가 없었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초대 교회를 섬기는 목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복음은 이런 낙심한 실패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깨고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게 해 주었습니다. 복음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더욱 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합니다. 열국의 어미로 삼으시고 좋은 열매 맺는 가지가 되게 해 주십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주님을 노래하게 됩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풀려나 내면에 자유와 기쁨을 만끽하게 됩니다. 율법의 종 노릇할 수 밖에 없던 우리의 강한 자아를 깨시고 은혜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사는 데 고전을 겪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 아래에서 무엇을 했느냐 못 했느냐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롤로코스터를 타는 신앙 생활을 하곤 합니다. 이런 삶에 지친 나머지 아예 율법을 다 내팽개쳐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집 안에서 이스마엘과 이삭이 서로 다투었 듯이 우리 마음 속에서도 율법과 복음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30)”

 

율법주의와 복음은 한 지붕 안에서 동거할 수 없습니다.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는 말은 율법주의와 분명한 선을 그으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얻은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를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다시 종의 멍에를 메어 이 소중한 자유를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군인이 눈을 부릅뜨고 경계 근무를 서듯이 자유의 적들이 틈타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는 적들이 어떤 방식으로 침투해 들어왔을까요?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2,3)”

 

거짓 교사들은 처음에 딱 하나 할례만 받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미끼를 덥석 물어 할례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다음에는 음식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그 다음에는 안식일과 절기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마침내는 율법 전체를 다 지키도록 요구할 것입니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야금야금 자유를 다 빼앗아 가고 맙니다. 그 결과 어떤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까?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4)”

 

율법을 의지하게 되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스토리가 쌓일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을 수십년 간 성실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약한 사람을 종종 보곤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은혜의 세계를 모르고 율법적인 신앙 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라는 선물을 스스로 팽개치고 스스로 종의 멍에를 메려 할까요?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요? 그 주된 이유는 우리가 너무 급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를 하나를 결정하고 시행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갑니다. 반면에 모든 결정이 즉각 이루어지고 일의 진행이 아주 효율적인 사회가 있습니다. 바로 독재 국가입니다. 우리가 빨리 무언가를 이루려 하다 보면 율법주의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서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좋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 자유가 있기 때문에 느립니다. 자발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일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답답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 자유를 지키려면 긴 호흡과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인내하려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확실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

 

우리가 기다리는 확실한 소망은 의의 소망입니다. 의의 소망이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긴 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데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아직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어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장차 우리는 반드시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흠 없고 티 없는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날을 기다립니다. 넘어진다 해도 아예 주저 앉지는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의의 소망을 붙들고 다시 일어납니다. 또 넘어져도 또 일어나고 영광의 날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겉보기엔 이 길이 매우 느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것보다 빠르고 확실한 길입니다.

 

이제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

 

효력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할례를 받은 것, 그 자체로 하나님과 관계성을 바르게 맺는 것에 도움이 됩니까?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데 결정적인 장애물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둘 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잘 했다고 성공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인정 받거나 사랑 받는 것도 아니고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쓸모 있고 득이 되는 것은 딱 한 가지 뿐입니다. 바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란 사랑이란 열매를 맺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의 열매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량 없는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하게 됩니다. 그 사랑이 차고 넘쳐서 이웃과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 데 유익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뿐입니다.

 

다음 7절부터 12절까지 보면 바울은 잔뜩 화가 난 모습입니다. 누군가를 향해 온갖 독설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바울이 분노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거짓 교사들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화가 난 이유는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야금야금 빼앗아 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 사랑을 가로 막고 자유를 빼앗아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 외에 복음의 자유를 위협하는 또 다른 적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

 

바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자들입니다. 복음 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빌미로 삼아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말씀을 경외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아쉽거나 생각날 때만 신앙 생활합니다. 왜 그렇게 사냐고 물으면 내 자유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안에 자유가 있다고 하지 않았냐며 강변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합니다. 앞서 율법 아래 종 노릇 하는 자들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둘 다 종 노릇입니다. 하지만 동기가 전혀 다릅니다. 율법에 매인 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또는 자기 자랑을 위해 종 노릇 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사랑으로 종 노릇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고자 합니다. 가장 자유로운 사람의 실제 삶의 모습은 종의 모습이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닮고 배우는 길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4)”

 

율법의 정수는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결코 온전한 이웃 사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반면에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종이 되어 이웃을 섬김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율법을 실현하지 못하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이야말로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다니 이 역시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복음 안에서 주어진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으면 어떻게 됩니까?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

 

서로 물고 뜯다가 같이 망합니다. 자기의 자유와 권리만 주장하다 보면 공동체가 설 수 없습니다. 결국 피해가 고스란히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반면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음에는 나만 손해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공동체가 든든히 서게 되고 그 혜택도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개의 반전과 역설을 만났습니다. 첫번째는 복음의 세계에 들어갈 사람은 성공한 사람, 강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맛본 사람,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된 사람은 사랑으로써 서로 종 노릇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개의 미스테리를 다 풀고 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우리는 복음의 심장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것일까요? 복음은 약함이며 동시에 강함이고, 복음은 낮아짐이며 동시에 높아짐이고, 복음은 패배이며 동시에 승리이고, 복음은 자유이며 동시에 매임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간직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자유를 마음껏 풍성히 누리는 가운데 오직 사랑으로 종이 되어 섬기는 삶,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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