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갈라디아서

복음대로 살라

이창무 2022. 2. 21.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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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갈라디아서 제 7 강 / 이창무

복음대로 살라

말씀 / 갈라디아서 6:6-18
요절 /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제가 대학 때 한 교수님으로부터 1년 동안 민법과 상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종강 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배운 것을 다 잊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꼭 기억해 주십시오. 첫째 보증 서지 마시고, 둘째 동업하지 마십시오. 이것만 지키면 쫄딱 망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후로 사회 생활하면서 이 말이 진리라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갈라디아서도 종강할 때가 왔습니다. 바울 역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이었을까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이 농사의 원리는 우리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내 인생에 무엇을 심었느냐에 따라 추수 때에 어떤 열매가 맺힐 것인가가 결정이 됩니다. 농사와 인생이 다른 점은 농사는 올해 망치면 내년에 다시 심어도 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기 때문에 더 신중하게 심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스스로를 속입니다. 어떻게 스스로를 속입니까? 심지도 않고 ‘어떻게 되겠지”라고 하면서 속입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 은혜로 산다’는 말을 오해하면 이런 현상이 생기기 쉽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의미를 곧 어차피 구원을 받을 것이니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것에는 이제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목적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우리의 마음과 그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실로 드러나는 열매를 가지고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고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인생 결산의 때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를 드릴 수 있도록 힘써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심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을까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육체란 우리 본성에 새겨진 자기중심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세상은 끝없이 “나, 나, 나”를 외치고 삽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으면 “내 자식, 내 자식, 내 자식” 이러면서 삽니다. 전부 “나” 아니면 “내 자식”을 위해서 삽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을 잘 챙기고 부모로서 마땅한 도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직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쓰라고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과 재능과 능력과 물질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오직 나 만을 위해 쓴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가서 썩은 냄새만 풍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능력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서로 짐을 나누어지고 사랑으로 종 노릇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바라며 신실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원한 생명과 그 생명이 주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썩어질 것을 거두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영생을 거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농사가 쉽지 않듯이, 영생을 열매로 거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위해 심고자 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

실제로 심고 거두는 일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오랜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성령을 위해 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위해 심는다고 해서 즉시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쉽게 잘 변하지 않습니다. 양도 잘 안 변하고 남편도 잘 안 변하고 아이들도 안 변하고 무엇보다 나부터 잘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우리 모습을 볼 때 낙심이 됩니다. 

또한 공동체를 섬기고 사람을 도우려 하다 보면 감정에 상처를 입을 때가 많습니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잘 해 보려고 했는데 도리어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공동체에 실망을 느낍니다. 이럴 때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고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고 더 이상 감정 노동에 시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밖으로 빙빙 돌면서 불평하고 비난만 하는 아웃사이더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한 말이면서 동시에 바울 자신에게 한 말입니다. 당시 바울만큼 오해와 비난과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 있을까요? 바울이라고 해서 힘 빠지는 순간이 없었겠습니까? 그렇다고 바울이 다 포기하고 접었다면 초대 교회가 복음 진리 위에 든든히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 일이 때로는 너무 힘들어 눈물 나는 날이 있을 지 모릅니다. 마음이 상하고 괴로운 날이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의 말처럼 울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기쁨으로 거두는 날이 올 것입니다. 캠퍼스 전도와 제자 양성! 오래. 동안 씨를 뿌리고 심으려 애를 써보았지만 별다른 결실이 없어 보입니다. 포기하는 편이 차라리 낳겠다는 마음이 들지도 모릅니다. 다음 세대를 양육하고 세우는 일! 이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굵직굵직한 열매들이 과연 맺힐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지 모릅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적으로 청년이 없고 주일 학교에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지라도 계속 뿌리고 심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계속 심으면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반드시 옵니다. 기성 세대보다 훨씬 더 능력 있고 실력을 갖춘 새로운 세대가 서서 열방과 민족을 섬기는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

선을 행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실 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선한 일을 뒤로 밀어 놓을 일이 아닙니다. 기회를 얻는 대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또 사람을 가려서 선을 행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해야 합니다. 나랑 합이 맞는 사람, 내 스타일에 딱 들어맞는 사람에게만 잘해 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시각이 너무 좁아지고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몸은 여기 있어도 우리의 마음과 가슴은 전쟁의 위협 가운데 있는 우크라이나를 향할 수 있어야 하고, 저 북녘 땅에 있는 우리 동포들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바로 우리 옆에 있는 믿음의 가정들, 요회 식구들에게 선한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가 오래 지속되면 거의 모든 모임을 비대면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관심과 섬김의 사각 지대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믿음의 가정들을 서로 돌아보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

지금까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대필자가 받아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바울이 직접 손을 쓰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큰 글자로 쓰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편지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마지막 당부가 무엇일까요?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12,13)”

바울의 마지막 당부는 억지로 너희를 할례 받게 하려는 이들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갈라디아서 안에서 계속 등장해 왔던 거짓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그들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풀이하면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맘에 든다. 폼이 난다. 멋지다.” 이런 평판을 들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번째 특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원색적인 복음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내가 비참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대로 있으면 지옥에 갈 운명이라는 것을 경고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내가 쌓아 올린 인간적 노력과 성취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와 공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늘 칭찬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거짓 교사들은 십자가 복음을 입도 뻥긋 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 특징은 제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율법을 지키는 모양만 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율법의 핵심이고 정수인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교회 밖이든, 교회 안이든 사람들로부터 보기에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자부심이고 자랑거리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자랑은 그들의 자랑거리와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a)”

사도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바울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만난 모든 성도의 공통된 고백인 동시에 우리의 고백입니다. 왜 십자가만이 우리의 자랑인 것입니까?

첫째,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곁에 함께 매달렸던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못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강도를 향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강도와 같은 흉악한 죄인의 모든 죄를 단숨에 용서하고 그를 낙원으로 이끌 능력이 십자가 외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강도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죄사함을 줄 수 있는 능력, 우리에게 참 자유를 줄 수 있는 능력, 우리로 하늘의 복을 누리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즐거워하고 자랑합니다.

둘째,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랑이 없어 메마른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 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가슴에 품어 오셨는지, 그 사랑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퇴색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사랑이 계속 샘물처럼 끝없이 솟아나 우리 가슴을 적시며 스며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십자가가 진정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경쟁에서 이겨 상대방을 짓밟는 것이 승리입니까? 높은 자리에 올라 군림하는 것이 승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로 들어가셨습니다. 낮아지심을 통과하여 높아지셨습니다. 섬김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사랑으로 종 노릇하심으로 주님이 되셨습니다. 져야만 승리하는 놀라운 비밀이 십자가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상 방식으로 이기는 것이 곧 지는 것이요, 종이 되고 섬기는 십자가 방식만이 참된 승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면 오직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존엄함과 자존감을 부여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만을 자랑하는 사람 세상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여기서 세상은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성과 죄가 지배하는 가치관, 삶의 방식과 생활 양식 등을 말합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와 세상과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집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b)”

세상이 나에게서 죽고 내가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이 말이 우리가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무관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습니다. 바울의 말은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세상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미모를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들에게 위력을 발휘합니다. 너희가 자랑거리로 삼는 것을 줄 수 있으니 나에게 충성하라고 유혹하거나,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빼앗아 가겠다고 협박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세상에 치여 삽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은 지 도시를 뒤로 하고 산 속에 들어가 유유자적 살아가는 사람을 소개하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겠습니까? 특히 4~50대 남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도 숭배하지도 않습니다. 그에게는 세상 자랑이 전혀 먹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 가운데 살면서 사람들의 시선이나 세상의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15)”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멋있게 폼 나게 살든 좀 구질구질하게 살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남들에게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우월감에도 열등감에도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입니다. 관건은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6)”

이 규례란 율법의 규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복음을 가리킵니다. 이 복음을 따라 새로워진 사람의 내면에는 평강과 긍휼이 임합니다. 이 복음은 누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까?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

복음의 진리는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닌 사도 바울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유력자들과 친분을 자랑하고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간지 나는 비싼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자신들의 바울보다 더 나은 교사인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진짜 사도임을 증명하기 위해 전혀 다른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숱한 상처와 흉터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차례 겪었던 매질과 숱한 고난이 남긴 흔적들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영달을 꿈꾸며 화려한 성공을 추구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나온 복음은 다른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 몸으로 살아낸 사도의 복음만이 진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8)”

바울의 마지막 작별 인사에 나타나 있듯이 복음은 한 마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껍데기나 외모가 아닌 우리 심령 깊은 곳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강력하게 임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은혜의 복음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자아상을 갖게 해 줍니다. 복음은 두려움과 불안이 아니라 감사와 사랑이 동기가 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대하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자랑거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복음은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나눈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복음에 관한 책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어떤 단어를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가 자동으로 나오듯이 우리는 “복음” 하면 “전파”라는 단어가 자동으로 떠오릅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은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필요한 것, 전도할 때 필요한 것 한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구원받은 나는 복음을 이미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에게는 복음 말고 더 고차원적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우리의 이런 통념을 뒤흔들어 놓는 책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 답게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뒤죽박죽이 된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시키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불신자 못지않게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관점을 바꾸어 놓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먼저 우리가 얼마나 생각 이상으로 죄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무능하고 병들었는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동시에 이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과 수용을 누리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내면에서 일어난 이 변화는 우리 삶의 모습을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갈라디아서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면서 제 마음 속에 계속 울림이 되는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 답이다”라는 말입니다. 실패에는 성공이 답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지는 것이 답이고, 내려간 사람은 올라가는 것이 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성공하고 소유하고 높아져도 결국 제 자리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내면의 얽매임과 깨어진 관계와 망가진 삶은 그대로인 것을 보았습니다. 답이 아닌 것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런 것들이 답이 아니고 복음이 답이라는 것을 확실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뿌리부터 변화시키고 망가진 것들을 회복시키는 능력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우리 자신 안에서 힘차게 역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 안에서도 복음이 똑같이 역사하는 모습을 보려는 열정에 사로잡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암1부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 복음으로 늘 새로워지는 교회, 복음대로 살아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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