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내가 왕이니라

이창무 2021. 10. 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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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4 강 / 이창무

내가 왕이니라

말씀 / 요한복음 18:28-40
요절 / 요한복음 18: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일제 강점기 낭만파 시인 중 한 사람인 홍사용이 1923년에 발표한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오늘 말씀 가운데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분을 묵상하며 이 부분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하나님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진리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진리가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십니다. 거짓이 판을 치는 이 세상 가운데 우리가 진리를 증언함으로 그분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서 당당하게 심문에 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안나스는 이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사위 가야바에게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가야바가 주관하는 공회 앞에서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네가 그리스도냐”는 가야바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라고 대답하십니다. 공회는 이 대답을 신성 모독의 근거로 삼아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합니다. 그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28)”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른 아침 시간 관정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유대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러나 관정 안으로는 들어가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해져서 그날 저녁에 있는 유월절 어린 양을 먹는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결하기를 원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장면입니까? 겉으로 보이는 정결함으로 마음의 부정함을 덮으려 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요즘 표현으로 하면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빌라도가 관정 밖으로 나가서 예수님을 끌고 온 유대인들을 상대합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

예수님은 로마 당국이 예의주시하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사람을 자신에게 끌고 온 것을 빌라도는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30)”

유대인의 대답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데려올 만했으니 데려왔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느냐는 식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에게 참과 거짓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빌라도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31)”

빌라도는 자신을 도장이나 찍어주는 바지 사장 정도로 간주하는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서 심기가 몹시 불편했습니다. 너희 법대로 하라며 재판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사형 권한이 없다며 살짝 꼬리를 내렸습니다. 여기서 사형은 특별히 로마의 십자가형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에 의한 투석형을 못 본 체했다고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얼마든지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그런 식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굳이 십자형을 고집했던 것일까요?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죽은 자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죽이고나서 순교자이자 영웅이 되는 모습을 보는 불상사를 확실히 예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예수님이 사느냐 죽느냐, 죽는다면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는 유대인들과 빌라도 사이에 밀당과 거래를 통해서 결정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속수무책 여기에 끌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숨은 진실이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32)”

앞서 예수님은 12장 32, 33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여기서 땅에서 들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것이 곧 구원의 방편임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시는 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일에 역할을 맡아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당하는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모든 일이 다 그분의 빅 피처 중 일부였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좋게 보자면 일단 이방인과 접촉하여 더럽혀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유월절 잔치에도 참여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밤을 꼬박 새고 아침부터 관정의 문을 두드리는 참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권력자와 밀고 당기기에 능수능란한 수완 좋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시기심과 욕심으로 가득 찬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고집불통이며, 일단 위협이 된다 싶으면 짓밟고 없애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곳도 이런 사람들이 쥐락펴락하는 곳입니다. 그들이 오징어 게임을 하고, 우리는 그 게임의 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저들만의 게임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아래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면, 나는 놈 위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계셔서 전체를 조망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력함, 답답함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하나씩 성취해 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를 믿고 이 세상 권세들의 실력 행사 앞에서 위축되지 맙시다. 낙담하지 말고 겁내지 말고 담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

다시 관정 안으로 들어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유대인들이 어떤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공회에서 결론 내린 죄목은 신성 모독죄였습니다. 그러나 이 죄목에 빌라도가 관심을 가질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허락도 없이 유대인의 왕이 되려 했다는 시나리오를 짜고, 국가 반역죄로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누구입니까?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정치인입니다. 딱 봐도 예수님은 “바라바” 같은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너 같은 인물이 유대인의 왕이라니 가당하기나 하냐”는 식으로 빈정대며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을까요? “억울합니다, 이건 다 저들이 만든 거짓 프레임입니다.”를 외치셨나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4)”

예수님은 답변 대신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정말 자신을 위해 그 대답을 듣길 원하는 것이오? 아니면 그냥 총독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오?" 예수님은 이 질문을 왜 빌라도에 하셨을까요? 유대인의 왕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빌라도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의 그리스도이십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질문은 그를 구원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재판을 받는 그 순간조차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고 계십니다. 솔직히 빌라도가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 숨이 붙어 있는 한, 단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해 내겠다는 마음으로 재판장 빌라도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

안타깝게도 빌라도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유대인도 아닌데 왜 내가 너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갖고 알고자 하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일생 일대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빌라도는 예수님께 다만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유대인들을 너를 사형에 처해 달라 하는지”나 말해 보라고 다그쳤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왕이시며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핵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36절 속에는 내 나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왕이 맞다고 시인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자기 나라를 세우려 하셨다면 체포 당하실 때 가만 있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목숨 걸고 싸워 왕인 자신을 보호하라고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칼을 칼집에 꽂아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라는 칼과 창과 병거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되는 그런 세상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가리켜서 이 땅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교회 역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에 입각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 나라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면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대표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상 나라의 원리는 무기를 들고 싸워서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국군의 날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이번 기념식에는 우리 나라가 보유한 육해공의 최신식 무기들이 총출동해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멋진 무대를 연출했습니다. 영상을 보면서 소위 말하는 “국뽕”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런 강한 군대의 힘으로 지켜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전쟁이 아닌 평화의 나라입니다. 미움과 분노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하나가 되는 나라입니다. 인간적인 야망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사람이 영광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나라입니다. 우리 안암1부가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살아 있고 그것이 실현되는 곳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세상 가운데 예수님이 왕이신 그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나라는 진리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7)”

빌라도는 예수님이 왕이라고 하면서도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네가 왕이 아니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그러나 빌라도 머리 속에 박혀 있는 로마 황제나 헤롯 왕과 같은 그런 왕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십니다. 이 땅에 어떤 정치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거짓이 지배하고 있는 이 땅 가운데 진리가 살아 숨쉬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세상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영접하고 환영했나요? 아니요. 세상은 진리의 증언을 듣기를 싫어했습니다. 아예 진리의 왕을 죽여 없애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거짓과 위선이 드러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고 오직 힘과 권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거짓을 참으로, 참을 거짓으로 둔갑시켜 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앞에 예수님은 피고인 신분으로 서 있습니다. 진리가 거짓에게 패배한 것 아닙니까? 진리는 너무 무력한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누구입니까? 출세길을 달리던 빌라도는 A.D. 35년 소요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죄로 본국으로 소환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기득권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수명을 다하고 맙니다. 그러나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지금까지 진리로 세상 만민을 다스려 오고 계십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바는 결국에는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체험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2019년 여름수양회에서 권대장 목자님이 전하셨던 메시지 속 간증이 생각납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목자님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회사 대표는 오직 눈 앞의 이익만을 쫓으려 했고, 목자님은 고객과의 신뢰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많은 번민과 고뇌 끝에 목자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리대로 살겠다 결심하고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백수가 될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은혜로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전 직장이었던 그 회사는 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고자 하면 때로 세상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충돌은 동등한 싸움이 아닙니다. 저쪽은 바위 같고 나는 거기에 계란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깨지고 부숴지는 쪽은 항상 진리 쪽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과 함께 시작합니다. 거짓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더욱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 편에 서 있는 자와 함께 하셔서 항상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수가 비록 적을 지라도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의 음성을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름스 공회에 홀로 출석하던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믿었기 때문에 복음 진리를 끝까지 고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 585장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으로 진리의 왕 예수님을 따르며 진리를 증언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대한 빌라도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38a.)”

빌라도의 질문은 어떤 뉘앙스의 말일까요? '진리가 밥 먹여주냐'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비웃듯이 던진 질문일까요? 아니면 흔들리는 마음으로 '나도 정말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라는 뜻에서 던진 질문일까요? 어떤 의미이든 진리 안에 살고 진리를 거침없이 증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빌라도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이끌어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b)”

빌라도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변화가 생긴 것은 확실합니다. 처음에는 요식 행위로 대충 재판하려 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관정 밖에서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석방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함으로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는 일까지 감수할 용의는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진리보다 이해득실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머리를 굴려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39)”

빌라도는 유월절 특사로 예수님을 석방하자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죄를 고발한 유대인의 체면도 세워줄 수 있고 예수님을 석방하고 싶은 자신의 체면도 설 수 있는 방안이니 이 정도 선에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기를 바랬습니다. 과연 이 제안이 통했을까요?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

유대인들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살려 달라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의 강도라는 표현은 오늘날로 치면 사람을 죽인 테러리스트라는 의미입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설마 예수님 대신 유죄가 명백한 바라바를 석방해 달라고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로서 빌라도의 책략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테러리스트보다 예수님이 더 위험 인물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증언한 진리가 테러보다 그들을 더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거짓의 사람에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진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유대인들처럼 우리를 두려워하고 불편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빌라도처럼 우리에게 네가 따르고 있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이때 우리가 오늘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담대히 증언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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