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창무 2021. 9. 1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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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2 강 / 이창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 / 요한복음 17:6-19
요절 /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지금은 철거 중인 구 센터 4층에 몇 개의 기도실이 있었습니다. 학생 때 어느 날 한 기도실에 들어갔는데 옆 기도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귀에 익숙했습니다. 제 일대일 목자님의 기도 소리였습니다. 저는 제 기도는 하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우고 그 기도를 다 들었습니다. 그 기도 중에는 저에 대한 기도도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저는 목자님이 제가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분의 양인 우리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실까요?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 17장만큼 예수님의 기도가 길고 구체적으로 기록된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가 이제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6,7)”


세상 중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우리도 이 중에 들어 있습니다. 이들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께 주시고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어떤 사역을 하셨습니까?


첫째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란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능력과 영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부지런히 말씀과 표적 그리고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신 결과가 어떠합니까?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6b).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말씀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7). 그래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았습니다. 한 인간의 견해로 치부하지 않고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순종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만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지식과 믿음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직 십자가의 예수님을 온전히 믿을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은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비록 제자들의 믿음에 한계가 있었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아는 사람으로, 그래서 영생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 주셨습니다.

6절부터 8절까지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지난 삼 년 반 동안 무엇을 하셨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하나님 앞에 아뢰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예수님의 제자 양성 사역 보고서다’ 이렇게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 양성 사역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아마도 후한 평가를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지는 못하셨습니다. 겨우 열 두 명이고 그 중에 한 명은 이미 배신자의 길로 가버렸습니다. 이번 주 소천하신 조용기 목사님이 개척한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교인 수 83만명에 비하면 아주 초라한 숫자입니다. 양적으로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제자들의 지식과 신앙이 높은 수준이라고 말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습니다. 잠시 후 일어날 예수님의 체포와 재판과 처형 장면을 보면 이 사실은 명백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라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적은 수의 제자들이지만, 그들에게서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모습, 예수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시고 그분의 말씀을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예수님은 사역에서 성공하신 것이었습니다. 이후의 성장과 성숙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차례입니까? 제자 양성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했고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우리는 성공했습니까? 아니면 실패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만하면 성공이라고 말할 지 모르고, 또 어떤 사람은 처참한 실패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 사이에 또 수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숫자의 많고 적음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일에 신실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실패하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록 수가 적을지라도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알아가며 믿음이 자라나는 역사가 있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우고 나누는 모든 말씀이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우리를 통과하는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내 자신의 한계가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섞여서 혼잡하게 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만이 오롯이 드러나고 그 결과로 순종의 열매, 지혜의 열매, 믿음의 열매가 맺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신 것이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사역의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역이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9,10)”

말씀과 더불어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하는 대상이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한정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알고,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토록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 예수님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첫번째 기도제목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지금까지 제자 공동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숱한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와해되지 않고 잘 버텨왔습니다. 누구 덕분입니까? 예수님이 앞장서서 그 공격을 다 받아 내시고 물리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에 부역하던 세리 출신 마태도 있었고, 그런 세리들을 암살하고 다니던 열혈당 출신 시몬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한 솥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중심에 있으면서 제자들을 사랑으로 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사람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 덕분에 지금까지 보전될 수 있었습니다(12).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더 있지 않으시고 곧 아버지께로 가시고, 제자들만 덩그러니 세상에 계속 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 공동체는 과연 보전될 수 있을까요? 계속해서 제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결국 뿔뿔이 다 흩어져 버릴 가능성이 훨씬 더 높지 않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서 보전과 하나 됨은 서로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 됨이 없이 어떻게 제자 공동체가 보전될 수 있겠습니까? 요즘 표현으로 하면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도 참 어렵지만, 어찌 보면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라는 위험 요소가 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위험 요소를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하나 됨의 모델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됨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 됨을 이루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자아를 다 지워버리고 무조건 복종하도록 강요해서 하나 됨을 이루고 계실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두 분의 관계 속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분이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의 것을 한없이 다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발적으로 순종하십니다. 이처럼 두 분은 상호 존중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의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 공동체 가운데 이루어지기 원하시는 연합의 모습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이런 연합이 잘 이해가 안 되고 낯설게 보이십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하나 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세상 곳곳마다 갈등과 대립이 있고, 미움과 다툼이 난무합니다. 그 어떤 곳보다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할 가족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족도 있지만, 불화 때문에 추석에 모이기만 하면 다투거나 아예 모이지도 않는 가족도 있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리시는 사랑의 하나 됨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기쁨을 누리길 바라십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로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상은 이 모습을 보고 우리가 굳이 큰 소리로 외치지 않더라도, 교회가 우리들의 대안 사회라고 스스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의 가치를 인정해 줄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단합 대회라도 해야 할까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두 분이 어떻게 서로를 배려하시고 섬기시고 사랑하시는가, 어떻게 자기 중심성이 없이 하나 된 연합을 이루시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이 여기에 감동받고 감화되어서 우리 역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3)”

제자들 안에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 예수님의 기대요 소원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기뻐합니까? 성공했을 때, 부자가 되었을 때, 소원 성취를 했을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쁨은 이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으로 순종하여 온전히 하나 됨을 이루심으로 기뻐하십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이 제자들 가운데서도 넘쳐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고민 거리가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4)”

문제는 세상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은 예수님께서 속한 사람들 미워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서로 부대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살면서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두번째 기도를 하십니다.

두번째 기도제목은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소서’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5)”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을 악한 세상에서 데려가고자 하지는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광야 같은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 와중에 잠시라도 정신줄을 놓게 되면 아차 하는 순간에 악한 세상에 휩쓸려 갈 지 모릅니다. 죄악의 물결이 너무나 거세기 때문에 연약한 제자들의 힘만으로는 버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더라도 악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기쁨이 충만하길 원하십니다.

얼마 전 보이스 피싱에 7억을 날린 남편의 사연을 한 커뮤니티에 올린 아내의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 남편은 “보이스 피싱 따위에 속는 사람이 바보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었다고 합니다.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 속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마귀에 대한 두 가지 오류가 있는데, 하나는 마귀의 존재를 너무 무서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의 존재를 너무 무시한다는 것이라 합니다. 오늘날에는 마귀의 존재를 너무 무시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우리 삶이 매일같이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을 꼭 지키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절박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맞는다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실 이유가 전혀 없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예수님이 나를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건강 문제, 물질 문제, 자녀 문제 등등 우리가 기도로 구해야 할 것이 정말 많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먼저 나 자신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자녀들, 동역자들과 양들을 이 유혹과 압박이 거센 세상에서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선한 싸움을 힘차게 싸워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번째 기도제목은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니다. 거룩함이라는 말은 본래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제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직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만이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서 나의 죄를 깨닫고 나의 자아가 산산이 부서질 때 거룩의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 앞에 항복할 때 우리는 진정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8,19)”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왜 보내셨습니까? 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왜 보내십니까?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먼저 거룩해지지 않고서 거룩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세상과 구별됨이 전혀 없이 살면서,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하는 공동체는 먼저 진리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입니다. 배가 만약 바다 위에 있지 않고 산 꼭대기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배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속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거친 풍랑이 몰아친다 해도 배는 바다 위에 있어야 하듯이, 교회는 죄악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세상 한 복판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배 안에 바닷물이 잔뜩 들어와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배는 이내 침몰해서 더 이상 배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으로 세속적인 것들이 잔뜩 들어와 있으면 그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못하는 교회는 더 이상 선교하는 공동체로 쓰임 받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가장 큰 무기는 교인의 숫자나 재정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거룩입니다. 한국 교회는 20세기 초 인구의 1 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였었습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어떤 배일까요? 여기 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서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안암1부는 어떤 배일까요? 어떤 상태인지는 주님만이 아시겠지만 큰 파도 앞에 있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시대의 물질주의, 자기 중심 주의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미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는 거룩한 구원의 방주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아울러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교회로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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